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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47.왕조실록 보관한 사고지가 있던 곳 (1)태백산 춘양

ngo2002 2011. 6. 7. 18:05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47.왕조실록 보관한 사고지가 있던 곳 (1)태백산 춘양


2011년 05월 30일 00시 00분 입력


태백산 중턱에 자리잡은 토속신앙 성지

드문 인적, 뛰어난 풍수지리와 경치

수백년 기록된 역사 보관지로 최적

소나무 중 으뜸인 춘양목 군락 이뤄

토속신앙의 성지로서 경치도 아름답고 풍수도 좋은 그곳은 기도처였으며 만인의 승지였다. 억울하게 눌림을 달했던 사람들의 눈물자국이 쌓이고 굳어져 화석처럼 변해버린 승지는 과연 어디에 자리하고 있을까?

나라 안 곳곳이 국난(임진왜란, 병자호란)을 치르고 난 이후에는 목숨을 부지할 만한 안심이 되는 곳을 찾아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배층들의 못 믿을 당파싸움과 지방수령들의 끝이 보이지 않는 착취행위, 토색질에 식상한 민초들은 행여나 쓸만하며 아직 살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거렸으며 때맞춰 나타난 정감록에 솔깃해했다.

대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소중한 조선왕조실록을 안심하고 후손에까지 보관할만한 장소를 찾는 일이 다급했다. 삼재가 머물지 않을 곳을 찾아내 사고를 짓고 왕조실록을 보관해야만 했다. 국왕은 선대왕들이 남긴 실록을 보관하는 일이 가장 급한 당면문제였다. 나라님은 경상감사에게 지엄한 명을 내렸다.

“경상감사는 가장 안전한 땅을 찾아내 보고하라!”

“예~이, 가장 안전한 곳에 사고 지을 터를 찾아 올리겠습니다.”

경상감사 유영순은 경상도 땅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사고 터로 적당한 곳을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었다. 힘들게 찾아낸 곳이 지금의 태백산 사고 터(사적 348호)로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126-5번지의 땅을 찾아냈다. 누가 보더라도 편안한 마음이 드는 곳으로 십승지의 그곳에 터를 다듬고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해왔던 곳으로 안심 탕이 드는 장소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오대산, 마니산, 적상산, 춘추관, 태백산에 각각의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했다. 비록 한곳에서 없어지더라도 분산 보관한 실록은 기어이 살아남아야 한다. 행여나 하는 두려움에 분산배치 시켜야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눈여겨 볼 점으로는 다섯 곳의 사고지 모두가 한결같이 오대산 이남에 자리 잡았다.

가장 좋은 땅으로는 난리가 났다하더라도 그곳으로 몸을 피하면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라야 승지가 될 수 있는 최우선 조건이 되었다. 그곳을 선정한 장소는 태백산 중턱에 자리한 산속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없어서 병란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잡아 사고를 지었다. 일종의 산중 창고인 것이다. 태백산 사고지는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풍수도 좋고, 기도나 수도에도 좋은 토속신앙이 왕성했던 곳이다.

태백산이라고 하면 강원도 태백이 먼저 떠오르지만 경북 봉화의 모든 산은 태백산의 줄기가 뻗어 내리면서 만들어진 고을이다. 찾아가기 힘들어서 산속에 숨어살던 자들이 즐겨 찾았던 십승지는 미래의 땅이며 꿈과 희망을 여물게 해줄 곳이었다. 이제 태백산의 춘양으로 들어가 보자.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 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

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 떠나려니 생각나네.

울고 왔던 억지춘양 떠나려니 생각나네.”

봉화군 춘양면에 전래되어오는 억지춘양이라는 속요이다. 예나 지금이나 배부르고 등 따시면 살기 좋은 세상이다. 옛날에는 교통여건이 좋지 않아 춘양이란 곳은 벽촌으로 이름을 날리며 외진 곳이었다. 하도 불편한 곳이라서 이곳으로 시집 온 이들은 다시 돌아가는 친정나들이는 꿈속에서나 그리는 그리움뿐이었다. 그래서 가기 힘든 발걸음을 억지춘양이란 표현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춘양에서는 먼저 춘양목(春陽木)을 찾아보아야 한다. 춘양에 가면 소나무 허리통에 황토색 페인트로 칠을 해서 보호하고 있는 소나무가 있다. 일일이 번호까지 매겼기 때문에 함부로 밸 수가 없다. 1천487본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중이다. 이곳 일대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보호수로서 산림유전 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자란다.

