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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48.왕조실록 보관한 사고지가 있던 곳 (2)주춧돌만 남아있는 사고

ngo2002 2011. 6. 7. 18:06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48.왕조실록 보관한 사고지가 있던 곳 (2)주춧돌만 남아있는 사고 터


2011년 06월 06일 00시 14분 입력


아직도 미복원 상태 쓸쓸한 흔적

조선 최고의 길지… 형상도 알아보기 힘들어

잃어버린 문화 역사 복원 등 사고회복 시급

태백산사고지를 찾아가는 일은 태백산 각화사(覺華寺)에서 출발해야한다. 쓰러져가는 절간을 다시 세우고 옛 절을 생각한다하여 각화사라고 불러온다. 각화사는 일반사찰과는 다른 별도의 중요한 임무가 따로 있었다. 각화사는 사고(史庫)를 지키는 수호사찰의 기능을 다해야 했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주위가 높은 산이고 적송이 울창한 숲 속에 있어서 수도하기에 좋은 사찰이다. 여기서 직선거리로 1㎞거리의 한적한 산속에는 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 터가 있다.

깊고 깊은 그곳 심산유곡에 세워진 사고는 국가의 보물 왕조실록을 소중하게 보관할 장소로 삼재가 들지 않을 곳이라서 선택된 길지로 사고지가 되었다. 강원도에서 시작한 태백산의 줄기가 영남까지 뻗어 내려오다 중간에 불쑥 솟아오른 각화산(해발 1176.7m)를 주산으로 정상부에 자리했다. 태백산사고지(사적 348호)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 126-5번지 천하의 대 명당에 자리했다.

그러면 실록이란 무엇이었기에 그렇게도 소중하게 다루며 인적이 끊긴 산중에 안치시켰을까?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역사기록을 위하여 춘추관이라는 관청을 설치했다. 사관은 날마다 왕의 치적과 그때그때 일어난 일들을 소상하게 기록했다가 왕이 승하한 다음, 후임 왕이 전왕의 역사를 편찬했던 것이다.

이는 나라를 지탱해준 거짓 없는 양심의 기록으로 최고 통치자 왕은 자신을 기록한 사초도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 왕조실록이라 하겠다. 왕의 일 거수 일 투족까지 상세하게 기록해둔 실록은 특별히 설치한 사고 안에 귀중하게 보관하여왔다.

고려시대역사인 고려실록은 조선 초기에 없어졌으나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학교도서관에 온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때부터 제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의 실록이 전체 1천893권 888책으로 되어있다.

실록을 보관할 안전한 땅은 나라 안 어디에 있을까? 많은 이들은 한반도의 척추구실을 해주는 태백산에서 찾으려고 했다. 거대한 산맥을 이루는 산중의 산인 태백산은 수성(水星)형국으로 암석이 드물며 흙이 많고 그 빛 또한 수려하고 기름져서 갖가지 동식물이 살아간다. 책 줄깨나 읽었다는 사대부가의 선비들은 태백산을 삼재불입의 복지이며 신이 내린 길지로 보았다.

각화사는 불법이 높은 승려들이 마음을 다스리는 곳이며 자고로 삼재(한재의 가뭄, 수재의 홍수, 병화의 전쟁)가 들지 않을 곳이라서 사고를 지어 보관해온 곳이라고 소개했다. 사고지가 있는 봉화의 춘양일대를 피난과 보신의 땅으로 여겨왔다.

물론 사고 터의 지형이나 형세는 풍수예언서에서 말한 것처럼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 춘양은 작은 면단위의 한촌에 불과하지만 배산임수와 장풍득수의 구성이 탄탄하다. 수구는 천천히 물이 빠지게 되어있고 마을이 험준한 산골짜기와 협곡 능선에 자리해서 교류가 불편하다. 이는 정치, 군사, 사회적으로 별다른 이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재난이 일어날 소지가 전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만하면 틀림이 없는 안락한 길지다.

귀중한 실록을 보관해온 창고였던 사고의 소실은 일어나지 말아야할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고가 불타고 없어졌지만 실록만은 화재로 인한 소실을 면했다. 그 안에 보관 중이던 실록과 문헌만은 대재앙을 가까스로 면한 것이다.

이미 다른 장소로 옮겼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당시의 실록이 지금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만약 춘양지역이 십승지로 결함이 있던 곳이었다면 현재까지 실록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을까?

