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3. 기운을 얻으면 예술을 이룬다
한겨레21 / 2001년 11월 7일 제383호
이정우의 철학카페 3|기운생동(氣韻生動)의 미학 (I) 동북아 회화에 깃들어 있는 철학적 사유… 형상의 본질에 주목 생동하는 힘 포착사진 / 다빈치의 <모나리자>. 화가는 부인의 겉모습을 초월한 완벽한 연인을 그렸다.
동북아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말 속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기(氣)다. 흔히 동북아 사유의 세 경향으로서 유교, 불교, 도교를 들지만, 이런 실천철학들 그 이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전제하는 이론적 바탕은 기학(氣學)이다. 기에 관한 사유는 ‘사물들’, ‘세계’에 대한 동북아 지식인들의 공통의 직관을 담고 있다. 따라서 예술에서도 기를 중심으로 한 미학 사상이 전개된 것 역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 중 하나가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가시를 뚫고 비가시를 읽어내는 방법
남제(南齊, 476∼502)의 사혁(謝赫)은 그의 <고화품록>(古畵品錄)에서 육법론(六法論)이라는 회화 이론을 남겼다. 이는 그림을 그림에 있어 따라야 할 여섯 가지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 여섯 가지 중에서 첫 번째 것이 기운생동이다. 그러나 사혁은 이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전개하지는 않았으며 당 시대의 장언원(張彦遠)이 그를 이어받아 기운생동의 미학을 전개했다. 장언원은 여기에서 “기운을 얻게 되면 모양은 저절로 갖추어지게 된다”는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것은 동북아 미학만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예술사 전체, 사유의 역사 전체를 꿰는 중요한 사유들 중 하나이다(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차이도 바로 이 ‘구조와 힘’의 관계에 있다).
공간 속에서 합리적으로 파악되는 형상(또는 구조)과 시간 속에서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힘의 대립은 동서고금의 철학적 사유에 공통되는 기본적인 문제이다. 다소 단적으로 말한다면 서구의 사유와 에술이 전자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동북아의 사유와 예술은 후자에 무게중심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에서 연원하는 서구의 전통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모방(미메시스)과 형상(이데아 또는 에이도스)이다. 예술이란 모방의 행위이다. 무엇을 모방하는가. 형상을 모방한다. 뛰어난 예술은 대상의 감각적 형상(形狀)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들을 넘어 형상(形相)을, 즉 본질을 모방한다. 다빈치가 그린 지오콘다 부인이 <모나리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생긴 여인이었을 리는 없다. 다빈치는 눈에 보이는 지오콘다 부인의 형상(形狀)들을 그린 것이 아니라, 지오콘다 부인의 겉모습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여인의 형상(形相)을, 여인의 본질을 그린 것이다. 다시 말해 여인의 이데아, 즉 이상적인 여인, 완벽한 여인을 그린 것이다.
반면 “기운을 얻으면 모양은 저절로 갖추어지게 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동북아 회화에서는 가시적인 형상들보다는 그 형상들을 살아 있게 해주는 힘/기에 더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 미학이나 동북아 미학이 모두 사물들의 가시적인 표면을 넘어 그 내면을 읽어내고자 했으나, 그리스 미학이 자기동일적이고 영원한 본질을 읽어내려 했다면 동북아 미학은 생동하는 힘을 포착하려고 했다. 가시를 뚫고서 비가시를 읽어내려는 두 시도가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이다. 물론 지나친 이원화는 금물이며 공간적 바탕이 없는 힘도, 힘이 없는 죽은 공간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서구 미학과 동북아 미학은 타원의 두 초점에서 각자 한 초점에 무게중심을 두었다고 해야 하리라.
포착되지 않는 본질을 포착하는 ‘전신’
사진 / 동양의 예술관에 바탕한 산수화는 기운생동의 중요한 자리에 있다.
