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명리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52. 조선왕조 오백년을 지켜온 서울-서울 속의 서울

ngo2002 2011. 8. 22. 14:51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52. 조선왕조 오백년을 지켜온 서울-서울 속의 서울
입력시간 : 2011. 08.22. 00:00


파란만장 세월의 인고 이겨온 '경복궁'

'큰복을 도우리라' 뜻으로 조선시대 정궁

임진왜란때 소각됐다 흥선대원군이 재건

아관파천·일제시대 거치면서 옛 모습 잃어가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이 지난 임진년(1592)이 되자 왜놈들은 육지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해왔다.

십여 년에 걸친 전쟁준비를 해온 그들에 비해 조선에서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부산 앞바다에 기습적으로 도착한 그들은 질풍노도와 같이 서울을 향해 진군했다. 보름 만에 서울이 함락될 위험에 처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경복궁의 근정전에 모였다. 별무대책인 신하들은 임금의 피난을 권하기에 이르렀다.

“전하!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왜놈들이 쳐들어 왔으니 속히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우선 급하오니 의주로 피난을 가셔야 합니다.”

선조대왕은 어쩔 수 없었다. 왜놈들이 궁성에 들이닥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다. 목숨을 살리는 길이 다급했다. 서울을 버리고 아무도 몰래 살짝 빠져나가야 목숨을 건진다. 만백성의 어버이라는 왕은 어두운 밤을 이용해서 보는 이가 없는 틈을 타 줄행랑을 쳐야만 살수가 있었다. 날이 세자 서울장안이 발칵 뒤집혀졌다. 나라님은 온데간데없고 경복궁이 텅텅 비어있는 모습을 본 백성들의 핏발선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왕이 대신들과 함께 우리의 가난한 민초들만 남겨두고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쳐버렸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가난한 백성들과 특히 미천한 종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분노의 아우성을 쳤다. 노예문서를 태워 없애라고 미친 듯 고함을 질렀다.

“아~아 우리들은 어쩌란 말인가!”

“노예해방이다.”

오갈 데 없는 그들은 왜놈들이 쳐들어오면 어차피 죽을 몸이란 절망감이 그들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붙였다. 믿고 의지하며 지켜야 할 왕이 자리를 비웠으니 갈팡질팡이다. 그리고 이판사판으로 막판, 죽자판이었다. 기왕지사 죽을 몸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텅 빈 경복궁 여기저기를 날뛰던 그들은 건물에 불을 질렀다. 나무로 지은 대궐은 시뻘건 불길을 토하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임금이 없는 경복궁은 검은 연기를 토하며 순식간에 엄청난 불길에 휩싸였다.

“훠어월”

“타타탁….”

한번 붙은 불길은 그칠 줄을 몰랐다. 경복궁이 다 탈 때까지 무려 사흘밤낮동안을 탔다고 한다. 주춧돌과 검은 재만 남기고 모두 타버렸다. 경복궁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서 지어진 조선의 정궁이다.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과 멀리 보이는 관악산을 조산으로 지어진 대궐로 나라님의 생활공간이었다. 경복궁에 앉아 눈앞에 보이는 아늑한 남산이 안산역할을 해주는 나라님의 자리, 경복궁(景福宮)은 그렇게 허무하게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풍수지리로 국가의 기초를 닦았고 풍수지리에 의해 국가통치의 이론을 완성시켰던 나라다. 풍수에 대한 논쟁은 한 번도 빠짐없이 조선 오백년 동안 내내 이어져갔다. 풍수논쟁으로 당시의 지식인, 정치인, 풍수 학인들의 관심을 끌어왔고 특히 경복궁은 나라의 정궁으로 숱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재생산 시켜왔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경복궁의 명당논쟁은 이곳이 임금이 거주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세종 때 풍수학자 최양선에 의해서 불거진 이후 지금까지 논쟁의 출발점이었다.

서울 속의 서울인 경복궁이 나라님의 자리로 적절치 못하다는 이론은 이미 무학과 풍수학자 이양달이 주장한 바도 있다. 급기야 최양선은 경복궁불가론의 상소(1433년)를 올리기에 이른다.

