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27. 속세를 떠났으니 진정한 유토피아다(2) 속리산 문장대 남쪽은 십승지의 땅
2010년 06월 21일 00시 00분 입력
|
높은 곳은 하늘이며 그곳에 구름
주변의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보은의 법주계곡을 지나 대청호를 거쳐 가는 강물은 금강이며, 특히 공주에서 부여사이를 흐르는 잔잔한 금강 물은 백마강이라 불리며 우리들의 사랑을 흠뻑 받아온 세 강의 시원 점이 이곳 속리산이라 하겠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낙엽이 쌓인 흙 길이라서 발바닥 촉감이 부드럽고 편했다. 공원관리 화북분소에서 속리산 국립공원 안내지도를 펼쳐 볼 필요도 없이 오직 산길이 하나뿐이어서 그저 길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속리산 등행을 시작하는 상주시 화북면 화북분소가 있는 장암리 일대의 이곳은 속리산 문장대의 남쪽으로 십승지의 땅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 사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모두가 각각 자기가 사는 곳을 소의 뱃속처럼 아늑한 길지라고 여기며 우복동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승지의 비결에 따라 이주해온 자들로 자신이 사는 그곳이 진정한 우복동이라고 신봉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누가 뭐라 하든 승지라는 발복지에 산다는 자부심이 그들을 여태까지 그곳에서 버티게 해준 것이다.
화북에서 농암 방향으로 32번 국도를 타고 승무산과 도장산 사이로 1㎞쯤 더 들어가면 ‘우복동 애향공원’이 나온다. 이곳에는 폭 4m나 되는 비스듬히 누운 바위가 있는데 초서로 ‘동천’(洞天)이라고 갈겨쓴 글씨가 날아갈 듯 화려하다. 글은 조선 명종 때의 문장가 양사언이 쓴 글씨이다.
속리산 산행 길의 초입에서 만난 성불사 큰 마당에는 연등을 매달아서 온 산이 덩달아 경건하다. 불을 밝힌 연등 따라 올라가자 오송 폭포가 나왔다. 수량이 적어 지금은 초라하지만 물이 불어난다면 바람 따라 물보라를 휘날리며 주변을 서늘하게 할 듯하다.
층을 이루며 사다리처럼 단을 지어 쏟아지는 물소리가 온 산을 울렁거리기에 충분했다. 이마에는 벌써부터 맺힌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모든 산행 자들을 이끄는 산행이사가 준 오이를 가쁜 숨 사이사이에 씹어 넘기는 맛이 꿀보다 달고 촉촉해서 갈증해소에는 제격이다.
충분하게 휴식을 취한 후 출발하면 좋으련만 야멸치게 걷기를 독촉하는 산행이사가 얄밉기만 하다. 850m의 낮은 능선 길에 올라서자 경북과 충북의 경계비(관리번호 359)가 외롭게 서 있었다.
둘러맨 배낭 끈 따라 흐르는 땀이 속옷을 젖게 했다. 경사가 심한 곳에는 둥근 통나무를 깔아 발바닥이 편했지만 숨이 차고 힘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리며 콕콕 쑤신다. 통증에 시달려 고통스러웠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가쁜 호흡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나는, 여유를 즐기며 웃는 얼굴의 산행 자들이 부럽기 만하다. 그들은 인상이 곱고 착해서 항상 웃는 얼굴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기운이 남아돌아 젊음이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니도 쬐끔 나이 좀 퍼먹어 봐라. 힘들 것이다. 염뱅할 놈아.’
목에까지 넘어오는 말을 꿀꺽 삼키며 참고 말았다. 힘들게 견디며 오르기를 계속하자 나지막한 능선에 오를 수 있었다. 문장대 입구의 휴게소였다. 동동주의 상큼한 냄새가 나를 유혹했지만 참을 수밖에…. 마실 때는 즐겁지만 배설할 때는 좁은 산길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만한 자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편하다.
* 글쟁이들의 필수코스 문장대
문장대(1천54m)는 거대한 암석 하나로 된 조물주가 만들어낸 참으로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그곳에는 원색 차림의 선행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봉의 꼭대기에 오르는 길은 철 계단 사다리 길로 난간의 왼편이 오르는 길이며 우측은 내려오는 길이었다. 동쪽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우복동이 꿈의 이상향이다.
그런데 문장대의 서쪽에는 거대한 철탑이 서 있었는데 방송중계 탑이라고 한다.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흉물처럼 보였다. 스카이라인 조금 밑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예쁜 산이 곱게 보일뿐만 아니라 세상의 일까지 바로 보인다는 평범한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오르기를 시작했다. 문장대를 오르고 내리는 많은 인파에 떠밀려가듯 한다. 철 계단과 등산화가 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한다.
“쿵쿵~쿵쿵”
발자국 소리가 너무도 크기에 고개를 들었더니 건장하고 뚱뚱한 아줌마의 내려오는 발소리였다. 다리통이 씨름선수 허벅지만큼이나 굵다. 그러나 날렵한 발놀림이 가뿐하고 흥겨웠다. 산속의 적막은 많은 소리를 머금고 있어서 좋다. 수많은 소리 중에 듣기 좋은 소리는 따로 있다.
물천어를 잡기 위해 한나절 내내 두레질한 방죽 바닥에서 팔딱거리며 뛰는 물고기들의 숨소리를 듣는 것처럼 즐거울 수가 없다. 그렇다. 오뉴월 땡볕 가뭄에 함석지붕위로 떨어지는 한줄기 소나기 소리가 기쁨이다. 깊은 밤 사르르 걷어 내리는 마누라의 팬티 벗겨지는 소리도 지상최고의 즐거운 소리라 하겠다.
드디어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는 문장대!
|
백여 명이 설 수 있는 넓은 정상의 한쪽에 움푹 들어간 곳이 보였다. 아니 이럴 수가! 단단한 돌 한쪽의 파진 모습이 양귀비 입 모양으로 너무나 예뻤다. 어느 틈엔지 ‘나사모’ 산우 회원들이 모여들자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문장대란 원래는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라고 했으나 세조대왕이 날마다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하여 문장대(文藏臺)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글쓰기에 관심 있는 자들은 반드시 한번쯤 올라가야할 봉이 문장대다. 등산의 필수 코스이자 글쟁이들의 성지처럼 되었다. 글발이 서고 쓴 글이 인정을 받으려면 문장대에 올라 손을 뻗어 하늘의 구름을 잡으면 세조의 영감이 느낌으로 전달되어 명문장가가 된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문장대에 몰려든 인파가 북적대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문장가가 되고 싶은 희망을 하늘에 전하려면 맨 먼저 문장대에 올라가야 한다.
‘아따 이젠 이번에 쓴 저의 책 '십승지와 가거지'가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지게 해주십시오잉.’
높은 곳은 하늘이며 그곳에는 구름이 항상 떠있다. 그래서 가장 높은 곳에는 구름이 있는 법이며 속리산도 높아 항상 구름이 산의 봉을 휘감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즉 가장 높은 산을 속리산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상의 북쪽에는 이곳에서 보이는 산을 그린 다음 봉의 이름을 써 붙인 입간판이 친절하게 보였다. 사방팔방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山뿐으로 겹겹이 첩첩이 山 山 山! 모든 산들이 문장대를 향해 서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못해 두렵기까지 하다. 주변의 산들이 문장대로 몰려오는 듯 황홀한 기분이다. 정상에 선 이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이렇게 굵은 땀방울을 흘렸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