사물의 표면 저 아래에 흐르고 있는 기를 포착한다는 생각은 고개지(顧愷之)의 ‘전신사조’라는 개념에 매우 잘 나타나 있다. 기에는 음기와 양기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음기와 양기라는 불연속적인 두 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음의 양상을 띤 기와 양의 양상을 띤 기가 있다. 한의학적으로 말해, 음기가 정기(精氣)라면 양기는 신기(神氣)이다. 정기가 한 사물의 잠재적 에네르기를 말한다면, 신기는 그 에네르기를 운용하는 역동적인 흐름이다. 그러나 신(神)이라는 개념은 “음양을 측정하기 힘든 것을 일러 신이라 한다”(陰陽不測之謂神)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분석적 이성으로 쉽게 포착되지 않는 세계의 측면을 가리킨다. ‘신비’(神秘), ‘신기’(神技) 같은 말에서 이런 뉘앙스를 읽어낼 수 있다. 따라서 신이란 한 사물의 내부에 흐르는 기를 분석적 이성으로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심오한 방식으로 통어하는 비가시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전신(傳神)이란 바로 이렇게 쉽게 포착되지 않는 본질(그러나 그리스적인 형상이 아니라 기가 흘러가는 힘 또는 길로서의 본질)을 포착해서 화면에 옮기는 작업이다. 사물이 겉으로 드러내는 감각적 형상들을 모방하는 것은 비교적 용이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신을 포착해서 그것을 시각화하는 것은 어렵다. 또 신이 감각적 성질들과 별도로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신은 감각적 성질들을 통해서 드러나며, 따라서 신의 표현 역시 감각적 성질들을 통과해서 실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많은 전통 미학자들은 눈동자와 광대뼈를 중요하다고 본다. 인물화를 으뜸으로 보았던 고개지는 그림을 다 그려놓고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전신사조는 바로 눈동자에 있다”고 답했다. 맹자 역시 “인간의 눈동자만큼 진실된 것은 없다. 눈동자는 그 악을 숨길 수 없다. 마음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마음이 그르면 탁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비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드러난다. 화가는 가시를 뚫고서 비가시를 읽어내 다시 가시화하며,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 가시를 뚫고서 화가가 본 비가시를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전신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 또는 전신을 증험해주는 것이 기운생동이다. 기는 근원적인 물질-에네르기이고 운은 그 물질-에네르기에 깃들어 있는 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을 ‘리듬’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기는 시간을 따라 흘러가지만 그 흐름에는 결이 있다. 그래서 기의 힘과 운의 결을 읽어내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뛰어난 예술가의 특권인 것이다. 그것은 지속의 연속성 속에서 다질성과 창조성을 직관하는 베르그송적인 경지이기도 하다. 당 말, 오대를 산 형호(荊浩)는 기를 “마음가는 대로 붓이 옮겨지고 아무런 의혹없이 대상을 그려내는 것”으로 보았고, 운을 “기교의 자취를 노골적으로 남기지 않으면서 사물의 모양을 그리고, 비속하지 않은 품격을 갖추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기운생동의 포착을 고개지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생각했지만 그뒤 차차 산수화가 중요한 자리를 점하게 된다.
예술적 천재성은 도덕적 성품에서 나온다
북송 시대를 산 곽약허(郭若虛)는 기운이란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천품을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했다. 동양적 형태의 ‘천재론’이다. 그래서 곽약허는 사혁의 육법의 두 번째로 든 ‘골법용필’(骨法用筆) 같은 것은 배울 수 있어도 기운은 배울 수 없다고 했다. 기운이란 어디까지나 타고나는 것이어서 손재주가 있다고 또 정밀하게 그릴 수 있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곽약허는 이 기운을 한 인간의 인품에 연결시키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적 천재성을 도덕적 성품과 연관시키려 했다. 도덕적인 망나니가 천재일 수 있는 서구 예술관과는 구별되는 대목이다. 어쨌든 기운생동론을 배경으로 해서 많은 뛰어난 산수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철학아카데미 원장·전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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