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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철학카페] 2. 중심은 비어 있어야 한다

ngo2002 2011. 8. 29. 09:09

이정우의 철학카페] 2. 중심은 비어 있어야 한다


                                                                                  한겨레21 / 2001년 10월 31일 제382호



    그리스인이 발견한 중심-무의 사유… 로고스 행사하는 광장 통해 힘의 논리 물리쳐

사진 / 아고라, 즉 광장은 만남의 장소이자, 대화의 장소였으며 민주주의라는 삶의 양식을 탄생시킨 곳이다.


   ‘그리스의 기적’을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과거에는 단순히 그리스 사람들이 ‘천재’였다고 문제를 처리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외향화되는 추세에 따라 그리스의 기적도 외적 여건들을 통해 설명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이 외적 여건들 중 하나로 지리적 조건을 빼

놓을 수는 없으리라. 중국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

명, 인도 문명과 구분되는 헬라스 문명의 뚜렷한 특징이 있다(‘헬라스’란 그리스지역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부른 말이다. 이로부터 ‘헬레니즘’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것은 헬라스 세계가 한가운데에 바다(에게해)가 있고 그 바다를 빙 둘러싸고서 (훗날 ‘폴리스’의 형태를 띠게 되는) 작은 도시-국가들이 발달했다는 사실이다. 이 독특한 지리적 구조는 헬라스 세계의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기본 조건이다. 존재론적으로 말해 그것은 가운데가 차 있고 바깥이 비어 있는(더 정확히는 중심에 대한 타자가 둘러싸고 있는) 일반적인 중심-유(有)의 구조가 아니라, 가운데가 텅 비어 있고 그 빔을 다양한 복수적 존재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심-무의 구조이다. 이 구조로부터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사유구조와 생활양식의 한 측면(그러나 본질적인 측면)을 읽어낼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 기적적인 민주주의의 등장


   그리스인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민주주의의 건설이다. 물론 그것이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불완전한 민주주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노예도 존재했고 여인들의 정치 참여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스 민주주의의 등장은 분명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의 과학, 철학, 예술, 역사 서술 등도 놀랍지만, 민주주의의 등장만큼 놀라운 것은 없다.

   아고라, 지배와 복종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사진 / 진리의 여신 아테네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튀어나왔다는 것은 인간의 싸움이 물리적 힘에서 이성으로 옮겨왔음을 상징한다.

     민주주의는 귀족정과의 투쟁을 통해서 조금씩 형성되었다. 귀족들은 이전의 왕정을 물리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건설했지만, 그 또한 민중에게 억압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물리적(전차, 말 등), 상징적 힘(종교적 특권 등)으로 자신들의 가문을 세우려 했는데,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점점 평민들의 저항에 부닥쳤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 문화가 발명한 가장 기념비적인 개념이 등장한다. 로고스(이성)가 바로 그것이다.

    흔히 로고스를 순수한 이론적 개념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로고스는 순수한 학문적 탐구의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투쟁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진리의 여신인 아테네가 완전 무장한 채 제우스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고스가 없는 세상에서 지배와 복종은 철저히 힘에 의해서 좌우된다. 말로서 싸운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모든 존재들은 신체로 싸우지 말로 싸우지 않는다. 인간만이 말로 싸우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고대 세계는 오로지 실질적 힘만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현실을 ‘로고스를 통한 정치’라는 파천황의 개념으로 바꾸었다. 이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화, 토론, 논쟁, 경쟁, 타협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로고스이다.

    그렇다면 로고스는 어디에서 행사되었는가? 로고스가 최초로 행사된 곳은 바로 아고라 즉 광장(廣場)이었다. 공공의 광장인 아고라는 시장의 기능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만남의 장소이자 대화의 장소였다. 대립과 대결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힘의 일방적인 지배가 있는 곳에는 복종만이 있을 뿐 대립과 대결은 없다. 칼이나 돈이 아니라 생각과 말을 통한 대결이야말로 진정 인간적인 것이다. 그것이 정치의 출발이요 변증법의 출발이다.

