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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30.속세를 떠났으니 진정한 유토피아다(5)- 천하대명당 우복동

ngo2002 2011. 6. 7. 17:53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30.속세를 떠났으니 진정한 유토피아다(5)- 천하대명당 우복동


2010년 07월 19일 00시 00분 입력


속리산 남쪽으로 경북 상주시의 우복동은 소의 품안처럼 아늑하고 편해보여서 십승지의 땅으로 모두가 침 흘리며 탐내는 땅이다.
우복동은 실존하는 천하의 대명당

속리산 동쪽과 남쪽은 꿈이 머문 땅

영남 일대 전설처럼 내려오는 승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이 福地

우복동(牛腹洞)은 속리산의 동쪽과 남쪽 두 곳에 있는 꿈이 머문 땅이다. 현실적이며 실존하는 천하의 대명당이 우복동이다. 농촌에서 재산목록 제1호였던 소의 자궁과 같은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겠다. 소는 우리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으며 우선 다급한 시골대학생들의 등록금이 되어 주기도한 동물이다.

아무 말 없이 논밭을 갈아주고 무거운 짐을 날라주는 고마운 동물이다. 그리고 영리하다. 덩치는 크지만 순하고 더구나 암소의 자궁은 크고 튼튼해서 그 속이 넓고 편하며 새로 태어난 새끼는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

속리산 남쪽으로 경북 상주시의 우복동은 소의 품안처럼 아늑하고 편해보여서 십승지의 땅으로 모두가 침 흘리며 탐내는 땅이다. 우리나라는 한 마리의 토끼나 호랑이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머리 쪽에 명당이 있을 때는 용머리라 하고 배 쪽에 명당이 있을 때는 우복이라고 한다. 배의 자궁은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곳으로 가장 신성하고 소중한 곳이다. 천하의 대 명당을 말할 때는 배에 비유했던 것이다.

속리산은 경북과 충북 두개의 도에 걸쳐있는 국립공원의 산이며 아울러 우복동도 두 곳에 있다. 속리산의 문장대 남쪽으로 경북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에 우복동이 있고, 또 하나는 속리산의 천황봉 남쪽 기슭인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삼가리에 두고 있다.

위의 두 곳에는 각각의 우복동이 있는데 그곳이 우복동이라고 믿고 들어와 살던 사람들이 많이 남아 지금도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속리산을 거대한 소로 보았을 때 배에 해당되는 곳은 한곳이라야 옳다.

일반적인 명당이나 복지 또는 길지라면 여러 곳이 있을 수도 있지만 소의 배에 해당된다는 우복동은 하나의 속리산[소]에서 당연히 한곳에만 있어야 옳다. 우복동은 천하의 대 명당을 우복동이라고 할진데 두 군데일 수가 없는 것이다. ‘유산결’이라는 명당 답사기록에 의하면 지척간의 두 곳을 모두 우복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용하다는 풍수지리사는 속리산 천황봉 남쪽 우복동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소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배다. 그곳에서 살면 당대에 재상이 되고 문명을 천하에 떨칠 것이다. 늙기 전에 이미 신선이 되고 자손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덟 명의 판서가 탄생할 것이다. 속리산을 끼고 있는 우복동이 그런 곳이다.”

속리산 문장대 남쪽의 우복동을 본 다음 풍수를 볼 줄 아는 스님 중에서 제일간다는 일이승(一耳僧)은 ‘우복동 진결’(牛腹洞 眞訣)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곳은 천하에 둘도 없는 대지다. 중국의 요동 땅이 제일가는 명당이라지만 이곳만은 못하다. 여기서 살면 당대의 벼슬이 재상에 이를 것이다. 천하대 명당이 바로 이곳이다.”

최고의 극찬이라 하겠다. 물론 택리지에서도 천황봉, 청화산, 도장산을 잇는 삼각지대 안에는 하늘이 내린 곳으로 진실로 복된 땅이라고 격찬했다. 정감록에서도 우복동을 지적해서 말하고 있다.

(소의 배에 해당하는 우복동은 속리산자락에 있는 명당중의 명당이다)

소의 배에 잘못 들어간 음식물은 소화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해가된다. 우리들의 배에는 미음이나 죽이 소화가 잘되고 몸에 보약이 된다. 공연히 소의 배를 찾다가 소의 등가죽에 미끄러져 낙상을 당한다.

