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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31.곡식의 종자와 인종을 구할 보신의 땅

ngo2002 2011. 6. 7. 17:53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31.곡식의 종자와 인종을 구할 보신의 땅


2010년 08월 02일 00시 00분 입력


춘하추동 사계 뚜렷한 승지 중의 승지

금선성 계곡의 지형은 장풍득수의 요건

소백산 백두대간 기와 힘이 뭉쳐진 명산

토산(土山)은 살기가 없어서 인재의 텃밭

소백산은 봄철이면 광활한 능선에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오뉴월에는 자지러질 듯 피어난 철쭉군락과 여름에는 짙은 녹색의 풀밭으로, 가을에는 활달한 단풍으로, 그리고 겨울에는 눈꽃으로, 이국적이며 환상적인 모습을 자랑하는 국립공원(National park)이다.

춘, 하, 추, 동의 사계가 극명하게 뚜렷한 소백산은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감탄을 연발하곤 한다.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오늘은 십승지의 첫 번째에 드는 소백산의 남쪽에 자리한 금계동 일원을 찾아 철쭉 핀 소백산을 오르기로 한날이다.

승지중의 승지라는 소백산일대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와 욱금리, 삼가리까지를 포함한 넓은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이 지역들이 소백산 줄기를 이루는 비로봉과 제일연화봉, 제이연화봉 및 원적봉 등에 의해 둘러싸인 협곡에 연이어 자리하고 있다. 소백산 줄기에서 시작한 여러 개의 물줄기는 금선성계곡으로 흘러들고 풍기읍을 휘돌아 유장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동양대학과 함께 금계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백산 최정상의 줄기는 동, 북, 서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져있으며 작은 하천들이 흘러내리다 금선성 계곡에서 합류하여 앞이 확 트인 동남방 쪽으로 흘러간다.

소백산의 수많은 봉 중에서 가장 높은 비로봉을 포인트로 시작한 금선성 계곡의 지형모습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장풍득수의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십승지의 까다로운 요건에 잘 맞추고 있어서 길지중의 복지로서 첫째로 꼽는다.

풍기읍을 지나자 보이는 넓은 들판 모두가 인삼 밭 뿐으로 검은색의 그물을 덮어씌워 그늘 속에서 키워낸 인삼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명약이며 매년 가을에는 풍기인삼축제를 열어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 거리가 다채롭다고 한다.

특히 인삼 캐기는 인삼밭에서 직접 인삼을 수확할 수 있는 기쁨과 저렴한 가격으로 인삼을 구입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논에까지 인삼이나 사과나무를 심어 풍성한 인삼과 사과가 풍기의 자랑임을 증명하고 있다.

농촌지역의 작은 읍에 불과한데도 대학이 있는 곳이 풍기다. 나라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쓸 만한 인재는 소백산 아래에 가면 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곳에 대학이 들어선 것이다. 금선성 계곡 따라 물이 흐르고 풍기초교와 풍기고등학교가 자리했다.

비로봉 물길 따라 금계동의 가운데에 금계중학교가 있고 동양대학이 들어섰다. 금계동의 정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곳이 동양대학이다. 동양대학의 높게 솟은 건물을 옆으로 돌아 풍기 읍내를 지나 영전 고개 길로 넘어서자 이곳에서부터 소백산이 시작되는 곳이다. 오른편의 금계호 저수지는 어찌나 넓은지 끝이 보이지 않았으며 맑은 물에 비친 산봉우리가 물속에까지 똑같은 산 그림자로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푸른 물을 가득 담고 있는 금계호가 우리들을 반겨준다. 조금씩 움직이는 물결 따라 거대한 산 그림자도 따라서 하늘거린다.

금선성 계곡의 구불구불한 비포장 길을 따라 올라가는 차까지도 기우뚱거렸다. 샘 밭골을 지나자 매표소 앞의 주차장에서 내린 나는 버스의 옆자리에 함께 앉았던 산악회 강 사장과 이 총무가 어울려 선두에 나섰다.

금계라는 이름은 많은 곳에 붙어있었다. 금계(金鷄)란 금으로 된 닭이라는 뜻으로 소중한 지명에 붙여 부르는 이름이다. 동네이름이며 학교이름, 호수의 이름까지 이곳에서는 꿈을 품고 미래를 향하는 이상향의 이름으로 쓰이는 것이 금계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소백산아래 금계동을 제일의 길지로 보았다. 과연 금계라는 이름은 맨 처음 어디에서 나와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금계라는 이름은 금계호의 위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 이름에서부터 나온 이름이다. 흔히들 소백산이라고 하면 소소한 흙산으로 바위가 없는 산으로 여기지만 비로봉 이래 금계동의 초입에 우뚝서있는 금계라는 바위는 아무리 보아도 닭으로 보이기는 커녕 그냥 거대한 암석덩이에 불과하다. 이쪽저쪽에서 방향을 바꿔가며 쳐다보아도 닭의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황금빛의 닭이란 아무리 찾아보아도 닭은 커녕 누런 닭털도 보이지 않았다. 깊은 상념에 빠진 스님의 묵상하는 모습처럼 보이는 바위를 닭으로 보았던 조상들의 이론은 어디에서 근거한 것일까?

풍수지리의 교과서에서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국을 제일의 길지로 여겨온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장소로 새끼가 나오고 창창한 앞날이 보장된 곳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바위의 모습이 닭으로 보여서가 아니라 이곳 일대를 변함없이 지켜줄 제일의 복지로 보아 금계라는 이름을 바위에 붙여준 것이다. 현명한 생활 속의 지혜라 하겠다.

그러나 금계바위는 일제 강점기에는 수난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침략자 일본은 이곳에서 훌륭한 인물이 날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지역민의 사랑을 받아오던 금계바위로 올라가 두 동강이를 내버렸다.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비록 닭의 형상은 사라졌지만 강한 이미지로 남겨진 금계는 영원할 것이라 믿는다.

읍내에서 비로사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의 금계바위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오래된 무덤은 돌보는 이가 없는 듯 잡초에 쌓인 무덤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성일 때였다. 작은 비석이 보였다. 무성한 잡초를 옆으로 젖히자 비문을 읽을 수 있었다.

"본적 평안남도 정주군 마산면 청정리 ○○○"

일행은 서로 눈길만 주고받으며 비석을 돌아섰다. 그러니까 멀리 이북에서 이곳이 십승지의 복된 땅이라고 찾아온 자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살아오던 고향산천을 버리고 물어물어 찾았지만 생이 다한 마지막 순간에 금계동에 이르러 원하던 비결지는 못 찾았지만 그 대신 죽어서라도 금계바위 부근에 묻힌 것이다.

십승지가 전해준 엉뚱한 폐해라 하겠다. 비로봉 쪽으로 방향을 잡아 등정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훼치는 닭소리가 들리면서 암탉의 울음이 크게 들려왔다.

"꼬끼오 꼬~오~옥…."

가슴 속에 담겨있는 것은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나는가 보다. 닭 바위 아래를 지나가니 닭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스런 오늘이라 하겠다.

소백산은 정감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예언서와 풍수지리서에서 백두대간의 기와 힘이 뭉쳐진 명산이다. 9년간 흉년이 들더라도 먹고살 식량의 종자를 구해주고 12년 동안 도적이 휩쓸어 사람의 씨가 말랐더라도 쓸 만한 인재를 뽑아 쓸 수 있는 피난과 보신의 땅으로 여겼다. 소백산이 품고 있는 유장한 토산(土山)은 웅장하고 살기가 없어서 인재의 텃밭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