     대립과 대결은 이미 그 아래에 평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 때 로고스의 행사는 불가능하다. 타자들은 모두 변방으로 밀려나야 하며 중심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로고스의 행사는 중심이 비어 있을 때 가능하다. 현대의 철학자들이 ‘탈중심화’를 외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 비어 있는 중심이 바로 아고라이다. 민주주의라는 담론적 실천과 도시 건설이라는 신체적 실천은 일치했다. 즉,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인 삶의 양식의 건설은 또한 광장/아고라라는 공간적인 배치와 나란히 탄생한 것이다. 헬라스 세계의 지리적 구조와 그 생각의 구조(삶의 양식) 그리고 (아고라를 중심으로 하는) 그 건축 구조는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 역할을 하는 듯이 대응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 문화의 이 구조는 철학적 사유에 각인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서구 철학사에 ‘아페이론’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남겼다. 현대어로 ‘무한’(infinite)을 뜻하기도 하고 ‘비일정함’(indefinite)을 뜻하기도 하는 이 개념은 아직 무엇인가로 규정되지 않은 것,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로 규정될 수 있는 잠재력을 띤 것이다. 이 아페이론이 일정하게 규정될 때 물, 불, 공기, 흙 같은 원소들이 나온다. 이 원소들 중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다른 원소들에 의해 견제된다. 그런데 이런 경계가 가능하려면 이 네 원소를 동시에 아우르면서 그들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는 어떤 바탕이 요구된다. 그 바탕이 아페이론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의 이런 기능을 묘사하면서 ‘정의’(正義)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아페이론은 네 원소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부정의를 응징하는 역할을 하는 바탕인 것이다. 그것은 원소들의 공통의 기원을 형성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동등하게 배분하는 무궁무진한 원천이다. 그것은 카오스이지만 무질서의 카오스가 아니라 오히려 무궁한 질서를 그 안에 배태하고 있는 카오스인 것이다. 이 점에서 아페이론이라는 우주론적 개념은 바로 정의 개념이라는 정치적 개념 및 아고라라고 하는 건축적 개념과 쌍둥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들은 곧 정치가였고 건축가였다.


    중심이 비어 있어야 만물이 통한다


사진 /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 그는 서구철학사에서 '아페이론'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남겼다.

     사유의 이런 구조는 다시 우주에 대한 표상에서도 등장한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우주(특히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우주)는 한가운데에 바다가 있고 그 바다를 고리 모양의 대륙이 빙 둘러 있는 우주였다. 그런데 그 바다에 다시 그들이 살던 유럽 대륙이 떠 있었고, 그 유럽 대륙 또한 다시 작은 바다를 빙 둘러싼 고리 모양의 대륙으로 표상되었다(그리고 바다의 다른 쪽에는 잃어버린 대륙인 아틀란티스가 있었다고 보았다). 다만 이 작은 대륙은 완전한 고리가 아니라 한 군데가 뚫려 있는(헤라클레스의 기둥) 고리였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인들은 에게해를 둘러싼 헬라스 세계의 구조,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의 구조, 그리고 다시 바다 전체를 둘러싼 대륙의 구도라는 삼중의 반복적 구조로 우주를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가 비어 있고 그 주위를 땅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가 세번을 반복해서 우주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무척이나 흥미로운 구조이다.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위대한 사상, 그것은 바로 가운데는 비어 있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헬라스의 가운데가(그리고 나아가 유럽의, 우주의 가운데가) 비어 있듯이, 네 원소의 가운데는 비어 있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중심(물리적 중심인 광장과 정치적 중심인 권력)은 비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를 무엇인가가 차지하고 앉아 고착될 때 사회의 비극은 시작된다. 사회의 한가운데는 비어 있어야 하며, 누구나 거기에 앉을 수 있지만 누구도 거기에 고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정치가들과 건축가들, 철학자들 등등도 그리스인들의 이 위대한 발견을 거듭 음미해야 할 것이다.

출처 :Into the Real World 원문보기 글쓴이 : Noctu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