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46. 찰진 갯벌이 승지가 됐다 (5)우금산성
백제 망국의 한 설움 오롯이
높고 은밀한 곳에 위치한 천연요새
서동왕자가 왕이되어 지은 개암사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방
격암유록이나 정감록에서는 땅에서 십승지를 찾지 말고 하늘의 십승지를 찾으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즉 물질적인 욕망으로 허우적거리지 말고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한 다음 바르게 살아가면 현재의 그곳이 승지중의 승지라고 한말이다.
아무리 자연환경조건이 좋고 농·수산물이 풍부한 부안일지라도 오랫동안 복지로 남아있으려면 자연을 자연답게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둑을 막아 갯벌을 없애고 산을 깎아 넓은 길을 만들더라도 산은 처음대로 산이기를 바란다.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경제적 가치를 올렸다고 대수더냐?
있는 그대로 지역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평안하게 보존시키는 길이 십승지의 의미를 살리는 길이다. 길쭉하게 튀어나온 변산반도를 국립공원으로 정했고 내변산의 화려한 능가산 동쪽자락에 우금산성이 있다. 산성의 중앙에는 울금바위가 중심축처럼 돌기둥으로 자리했다.
오랜 옛날부터 산성은 아무 곳이나 골라내서 되는대로 축성하지 않았다. 외부 침입자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줄 수 있는 곳을 택해서 쌓았던 것이다. 가장 은밀하고 편안한 자리에 성이 들어앉았다. 그야말로 처가댁 안방의 따뜻한 아랫목 같은 곳이라야 성을 쌓았던 것이다.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있는 능가산의 능선 따라 펼쳐진 우금산성은 풍수지리를 공부한 선조들의 얼이 담겨진 곳이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산성이다. 쉽게 찾아내고 쳐들어온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에 시선을 피한 자리로 파고들어 산성이 자리했다.
우금산성은 높은 곳에 복병처럼 숨어있어서 은밀하고 쉽게 침공하기가 어렵다. 아울러 방어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급경사를 이루는 포곡식 석성으로 특별한 무기가 없더라도 돌만 있어도 침략자를 막아낼 수 있다. 방어에는 이상적인 산성이다. 십승지의 해박한 해석이 낳은 결과물로 만들어진 성이라서 가능하다.
백제부흥군이 주둔했다는 능가산의 우금산성은 주변의 작은 돌을 모아 쌓은 산성이다. 조선이나 한국이나 미국의 눈으로 보아도 길지는 길지로 보였나보다. 지금도 이곳이 안전하다고 여겼는지 꼭꼭 숨어든 미사일기지의 높은 안테나가 산성 뒤쪽에 솟아올라 눈길을 끈다.
개암사의 뒷산이 되어주는 울금바위는 부드러운 능선에서 거대한 돌로 된 말뚝처럼 스카이라인을 가르며 국립공원의 어디서고 드러나 보인다. 산봉우리위로 불끈 솟아 오른 울금바위는 산의 모든 기가 펄펄 날듯 솟아난다. 암봉을 점지한 절은 먼저 타오르는 바위의 기를 모아 들여야 한다. 그래서 바위를 열고 힘을 받기위하여 이름도 개암사(開岩寺)라고 했다.
우금산성은 큰 바위 두개 울금바위를 중심기둥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포곡성을 쌓았다. 물론 중간이 헐어서 무너진 자리도 있고 끊긴 자리도 있었다. 우금산성은 울금바위를 기점으로 전체길이가 3천917m나 되는 탄탄한 석성이다.
성을 쌓았던 시점은 변한시절에 쌓았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원형그대로 높이 3m정도 되는 성벽이 60m나 이어져있었다.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에 이곳은 변한의 왕궁 터였다고 한다. 기원전 282년(마한 효왕 28년)변한의 문왕이 성을 쌓고 왕궁과 전각을 지었으나 백제무왕 35년(634) 묘련왕사가 왕궁을 고쳐 개암사로 개창했다고 전해진다. 변산 어디서든 눈만 뜨면 보이는 울금바위에 반한 시인 박용하의 시를 감상해보자. 울금바위의 거룩한 자태가 손안에 잡힐 듯 선선하게 떠오를 것이다.
개암사 뒤뜰에 우람한 울금바위
돌 촉대 높은 터에 대웅전 올려놓고
백제의 빼앗긴 꿈을 달래며 지새우는가.
변한의 왕궁 터요 백제부흥 다진 도량
천년의 숱한 사연 삭이다 여위었나.
기왓장 홈이진 골에 변산 벌 노을이 탄다.
울금바위를 포인트로 맞춘 개암사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로 유명한 서동이 왕이 되고 그 후 지은 절이다. 울금바위에는 세 개의 동굴이 있다. 하나는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방이다. 그리고 조선을 건국하기에 몰두한 이성계가 수도했다는 성계굴이 있다. 나머지는 백제가 멸망해서 부흥운동을 벌일 때 몸을 피한 아녀자들이 배를 짰다는 배틀 굴이 있다.
울금바위에는 고래로부터 십승지로 불러왔다. 울금바위의 높이는 40m와 30m가 되는 바위로 산을 압도하는 바위 두개가 어깨를 마주하고 서있다. 울금바위의 최정상꼭대기에 오르는 길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다행이 동행했던 개암사 스님이 바위의 뒤쪽으로 오르는 길을 알고 있어서 뒤따라 오를 수 있었다.
울금바위의 정상에 서니 넓게 터진 호남평야의 반듯한 논들의 구획이 반듯하다.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그은 듯 일직선으로 똑바르게 뻗어간다. 일망무제 터진 시야가 하늘과 맞닿았다. 멀리 보이는 서해는 바다인지 하늘인지 구별이 안 되지만 희끗 희끗 울렁이는 파도가 가끔씩 들썩거려 바다임을 증명해 준다. 호쾌한 풍광에 반한 나는 악을 쓰며 큰소리를 질렀다.
"바다야! 내소리가 들리면 대답하기라."
"……."
"여기는 십승지다!"
"……."
한스런 백제 패망기가 남겨진 산성의 축대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공연히 울컥거리는 서러움이 가슴을 친다. 백제 의자왕 20년(660) 백제가 나, 당연합군에 항복하자 흑지상지와 복신장군이 일본에 가있던 왕자 풍豊을 왕으로 옹립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부흥운동의 최후는 비참했다. 패한 적이 없다던 흑지상지는 내분으로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고 홀로 남은 복신장군이 고군분투했지만 김유신과 소정방이 힘을 합한 연합군의 기세에 눌려 작렬하게 죽고 말았다. 이것으로 백제라는 나라이름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아, 한 많은 백제여!
우금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길고긴 고갯길을 걸어가야 한다. 병목 같은 초입에는 중방성이라는 숨겨둔 방어진지가 있어서 침공하기가 어렵다. 천연요새인 것이다. 왕이 있던 사비성과의 거리가 2~3일 걷는 거리에 있어서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이라 하겠다.
바다가 보이는 십승지!
그곳은 정녕 우리들의 보금자리였다. 아직은 쓸모를 못 찾아 남겨둔 갯벌이 미래에 먹고살 소중한 식량이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우금산성에서 내려다본 푸른 서해바다는 우리의 희망이며 꿈이다.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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