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의 교통요지 물자운반 제격 한강, 민족의 젖줄… 수도로 천혜의 조건 갖춰 군사적 외침 막기 적당 자연적 방어수벽 구축 서울은 고려 중엽부터 당시의 수도였던 개성과 평양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도시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함께 남경으로 불리던 서울은 고려말기 정치적 사건의 중심축에 자리하고 있었다. 개성은 이미 지기(地氣)가 쇄하여 관심 밖이었으며 새로운 도시로 남경천도설(南京遷都說)에 휘둘리며 새로운 가거지로 떠오르는 곳이 서울이었던 것이다. 서울의 진산 북한산에서 힘이 뭉쳐진 바위덩어리가 스카이라인을 이루며 자태를 뽐낸다. 정선이 그린 북한산의 인왕제색도에 칠해진 바위가 오늘날까지 잿빛으로 은근한 위엄을 풍겨준다. 산의 꼭대기에 자리한 암석들의 자세가 마치 개경을 엿보는 자태로 그쪽을 은밀하게 쳐다보며 송악산을 훔쳐본다. 북한산이 용을 쓰듯 개성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의 모습이다. 고려왕조 오백년을 끝내고 서울에 새로운 왕조가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말해주는 형태로 본 이들은 엉뚱한 말을 퍼뜨렸다. 난세에 못 믿을 설로 개성이 망할 것이란 입소문이 무성하게 번졌다. 씨 없는 소문은 민심을 흐리게 했다. 고려의 왕권이 약화되면서 국운이 조금씩 무너지고 권력을 독차지했던 무사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자 군신들 사이에서는 개성보다 지덕이 왕성한 길지로 도읍을 옮겨야한다는 천도론이 부상했다. 그때마다 입에 오르내리는 새 도읍지는 언제나 서울이었다. 고려 공민왕(제31대)은 시들어가는 고려를 움켜잡고 몸부림을 치며 승 보우의 말에 의지하며 믿어왔다. 요승 보우는 공민왕을 꼬드겼다. “대왕! 이제 우리는 도읍지를 옮겨 판을 다시 짜고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 어디가 쓸 만한 곳이란 말이요?” “서울로 도읍을 옮기면 열여섯 나라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받치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도 서울이 좋은 터라고 소문이 났다. 다만 그곳은 장차 이李씨가 도읍할 땅이라는 말이 밑도 끝도 없이 나돌았다. 고려 왕실에서 듣기로는 난감하고 불편한 유언비어에 속했다. 감히 나라가 망한다니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민심을 달래고 이씨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서울로 사람을 미리 보내 여기저기서 자라고 있는 자두나무를 닥치는 대로 잘라버리게 했다. 행여나 이 씨의 등장을 막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자 살아 남기위한 처절한 행동으로 일종의 비방 술이었다. 넓은 들판에는 자두나무를 심고 한참 자랄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잘라냈다. 이 씨를 상징하는 나무가 자두나무였기 때문인데 잘 자라고 있는 멀쩡한 자두나무를 무조건 잘라냈던 것이다. 그러나 차오르는 달은 어쩔 수 없었다. 위화도회군으로 모든 군권을 손아귀에 쥐고 피를 불러온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우기에 이른다. 태조 이성계는 민심을 새롭게 바꾸고 진취적인 정치를 펼치고자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을 것을 부르짖은 그는 도읍지의 천도를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수순이고 불가피한 과정으로 여겼다.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한 이성계는 명나라에 똑똑한 신하를 보내 서 알렸다. 아울러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갑주와 공주에 성을 쌓았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일은 새 도읍지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그는 계룡산의 신도 안에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도읍터를 정하고 궁궐건설에 전념했다. 개경 사람들은 이미 누리고 있던 수도로서의 기득권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며 천도에는 악착같이 반대했지만 벌써 기울어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성계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계룡산 신도안 공사를 그만두자는 의견과 계속하자는 건의에 판단을 흐리게 한다. 쉽사리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 결정권자의 깊은 고민이 수렁 속을 헤맨다. ‘어떻게 할까? 한양이 좋을까? 신도안으로 정할까?’ 이성계는 계룡산 신도안의 공사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풍수지리상으로 분명히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풍수가 좋다고 해서 한나라의 수도로써 만백성을 통치하는데 쓸 만한 곳으로 적당하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 왔던 것이다. 