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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43. 찰진 갯벌이 승지가 됐다 (2)변산반도

ngo2002 2011. 6. 7. 18:02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43. 찰진 갯벌이 승지가 됐다 (2)변산반도


2011년 03월 21일 00시 00분 입력


새만금의 갯벌은 물막이를 끝내고 육지로 만들어버렸지만 그 외에도 부안에는 긴 해안선 따라 갯벌이 무진장으로 펼쳐져 있다.
산·바다·인물 '삼박자' 갖춘 천혜의 땅

긴 해안선·찰진 갯벌·풍푸한 어장 경제 활력소

그런 의미에서 우금산성은 천혜의 승지다. 길쭉하게 쌓아 올린 산성이 선택된 장소였음을 말해준다. 오늘날에는 미사일 방어기지의 높다란 철탑이 산의 최정상에 들어섰으니 참으로 현명한 예언적 길지 찾아내기에 '딱' 들어맞은 결과라 하겠다.

또 한곳은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이라는 불후의 역작을 쓰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곳이 보안면의 우동리 반계 골이다. 능가산의 옥녀봉을 중심으로 물줄기가 흘러내리면서 반계골짜기를 이루는 심산유곡의 산속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풍수지리학을 필수교양과목으로 공부해야했다.

필자의 경험으로 말한다면 꼭 찍어 두 곳만을 십승지라고 하기보다는 변산반도 국립공원전체를 승지의 땅으로 보고 아울러 두루 살펴보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대부분의 승지가 백두대간을 뒤로하고 남쪽을 향한 땅에 자리했다. 유별나게 색다른 한곳이 포함되었는데 반도의 땅 중에서 변산반도가 유일하게 해변을 끼고 바다와 함께 승지에 오른 셈이다.

그중에서도 길고 긴 해안선과 찰진 갯벌이 부안을 승지의 땅으로 만들어주었다. 하늘에 불덩이가 날아다니다 떨어져 인간을 불태우더라도 승지에 있다면 살아남을 길이 있을 것이니 변산반도를 자세하게 돌아보자. 먼저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다리춤에 묻을 갯벌을 조심하며 걸어보아야 한다. 변산은 갯벌이 있어서 승지가 된 땅이 아니던가!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바닷가의 모래 또는 점토질 흙의 잿빛 갯벌이 넓고 평평하게 생긴 땅이 미래를 담보해줄 갯벌이다. 수많은 생명이 꿈틀대고 철새들의 중간쉼터가 부안의 개땅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물론 새만금의 갯벌은 물막이를 끝내고 육지로 만들어버렸지만 그 외에도 부안에는 긴 해안선 따라 갯벌이 무진장으로 펼쳐져있다. 서해안의 갯벌은 옛날부터 우리들에게 생선, 바지락, 백합과 같은 각종 조개를 잡아 올려 쌈지 돈이 되어주었고 농토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에는 더 좋은 참살이(Well being)의 열풍이 불면서 바다와 함께 갯벌의 가치가 한층 더 높아졌다.

갯벌은 우거진 숲과 더불어 지구의 허파와 같은 기능을 해왔다. 각종 생활하수나 공업용수의 오염물질에 대한 정화기능을 해주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서해바다를 살아 숨 쉬는 바다로 지켜오고 있다. 부안에는 특별히 높은 산이 있어서 쓸 만한 양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십승지에 끼는 것은 발전의 여지가 무한대인 갯벌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보여 진다.

호남 땅 부안의 변산에서는 '생거 부안 사거 순창'(生居 扶安 死居 淳昌)이라는 말이 있다. 살만한 곳으로 변산은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땅이라는 의미이다. '춘 변산 추 내장'(春邊山 秋內藏)이라는 말은 봄날의 화려한 산수와 바닷가의 풍성한 먹거리가 변산에는 가득하고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은 내장산이 제일이라 하겠다. 봄꽃의 예쁜 모습은 변산이 으뜸이고, 가을단풍은 내장산을 곱게 보았다.

아름다운 서해안의 항구도시 부안은 질펀한 갯벌이 있어서 바다가 풍성하다. 거기다 엄청난 땅이 새로 생긴 곳이다. 들판이 넓고 길게 이어진 해안선과 섬 둘레를 포함한 총길이가 무려 800㎞를 넘어 갯벌의 잠재된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 미래의 최첨단 생명과학의 발견은 개땅에서 출발할 것이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농작물이 풍성하고 또 변산의 산은 높고 주름진 골이 깊어 산짐승과 산나물이 넉넉하다. 더불어 변산의 소나무는 궁궐건축자재로 쓰였으며 임산물도 부족함이 없었다. 왈츠는 삼박자로 저어야 춤에 어울리며 맞아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변산에서는 산과 바다와 인물이 어울려 삼박자를 갖췄다. ‘큐!’ 소리만 떨어지면 풍악이 절로 울린다.