지세가 험하고 산출되는 것들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의식주를 가리는 데는 불편함이 없다. 인간의 가치를 궁극적으로 ‘자아의 실현’이라고 본다면 애쓰는 노력도 중요하고 문화유적과 정서를 키워주는 자연경관도 필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단지 편리함만을 추구해왔지만 과연 현재나 미래의 삶이 생각했던 만큼 풍요롭고 안락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진실로 인간다운 삶이었는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갈피가 잡히지 않고 싱숭생숭하거들랑 십승지라는 태백산자락의 춘양으로 찾아가 소소한 터전을 찾아보는 것도 결코 헛발질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열린 기회는 잡아야 내 몫이다.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 태백산의 울진을 거쳐 봉화의 춘양에 이른 소나무는 주위 주변의 꼬불꼬불한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똑바르고 마디가 길며 첫눈에 보아도 귀티가 흐른다. 유난히 붉은색을 띠는 소나무는 옛날부터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춘양 목은 자라면서 일반소나무보다 표면이 붉고 속도 진한 황갈색을 나타낸다. 속살이 불그스름해서 부인네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소나무는 황장(黃腸)이라고도 불렀다. 모양만 예쁜 것이 아니고 잘 썩지 않으며 목질이 매우 단단했다. 황장이 넓고 백변이 좁은 춘양 목은 나무중의 나무로서 왕실과 조선시대 권세 있는 양반가가 아니면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이곳에서는 함부로 산에 들어가서 소나무를 자르지 못하게 입구에는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푯말을 세웠다. 황장목의 벌채를 금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막았던 것이다. 소나무의 벌채를 누구나 함부로 하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서 철저하게 관리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금강소나무가 차츰 고갈되어가자 멀리 태백산맥의 오지까지 들어가서 벌채하고 한강을 이용해서 뗏목으로 엮어 대량으로 반출해 갔다. 다행이 한강 물을 이용한 운반이 불가능한 지역은 소나무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흉이 복으로 변한 경우로서 불편한 오지의 교통이 오히려 이들을 살려낸 것이다.

경북 내륙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봉화의 춘양 땅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귀족소나무가 자라고 아울러 지역을 자랑하는 대표주자가 되었다. 춘양 목은 해송과 육송의 교잡종으로 전봇대처럼 곧게 자란데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푸른 가지가 조선의 대쪽같은 선비기상을 닮았다.

그래서 꿋꿋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우리의 기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소나무를 이용한다. 금강 송 중에서도 봉화읍 춘양면 북쪽의 서벽리 일대에서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소나무를 제일의 춘양목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된 금강 송은 춘양 역을 집산지로 기차에 실려 전국 각지로 보내졌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 이름으로 고착되면서 춘양목이라는 새로운 명사가 태어났다. 춘양목이 이름을 떨칠 때에는 어디한 군데라도 굽은 곳 없이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간 소나무들이 춘양 땅 처처의 지천에 깔려있었다. 지금은 남벌로 귀해져서 춘양역의 북쪽 일부에만 살아남은 것이다.

최근에는 저탄소 녹색성장의 아이템으로 굴뚝이 없는 고부가가치산업인 웰빙(Well being)관광상품으로 춘양목이 떠오르고 있다. 세계유일의 금강 송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나무이다. 적송(赤松), 황장목, 춘양목이라 불리는 소나무는 우리나라 최대의 군락지가 이곳이다.

춘양을 대표하는 나무로는 소나무이며 예로부터 '백목(百木)의 왕(王)'이라고도 불렀다. 춘양 목은 색깔이 곱고 단단해서 궁궐의 대들보, 왕족들의 관, 사찰건축목재로 사용되었다. 지난번에 화재를 입었던 국보1호인 숭례문(남대문)의 복원공사도 이곳의 춘양목이 사용될 것이라고 한다.

춘양 목은 현대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필요한 피톤치드를 많이 발산해준다. 독특한 향기는 항암, 천식, 심장과 폐 기능 강화뿐만 아니라 잡귀와 액운을 물리치는 신령스런 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