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7. 모든 것을 재현하련다
한겨레21 / 2001년12월05일 제387호
이정우의 철학카페7 |고전시대의 욕망
총체적 표상 담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주체와 대상이 유기적으로 관계 맺어사진 / <시녀들>, 1956. 310×276㎝,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학문과 예술의 역사에서 ‘representation’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인간이 늘 무엇인가를 모방하는 존재인 한, 담론사는 곧 모방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방=미메시스는 곧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고, 그래서 ‘representation’의 한 의미는 재현(再現)이다. 그림은 사물들을 재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일 것이다. 때문에 서구미술사는 기본적으로 재현 개념을 축으로 움직여왔다. 플라톤의 사유는 이 모방/재현 개념을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로까지 승격시켰으며, 그래서 재현 개념은 서구의 존재론, 윤리학, 미학을 한줄로 꿰는 실타래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근세의 인식론자들이 인식이라는 행위를 이 재현 모델에 입각해 개념화하고자 했을 때, 이 말은 다시 표상(表象)이라는 함축을 가지게 된다.
시대의 꿈을 하나의 화폭에 드러내
의식은 사물들을 표상해 관념을 만들어내며, 인식론은 그 관념의 기원과 구조를 연구하는 담론으로 자리잡게 된다. 근대 정치철학, 특히 루소의 사유에 이르러 이 말은 또 하나의 맥락을 얻게 된다. ‘대의(representative) 정치’가 그것이다. 일반 의지, 여론, 선거, 국회의 개념들이 정립되면서, 이제 국회는 인민의 일반 의지를 재현하는 대의(代議) 정치의 장으로 자리매김된다. 이렇게 재현, 표상, 대의는 모두 모방의 존재론에 입각한 서구문화의 주요 갈래들을 형성해왔다.
푸코는 고전시대(17, 18세기)의 ‘에피스테메’를 재현/표상으로 파악한다. 에피스테메란 한 시대, 한 문화의 무의식적 근저를 형성하는 것으로(그러나 심리적인 차원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 시대, 그 문화의 장(場) 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하게 생각하고 말하게 만드는 가능 조건들, 사유 문법들이다. 즉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가 재현이라고 하는 것은 고전시대의 사유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재현이라는 구조를 기반으로 사유를 전개시켰음을 말한다. 푸코의 걸작인 <말과 사물>은 이 점을 놀랍도록 정치하게 분석해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푸코는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를 회화의 형태로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로서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라스 메니나스)을 들고 있다. 이 그림이야말로 모든 것을 표상하고자 했던, 즉 사물들만이 아니라 그 사물들을 표상하는 사람과 그 사람을 관찰하는 사람까지 총체적으로 표상하고 싶어했던 고전시대의 꿈을 하나의 화폭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복합적 표상을 위한 주름 구조
<시녀들>에는 캔버스(畵架)가 등장한다. 본래 캔버스는 그림의 대상이 아니다. 캔버스는 그 안에서 그림이 이루어지는 메타적인 틀이지 그림 자체가 아닌 것이다. 오로지 그림 바깥으로 나갈 때에만 캔버스의 존재는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시녀들>에는 그림 안에 캔버스가 들어옴으로써 캔버스 안의 캔버스라는 주름 구조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두 사물을 한 층위에 나타내는 방법은 그 두 층위를 접는 것이다. 즉, 주름을 잡을 때 복합적인 표상이 가능하다. 벨라스케스의 캔버스는 이런 주름 구조를 나타낸다. 그러나 더 의미심장한 것은 바로 그 캔버스에 그려지고 있는 그림이 <시녀들>을 구성하는 그 장면이라는 사실이다. 즉 <시녀들>에 그려져 있는 장면이 <시녀들> 안에서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 <시녀들> 바깥에 있어야 할 주체인 벨라스케스 자신이 그 그림 안에 바로 <시녀들>을 그리고 있는 상황으로 그려져 있다. 요컨대 주체가 대상을 재현하고 있지만, 그 재현하는 주체가 재현의 결과에 함께 접혀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의 표상과 그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사람의 표상이 함께 같은 층위에서 묘사됨으로써 모든 것을 표상하려는 고전시대의 욕망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시녀들>은 공주를 그리고 있는 벨라스케스만이 아니라 그 그림 그리는 광경을 보러온 왕과 왕비까지도 표상하고 있다(푸코는 반대로 벨라스케스가 왕과 왕비를 그리고 있었으며 공주가 방문한 것으로 해석한다). 모델이 된 공주가 칭얼거리자 시녀들은 공주를 달래고 난쟁이와 개가 그녀를 기쁘게 하려 하고 있다. 때문에 왕과 왕비는 공주를 달래러오고, 왕과 왕비가 나타나자 다들 그쪽을 보고서 인사하려 하고 있다. 때문에 설사 <시녀들>이 그림 그리는 주체와 그림의 대상을 한 화면에 표상하고 있다 해도, 왕과 왕비라는 관찰자만큼은 그 광경 바깥에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이들마저도 같은 화면에 집어넣는데, 그 방법이 절묘하다. 화면에 걸려 있는 거울에 왕과 왕비가 비치게 만든 것이다. 이 수법은 사실 그 이전에도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지만, <시녀들>이라는 그림 전체가 총체적 표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수법의 의미는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결국 <시녀들>은 그림의 대상과 그림의 주체, 그리고 관찰자까지도 모두 한 화면에 표상함으로써 총체적 표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주객 사이의 일치는 무너지고…
고전시대적인 표상이란 주객 사이의 일치를 전제한다. 어떤 형태로든 주객이 일치될 때에만 표상이 성립한다. <시녀들>에서 이 일치를 상징하는 것은 그림의 옆면에서 들어와 그림의 대상들과 화가, 관찰자, 그리고 그 대상들을 표상하는 (그림 속의) 그림을 동시에 비춰주고 있는 빛이다. 이 빛은 표상하는 주체와 표상되는 대상, 그리고 표상 자체를 동시에 비춰줌으로써 이 삼자의 관계맺음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이 빛으로 말미암아 주체와 대상은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표상 구조 속에 놓이게 되며, 그 표상 체계의 정립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빛은 주체와 대상 이전에 존재하며, 주체와 대상을 일정한 형태로 관계맺어줌으로써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유지해주고 있다. 이 빛이야말로 바로 데카르트가 ‘자연의 빛’(lumen naturae)이라 불렀던 빛이며, 계몽시대를 환히 비춰준 이성의 빛일 것이다. 이 이성의 빛이 꺼지면서, 재현의 구조가 무너지면서, 주체와 대상을 이어주던 끈이 끊어지면서, 이제 ‘근대성’(modernity)이 도래한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pathos77@hotmail.com
'전문지식 > 공부미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정우의 철학카페] 9. 죽음을 기억하라! (0) | 2011.08.29 |
---|---|
[이정우의 철학카페] 8. 상징의 해석에서 기호의 배치로 (0) | 2011.08.29 |
[이정우의 철학카페] 6. 초월을 꿈꾸는 악몽의 판타지 (0) | 2011.08.29 |
[이정우의 철학카페] 5. 하늘을 우러른 ‘완전한 열정’ (0) | 2011.08.29 |
[이정우의 철학카페] 4. 막힘없는 붓질로 뜻을 새긴다 (0) | 2011.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