경복궁 북쪽 산이 주산이 아니라 목멱산(남산)에서 바라보면 향교동(지금의 운니동 부근)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지금의 승문원자리가 실제의 주산이 된다고 했다. 도읍을 정할 때는 당연히 주산을 택해서 그곳에 궁터를 잡아야 하는데도 북악산 아래에 지금의 경복궁이 들어갔다고 말했다.

왕은 날이 맑고 청명한 날을 골라 직접 주산에 올라 혈맥을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 예조판서 신상과 함께 풍수학자 이진, 이양달, 고중안, 정앙과 경복궁불가론의 상소문을 올린 최양선을 대동하고 목멱산에 올라가 혈맥을 살폈다.

왕과 함께 풍수 학인들은 남산에 올라가 경복궁뒷산인 북악산(백악산)능선의 내맥을 자세히 살폈다. 과연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명당이다 또는 아니다.’ 하는 논쟁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에 이르러 창덕궁을 혈맥에 맞춰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완책으로 백여 칸이나 되는 별궁은 능선의 맥을 찾아 짓도록 함으로써 경복궁불가론을 잠재웠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며 식을 줄 모르는 경복궁과 청와대 텃자리 논쟁은 풍수 학인들의 취향과 입맛에 따라 말을 바꾸며 오르내린다. 백악산에 올라 온 세종은 최종적인 결론으로 일갈했다.

“오늘 북악산에 올라 오랫동안 살펴보고 풍수의 달인 이양달과 최양선의 말을 종합해보면 보현봉의 산맥이 곧게 백악으로 내려왔으므로 지금의 경복궁이 제대로 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승문원의 내맥도 역시 보통의 땅은 아니다. 터가 조금 낮은 것이 흠이다. 산수가 곧게 뻗어 좋고 마주보는 남산이 조금은 높다. 흠으로 보이는 결점들을 어떻게 비보할 것인지를 빠른 대책을 세워 보고하도록 하라.”

왕이 보는 눈과 대신 및 풍수 학인들이 느끼는 시선의 차이는 컸다. 왕실에서는 명당이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궁궐을 옮기기를 바랐고 대신들과 풍수학인 및 신하들은 궁궐을 새로 짓는 다는 것은 엄청난 재정손실이 따르기 때문에 민폐가 무서울 뿐이었다.

결국 대신들의 생각으로는 가급적이면 새로운 토목공사를 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런 백성들의 마음을 알아차린 세종은 이를 수용해야만 했다. 설령 그 자리가 명당이 아니라도 어쩔 수 없이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양선이 주장했던 명당에는 그곳이 오래토록 명당으로 불리며 살아남도록 나무를 심게 했다. 지기를 지키고 상서로운 힘이 궁궐에까지 미치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로써 경복궁명당논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경복궁이 명당인가 아닌가하는 논쟁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재기되고 있음은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국내제일의 풍수학자들인 최창조, 박시익 등이 화가나 예술가들의 미학적 안목으로 경복궁이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복궁터와 청와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볼 것 같으면 먼저 남산에 올라 봉수대가 있는 부분에서 인왕산 줄기와 함께 그곳을 보아야 한다. 감탄사가 저절로 터진다.

“아~아, 서울장안에 저런 곳이 있었구나!”

“풍수교과서와 똑같구먼….”

그러면 그곳이 편안한 자리인가 아닌가를 아마추어의 눈으로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다. 일부의 풍수 학인들은 경복궁과 청와대 터가 너무 드세고 기가 넘쳐 왕이나 대통령이 머물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더 높고 큰 힘을 가진 신들이 노닐 곳이라고도 말한다.

경복궁은 태조 4년(1395)에 창건된 조선에서 가장 정성을 들여 지은 궁궐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1392년 7월 7일 개경의 고려 왕궁인 수창궁에서 왕으로 즉위하고 조선을 건국한 다음 환도를 결정했다. 그 이듬해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고 궁궐과 도성의 기초 작업을 하다가 이를 중지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태조는 즉위 3년에 서울을 도읍지로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다음해에 경복궁을 지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 되었지만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의해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경복궁은 서울의 북쪽에 있다 해서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렀다. 거대한 수도권 인구 이천만 명이 살고 있는 매머드의 도시 ‘서울 속의 서울’ 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자리한 경복궁속으로 들어가 파란만장한 세월의 인고를 이겨온 서울 속의 서울로 들어가 조상들의 숨결을 들으면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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