결론은 아직 춘양 땅이 살아있어서 우리 곁을 지켜주고 있다는 점이다. 쓸 만한 승지가 맞는 말이다. 풍수가들은 춘양이 내륙산간지역으로 위도에 비해 온도가 살만하다고 한다. 위쪽의 태백산과 주변의 산에 비교했을 때 암석이 드물고 흙이 많아 흙빛이 수려하다. 정상부근은 펑퍼짐하여 전체적으로 부피감이 풍성해서 인심이 순하다.

들이 넓고 수려하며 흰모래와 단단한 토질이 한양의 토질과 같다고 보았다. 즉 이지역의 산들은 웅장하고 돌이 없으며 사질양토로 이루어졌다. 갖가지 수목과 초목, 동물들이 자라며 커가고 있으니 복 받은 길지吉地라 하겠다. 춘양을 대표하는 특산물 춘양목이 이를 증명해준다.

춘양의 불편한 교통은 현대적인 생활조건과 맞지 않지만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적인 요소들은 두루 갖추고 있다. 방대한 양의 왕조실록은 책권수와 기록된 양이 많기로 세계에서 제일이다. 그 내용도 당시의 정치, 경제, 산업, 문화, 교통, 통신, 후생 등 국가의 모든 활동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한 결과물이다. 이는 오백 년 전의 조선을 이해하는데 근본자료가 되어준다. 오늘날 실록은 유엔이 정한 유네스코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해서 특별히 관리보호하고 있다.

물론 중국에서도 명나라와 청나라 때 편찬한 실록이 남아있다. 그렇지만 책의 권수나 내용에 있어서 우리의 실록을 따라올 수도 없고 감히 비교할 수준도 되지 못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의 기록을 고스란히 그대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기록문화의 찬란한 금자탑이라 하겠다. 세계 사람들이 한결 같이 귀중하게 여기는 책 중의 책이다.

우리는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전하고 우리민족의 자주정신을 함양해야한다. 또 후손들로 하여금 훌륭한 일을 본받고 나빴던 일과 행동은 멀리해서 보다 나은 미래사회를 이룩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휑하게 터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도 뜻밖의 모습에 놀라움이 앞선다. 생각지도 못했던 생소한 모습이다. 명색이 조선최고의 길지라는 곳에 아끼고 아끼던 왕조실록을 보관해오던 곳이 아니던가! 푸른 잔디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주춧돌이 납작하게 줄지어 놓여있다.

태백산 사고지는 각화산의 정상부근에 터만 남아 있었다. 사고의 건물은 왕조실록 이관이후 관리인이 없는 방치상태로 있다가 해방 전후 어수선한 시기에 누군가의 방화로 인하여 완전히 소실되었다. 물론 일본의 침략이 문제이다. 그 후 산사태와 잡목이 무성하게 자라 흔적조차 찾아내기 어렵게 변하고 말았다. 늦었지만 1988년 8월에 발굴 정비하여 건물의 유구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및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타고 말았다. 오로지 전주사고만 살아남았다. 보관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에서는 이곳 봉화의 태백산에 사고를 짓고 새로 발간한 실록을 보관하기에 이른 것이다.

태백산사고는 명종이후에 편찬 간행된 역대 왕들의 실록을 계속 보관해 오다가 일본의 국권침탈이후 실록이나 서적 등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어 종친부 건물로 옮겨짐에 따라 그 기능이 정지되고 말았다. 일본은 소중한 실록을 일본에 있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갔다. 조선의 따가운 여론은 깡그리 무시한 체였다.

지금은 다시 현해탄을 건너와 서울대학교 내에 있는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에 지어졌던 건물은 저절로 없어지고 무성한 잡초에 뒤덮여 어디가 어딘지 알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무너져 내린 흙더미는 산사태를 불러왔고 사고 자리는 매몰된 채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졌다. 최근에 이르러 발굴한 흔적들이 눈시울을 붉혀준다. 침략자 일본의 억압이 깊은 산속까지 뻗어 남았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기록문화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실록을 보관했던 태백산사고가 아직도 미복원상태인 채 쓸쓸한 흔적이 보는 이의 두 눈을 서럽게 만들고 있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문화 역사를 복원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기위하여 시급한 사고의 복원을 기대한다.

~아 흔적만 남아 말없는 사고 터여! 사방을 에워싼 춘양목이 서있는 가운데에 노둣돌처럼 띄엄띄엄 박힌 주춧돌이여! 말해다오. 잊혀져가는 조선의 찬란한 역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