먼저 한나라의 수도로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있다는 사실이 반대의견에 부채질을 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국운을 키워가며 고구려의 옛 땅까지 회복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가급적이면 국토의 중앙에 수도가 있는 것이 유리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한쪽에 치우친 경주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는 결국 고구려의 고토를 스스로 상실해버린 결과를 불러왔던 점은 이미 역사가 이를 증명한 사실이다. 계룡산도 마찬가지였다. 더더구나 해양진출의 원대한 꿈을 이루려면 바다에 접한 곳을 수도로 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신도안은 바다가 보이지 않는 산중속의 비탈진 곳이었다. 지금은 개성의 기존 틀에서 속히 벗어나고픈 마음이 이성계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개성은 커다란 예성강을 끼고 서해바다와 접해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을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륜이 했던 말에 임금이 물음을 던졌다. “공의 말을 듣고 보니 계룡산은 도읍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드오. 그러면 도대체 어디가 제일 좋은 터란 말이요?” 왕의 말이 떨어지자 하륜은 대답했다. “개성에 뒤지지 않는 곳은 서울입니다. 남한강과 북한강물이 합해지며 한탄강과 임진강이 합해져 조강이 되어 서해바다로 가면서 예성강까지 받아들이니 이보다 더한 물길은 없는 줄로 아뢰오. 한반도의 중앙을 관통하며 많은 백성이 모여 살며 충분한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곳이 한강변입니다.” 한강은 길이도 길지만 유역의 면적 또한 압록강 다음으로 드넓다. 또 강물의 유역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국토의 중앙을 점하며 넓은 들판을 끼고돈다. 백제의 온조왕도 한강변에 자리 잡아 국력을 키웠고 등 따습고 배불리며 기운을 발휘했다. 하남 땅은 한강 물이 흐르고 동쪽의 높은 산에 의지하였으며 문전옥답은 기름지다. 서해바다를 품고 있어서 대해를 통해서 세계를 향하여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를 선점한 격이나 마찬가지다. 한서지리지에서는 한강을 대수(大水)라고 불렀다. 만주벌판의 중원을 주물렀던 광개토왕비에서는 하리수(河利水)라고 했는데 이때의 한은 크고 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쁜 얼굴에 곱상한 미모의 연예인 트렌스젠더 하리수(Hot issue)와는 부르는 발음만 같을 뿐 의미하는 뜻은 전혀 다르다. 한강은 민족의 젖줄이며 함께해야할 소중한 터전이었다. 중국인들도 한강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강(江)과 하(河)는 양자강과 황하에만 쓰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도 한강에 강자를 넣어 불렀다. 이것은 그만큼 한강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서울이 으뜸이라는 하륜의 거침 없는 말에 이성계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렇지만 한양은 풍수지리나 도참설에 맞지 않는 점도 있지 않소?” 하륜은 이성계에게 설득하듯 말했다. 먼저 서울은 고려 오백년의 도읍지인 개경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즉 수도로서 적당하다는 말이었다. 옛날부터 도읍지로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점은 군사적으로 외침을 막기에 적당한 곳이라야 했다. 강과 바다가 있어서 자연적인 방어수벽이 둘러쳐진 곳이 한양이라고 주장했다. 대량으로 물자운송이 가능한 곳이며 조선전체 어디서나 서울과의 거리가 비슷하고 패권국가 명나라와의 사신로(使臣路)가 최단거리로 가깝게 확보되어 있으며 서해바다에는 잔잔한 항로까지 있는 곳이 서울이었다. 서울은 조선의 중심으로 육상교통이 좋고 서해와 한강을 끼고 있어서 대량의 물자운반에도 제격이었다. 무등일보 무등일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gisa_ttl="%EC%86%8C%EC%84%A4%EA%B0%80+%E6%B7%B8%E5%B1%B1+%EC%9C%A4%EC%98%81%EA%B7%BC%EC%9D%98+%EC%8B%AD%EC%8A%B9%EC%A7%80%28%E5%8D%81%E5%8B%9D%E5%9C%B0%29%EC%99%80+%EA%B0%80%EA%B1%B0%EC%A7%80%28%E5%8F%AF%E5%B1%85%E5%9C%B0%2949.%EC%A1%B0%EC%84%A0%EC%99%95%EC%A1%B0+%EC%98%A4%EB%B0%B1%EB%85%84%EC%9D%84+%EC%A7%80%EC%BC%9C%EC%98%A8+%EC%84%9C%EC%9A%B8%281%2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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