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명리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41.인자가 숨어든 넉넉한 천국- 덕유산 (6)적상산 정상에 세워진 무주양수발전소

ngo2002 2011. 6. 7. 18:01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41.인자가 숨어든 넉넉한 천국- 덕유산 (6)적상산 정상에 세워진 무주양수발전소


2011년 02월 21일 09시 44분 입력


적상산은 산의 바깥쪽이 직각을 이루는 절벽이며 안쪽은 움푹 페인 분지 형을 이루는 특이한 지형이다.
물과 인간과 사람이 공존하는 최고의 '십승지'

하늘을 담은 청정호수 ,적상호의 자태

정상산 정상 이색적 풍광과 '산자수명'

국대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 시설 갖춰

적상산(해발 1천29.2m)은 덕유산의 인자한 덕에 가려 별로 알려진 산이 아니고 은둔의 산이었다. 그런데도 정상까지 반듯하게 아스팔트 깔린 도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도로는 여느 산에 오르는 길과는 느낌부터 다르다. 대부분의 산에 나있는 도로는 비좁은 임도를 확장해서 만든 구차한 길로 도로 폭이 좁고 위험하다. 그러나 적상산에 오르는 길은 도로가 넓고 쾌적하다. 물론 정상까지는 구절양장 굽이 길의 연속이지만 단정하게 정비됐다.

산 정상에는 뜻하지 않게 하늘을 담은 호수가 맞이해 준다. 웬걸, 무슨 호수일까? 산꼭대기의 분지도 생뚱맞은 느낌이지만 푸른 물이 넘실대는 호수라니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드넓은 호수는 또 다른 산을 그림자로 물속에 품고 있었다. 너무 맑은 호수는 쳐다보는 이들의 얼굴을 모두 호수 속에 담아낸다. 수면을 찰랑대며 넘치는 물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찾아온 이들이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안내판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산의 정상에 호수가 만들어진 것은 지난 1995년이었다. 적상호의 물은 상수도, 지하수도, 생활하수도 아닌 무주양수발전소의 상부 댐인 것이다.

양수발전소는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의 발전소로 시설용량이 엄청나다. 적상산 분지의 산꼭대기와 산 아래 포내리(해발 250m)에 각각의 댐을 만들어놓고 전력소비가 적은 밤중에는 물을 산 위쪽의 상부 댐(해발 850m)으로 끌어올린다. 전력소비가 많은 시간에는 산 아래 하부저수지로 이어진 수도관을 통해 물을 흘려보내면서 전기를 생산하는 수력발전소이다. 600m의 낙차 폭을 이용한 무공해 수력발전시스템이라 하겠다.

산꼭대기의 적상호는 수력발전을 위하여 산 아래에서 퍼 올린 발전용의 물로 채워둔 것이다. 정상까지의 깔끔한 길도 양수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쓰였던 공사용의 트럭 길을 관광길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800m 아래의 하부 댐의 수면이 햇빛을 받아 은빛처럼 반짝인다. 보석처럼 하얀 물방울이 어두운 밤의 별처럼 찰랑거린다. 커다란 수반위의 물처럼 예쁘게만 보인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은 더더욱 침침한데 깊고 깊은 산중에 맑은 유리구슬 같은 청정호수의 물이 푸르디푸른 하늘같다. 산속의 소나무가 호수 안으로 들어앉아 뭉게구름을 머리에 이었다. 산속호수의 독특한 멋이 이색적인 풍광을 뽐낸다. 적상산은 산의 바깥쪽이 직각을 이루는 절벽이며 안쪽은 움푹 페인 분지 형을 이루는 특이한 지형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물길을 막고 양수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정상의 분지 안에 인공호수를 더 크게 만들었다. 산의 최정상 꼭지 점에 거대한 물 접시를 이고 있는 기묘한 형상이 생기면서 적상산은 전혀 다른 명물로 부상했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안전한 보신의 땅이 물바다로 변한 것이다. 이제 이곳은 물이 들어찼으니 훨씬 안전한 곳으로 변했으며 가득 찬 물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다. 물과 인간이 산에 어울렸으므로 십승지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미래를 내다본 조상들의 현명한 지혜가 칼날처럼 번득이는 형국이다.

저수지를 끼고 는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적상산 전망대에 도착한다. 무주읍 남쪽을 가로막고선 적상산은 가을철 기암의 석벽에 붉게 물든 단풍이 너무 곱고 여인네의 화사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훤히 드러난 이효리의 허벅지보다 훨씬 더 예쁘다. 사방으로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은, 신의 조각품으로 이곳을 왕조실록을 보관해줄 장소로 점지했다.

한눈에 적상산 일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는 양수발전기의 압력을 조절하는 원통형 조압수조위에 만들어졌다. 멀리보이는 무주읍내의 높은 아파트의 옥탑이 또렷하다. 덕유산 최정상 향적봉과 지리산의 천왕봉이 푸르스름한 자태로 아스라이 보인다. 땀 흘리는 발품을 사지도 않고 정상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니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사방의 풍광이 거칠 곳이 없다. 펑 뚫린 가슴이 개운하고 상쾌하다.

산의 정상을 길쭉한 고구마처럼 쌓아 올린 산성은 그 길이가 8천143m나 되고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을 설치했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 지나가던 곳이 덕유산일대였고 전선의 요충지에 쌓았던 성이 적상산성이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피신처로 성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실제로 이곳은 너무 높아 외적이 쳐들어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천연의 요새라 하겠다.

국중제일정토도량(國中第一淨土道場)으로 사고를 지켜줄 호국사찰이었던 안국사를 내려오면 사고(史庫)로 가는 길이 나온다. 산성 안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맨 처음의 사고 터는 물에 잠기고 말았다. 최근 들어 저수지 조금 위쪽으로 터를 잡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를 다시 지은 것이다. 물론 옆에는 선원각의 건물도 처음의 모습대로 복원했다.

낮은 담장 안은 시원하게 시멘트포장을 했다. 두체의 건물은 각각 사고와 선원각으로 2층 누각이 쌍둥이처럼 서로 어울렸다. 적상산사고는 광해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적상산성 안에 처음으로 실록각(광해군 6년, 1614)을 짓고 선조실록을 봉안했다. 인조 12년(1634)에는 북쪽에 위치한 묘향산사고가 위험에 처해지자 그곳의 실록을 이곳으로 옮겨와 보관했다.

여기서는 승장청,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 등이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 그리고 의궤 등을 보관했다. 적상산사고는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이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이 규장각으로 이전된 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상산 사고를 처음 지을 때는 지금의 호수 속에 자리한 곳이었지만 댐을 만들면서 물을 채우게 되자 조금 위쪽으로 옮겨 해발 860m지점에 선원각을 옮겨짓고(1992년) 실록각도 복원(1997년)했다. 파란만장한 사고의 과거사라 하겠다.

물 속에 잠겼다 다시 태어난 조선왕조실록의 안식처인 사고여! 그 자리에 그대로 영원하여라. 그곳은 전 국민이 지켜보는 위대한 십승지라오. 꿈을 안고 지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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