불교에서는 성스러운 짐승을 소로 보며 소가 있는 즉 절대길지는 전국의 어느 곳에도 있다고 말한다. 먼저 가장 가까운 내 몸속의 깊숙한 곳에서 성스러움을 찾아내자. 그곳이 바로 승지중의 승지일 것이다.

감결의 이본인 ‘비결’에서는 이곳은 필연적으로 세보지지(世保之地)라며 자손 대대로 살만한 곳으로 예언에 들어맞는 대명당이라고 했다. 십승지는 전란, 굶주림, 천재지변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축복받은 땅이다. 험난했던 조선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민초들은 천수를 누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흉년이 들면 먹을 식량이 없었고 비가 많은 장마에는 홍수를 피할 길이 없었다.

십승지라는 이상향을 쫒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중기 때부터이다. 대부분의 비결이 조선중기이후 유명한 지사나 역학자의 이름을 빌려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오던 십승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는 격암 남사고(南師古)였다. 그는 역학과 풍수, 천문에 능통했다. 그의 예리한 판단력은 학문을 익혔고 조정의 동서분당과 임진왜란을 예언했다.

흔히 말하는 십승지는 열 군데의 명소만을 뜻하지 않는다. 남사고가 쓴 ‘십승보길지지’에서는 무려 28곳의 승지가 등장한다. 정감록에서도 때 묻지 않은 승지를 20여 곳을 지목하고 있다. 역사적인 격동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십승지지를 찾아 예언의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곳은 무려 60여 곳이나 되었다. 십승지는 무릉도원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설적인 이상향의 의식과 맞물려 한국인들의 가슴 속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 정약용은 전반적으로 도참설에 몰입된 폐해 론을 들먹이며 걱정했다. 우복동은 예로부터 영남일대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승지였다고 전해왔다. 동네가 소의 배안처럼 아늑하게 생겨서 사람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후기로 접어들며 신분제도가 흔들리자 일반 민초들은 물론 몰락해버린 양반의 후예들도 우복동을 찾아 떠나갔다. 스스로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영달만을 꾀한 것이다. 그저 새처럼 높이 날고 짐승처럼 멀리 달아나려고 우복동을 찾아간다. 무위도식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한번 승지를 찾아갔다면 이는 필시 노루나 토끼처럼 게으른 자가 되고 말 것이다.

다산은 세상을 이롭게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목숨만을 부지하기위한 그들을 멍청한 선비라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그러면서 세상을 도피하려는 사회현상에 대하여 개탄했다.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그곳이 진정한 꿈의 이상향이라고 했다. 공연한 헛고생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타파하고 개혁하려는데 다함께(Togetherness)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쓴 시속에는 다산의 실학정신이 여실히 드러난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서 옛날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었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백, 천 겹으로 둘러싸서

출입문은 대롱만큼 작디작은 구멍이 하난데 조금 깊이 들어가면

해와 달이 빛나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짓기 알맞아서

멍청한 선비 그를 두고 마음이 솔깃하여 지레 가서

두어 마지기 밭이라도 차지하려고 죽장망혜 차림으로

그곳을 찾아 훌쩍 가니 백 바퀴나 산을 돌다

지치고 쓰러졌다네. 적이 쳐들어와도 나라위해 죽어야지

너희들 처자 데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아내가 방아 찧어

나라세금 바쳐야지 아~아 세상 어디에 우복동이 있단 말이더냐!



정약용의 생각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헐벗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현실개혁에 다함께 나가자는 말은 전혀 먹혀들지 못했다. 이미 수많은 백성들은 십승지를 찾아 떠나갔고 그곳에서 질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모래밭에 짓는 누각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탐욕에 가득 찬 인간의 행위는 자신부터 무너뜨린다.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인다. 역심을 버리고 자연적,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며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

여러 종류의 예언서들이 십승지를 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에는 어느 곳을 택해서 가릴 것 없이 복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억울하고 화가 치민 난세에는 십승지를 찾지 말고 하늘의 도를 따르라는 ‘격암유록’의 가르침이 크게 다가온다. 못 믿을 정감록이다. 십승지는 그냥 옛 책에 기록된 그대로의 승지일 뿐이다.

누가 정감록을 믿으라했나? 아~아 지나온 세월이여!

그것은 스쳐가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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