곰소의 맛깔 나는 소금과 없는 것 빼고 모두 다 있는 각종 젓갈이 가득하다. 오직 태양과 바람으로 만들어진 천일염은 이 고장 젓갈을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어주었다. 격포에서 펼쳐지는 커다란 바다는 위도에 대물을 노리는 낚시꾼들의 짜릿한 손맛이 전해오는 황금낚시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칠성앞바다와 고군산군도로 연결해서 풍부한 어장과 끝이 보이지 않은 서해바다를 드넓게 펼쳐 보인다. 건져 올린 어산물은 부안 땅의 윤활유로 지역 경제의 활력소다. 십승지중에 오직 하나뿐인 바다를 접한 반도가 십승지에 든 이유를 알고도 남게 한다.

변산교를 넘자 바닷가의 전망이 터진 넓은 곳에 이곳 부안 출신의 신석정(1907~1974)시인의 시비(詩碑)가 서 있었다. 변산반도를 더욱 더 지적인 아름다움이 흐르게 한 인물이기도하다. 토속적인 서정미가 넘치는 시인의 시중에서 대표작인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한편이 쓰여 있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 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미래의 전진을 위하여 현실의 절망을 잊고자 어머니께 부치는 편지다.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철모르던 유년시절로 퇴행하여 평화로운 삶을 갈구하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 담겨있다. 현실적인 삶이 궁핍하고 나라 잃은 설움에 뜨거운 분노가 타오르고 식기를 몇 번이고 반복 하고나면 나약한 자신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새만금 전시관을 돌아 달려가자 해변에서 밀려드는 비릿한 갯냄새가 차 속으로 들어 왔다. 30번 국도는 서해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어서 눈이 터질듯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변산반도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모래사장의 변산 해수욕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꽉 막힌 가슴을 터주기에 충분했다.

반짝거리는 은빛 모래밭이 푸른 바다를 울렁거릴 뿐 찾는 이가 별로 없었다. 군산대학의 실습장과 원광대학 임해 수련장을 지나자 타원형의 반달 같은 고사포 해수욕장이 나타났다. 사격장도 아닌데 이름이 특이하다. 움푹 들어간 만에 쌓인 모래가 천혜의 해수욕장이다.

먼 바다의 거친 파도는 해변까지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다. 흰모래와 파란 바닷물이 만나 출렁대는 물거품 띠가 영락없이 고사포 포물선처럼 굽어 있다. 그래서 고사포 해수욕장이라고 부른다.

내변산 쪽의 의상봉에는 3개의 둥근 지붕의 돔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공군기지 8351부대가 서해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목포↔군산간의 서해안 고속도로가 이미 개통되었다. 어느새 나는 상록 해수욕장을 지나 외변산의 ‘중심점’인 격포항의 혼잡한 부두 여객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단 하나밖에 없는 반도공원이다. 외변산으로 변산, 격포, 고사포 등의 해수욕장과 기기묘묘한 바닷가의 단애로 형성된 채석강 일대가 볼만하다. 국립공원은 채석강의 해변과 내변산의 능가산 일대를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방파제의 끝에는 등대가 있어서 풋풋한 포구의 냄새를 풍겼으며 유람선 선착장을 지난 곳에 채석강 입구의 후문이 있었다.

먼저 닭이봉(86m)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등산로는 나사못 돌듯 달팽이 몸처럼 둥글게 돌면서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입구부터 비포장 길로 다니는 차들이 만들어 내는 흙먼지가 뿌옇게 휘날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길 입구 石장승의 서있는 모습이 쌍을 이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호탕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격포항을 지키며 1천500년 전부터 자리를 지켜주던 장승인데 최근에 이르러 돌장승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목장승은 만들기는 쉽지만 수명이 짧다. 그래서 요즈음은 석 장승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라고 한다.

격포항 앞 바다의 위도와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앉아 있는 모습이 한가롭게 보였다. 작은 유람선이 하얀 포물선을 그으며 달릴 때는 배가 파도에 가린 체 무섭도록 빠르게 달리곤 한다. 바닷가로 다시 내려온 나는 적벽을 보기 위해 닭이봉이 있는 해안선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마침 오늘은 썰물 때여서 거대한 암반들이 드러나 그 위로 걷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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