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397호 2021년 05월 24일
서울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 인근 삼일시민아파트.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서울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에서 나와 청계천 방향으로 걸어가면 창신동과 숭인동에 걸쳐 삼일시민아파트(이하 삼일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다. 1969년 준공돼 지어진 지 50년이 넘었다. 이름은 아파트지만 이 건물에 주거 공간은 없다. 지상 1~2층 규모의 건물에는 골동품과 만물상, 레코드점, 공구점 등의 가게가 있다.
그런데 건축물대장에 적힌 이름은 삼일아파트이고 포털사이트 지도에도 삼일아파트로 나온다. 삼일아파트가 ‘아파트 없는 아파트’가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선 서울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삼일아파트는 1960년대 말 대규모 주택 공급 정책이었던 ‘시민아파트’ 사업으로 지어졌다. 시민아파트는 6·25전쟁 이후 도시화로 서울 곳곳에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자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로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불도저’처럼 추진한 사업이다. 주거 환경을 단기간에 개선하겠다는 목표로, 건립 첫해인 1969년에만 총 32개 지구, 406개 동, 1만5840가구가 지어졌다.
시민아파트 건립에는 서울시의 1년 예산보다 많은 돈이 필요해 추경이 투입될 정도였다. 1969~71년 3년간 무려 2000개 동에 달하는 아파트를 짓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1969년 4월 22일 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적었다. “동당 1200만원이 드는 이 아파트를 1년에 400~600개 동씩 지어 48억~72억원의 시비를 주택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하하는 것이 서울의 현재 형편으로 과연 옳으냐가 문제인 것이다. 48억원은 서울시의 1965년도 일반회계 예산 전액보다 많다.”
이 시기 청계천은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1958년 청계천 복개 사업이 시작됐다. 1969년 삼일고가도로가 개통했고 인근에 삼일아파트가 준공됐다. 1969년은 3·1운동 50주년이라 ‘삼일’로 명명됐다. 1970년에는 삼일빌딩이 당시 국내 최고층 건물로 지어졌다. 삼일아파트는 근대화로 동네가 확 바뀐 지역의 상징이었다.
삼일아파트는 원래 지상 7층, 24개 동, 총 1243가구로 지어졌다. 청계천 남쪽 황학동에 12개 동, 청계천 북쪽 창신동에 6개 동, 숭인동에 6개 동이 들어섰다. 공급면적은 11평(33㎡)으로, 전용면적으로 따지면 8평(26.4㎡)이었고, 방 2개, 화장실 1개 구조로 설계됐다. 요즘 기준으로 상당히 좁아 보이는데, 당시에도 좁은 아파트였다. 판잣집 철거민이 입주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급 아파트였던 이촌 한강맨션은 27~51평(89.1~168.3㎡)으로 공급됐다. 분양가는 27평이 340만원, 51평이 646만원이었다. 반면, 삼일아파트 분양가는 30만원대였다. 다만, 1969년 말 기준 전국 아파트는 750개 동이 존재했는데, 이 중 480개 동이 시민아파트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정권이 시민아파트 건설에 집중한 속내는 3선 개헌안 국민투표를 앞두고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란 비판도 있었다. 1970년 4월 9일 자 조선일보는 “국민투표를 앞둔 정치적 전시 효과를 노린 사업이란 일부의 비평이 뒤따른다”고 했다.
삼일아파트는 시민아파트 중 최초로 주상복합으로 지어졌다는 특징도 있다. 1~2층에 상가가 들어서고, 3~7층에 주거시설이 들어섰다. 주상복합으로 지은 이유는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은데, 세운상가가 1967년 인근에서 주상복합으로 지어진 영향으로 분석된다. 다른 시민아파트는 산 중턱에 지어진 것과 달리 이곳은 준공 전부터 인근에 상권이 형성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는 6·25전쟁 이후 서울의 대표 중고시장으로 성장했고, 1970년대에는 ‘빨간 비디오’로 불린 모텔용 비디오와 ‘빽판’으로 불린 레코드점으로 유명했다.
3~7층이 철거되기 전인 2000년 촬영된 삼일시민아파트. 사진 서울연구원
삼일시민아파트 2층 상가. 원래는 상가 공간이지만 거주하는 세입자가 있다.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절반은 재개발, 나머진 3~7층 잘려
시민아파트 사업은 마포구 와우시민아파트의 붕괴로 실패로 끝났다. 1970년 4월 8일, 준공 1년 만에 와우아파트의 1개 동(15동)이 무너지며 사망자 34명, 부상자 40명이 발생했다. 철근 정량이 부족하고 시멘트 배합률이 낮은 부실 공사와 지나치게 짧은 공기가 원인이었다.
사고를 계기로 정부와 서울시가 모든 시민아파트의 안전진단에 나선 결과, 대부분 단지가 안전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결과가 드러났다. ‘군사작전식 아파트 개발’의 비극이라 불렸고, 군인 출신 김현옥 시장은 사고 일주일 뒤 시장직을 내려놨다. 이후 시민아파트는 차례대로 철거됐다. 현재 서울에 남은 시민아파트는 회현2시민아파트와 삼일아파트 단 두 곳이다.
회현2시민아파트는 건물 상태가 양호해 철거에서 제외됐고, 삼일아파트는 온전히 존치되지 못했다. 1~2층 상가는 남고, 3~7층 아파트 부분은 ‘싹둑’ 잘려 나갔다. 시는 애초 건물 전체를 철거할 계획이었지만 상인 반발이 극심해 1~2층 상가는 존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3~7층 부분은 2005년 최종 철거됐다. 삼일아파트가 ‘아파트 없는 아파트’로 남은 이유다.
삼일아파트에는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이 있다. 창신동, 숭인동에 있는 12개 동은 지상 1~2층 부분이 남아있고, 황학동 12개 동만 ‘황학동 롯데캐슬베네치아’로 재개발됐다. 황학동과 창신동, 숭인동으로 각각 나뉘어 재개발이 추진됐는데, 속도가 가장 빠른 황학동 삼일아파트 12개 동만 재개발됐기 때문이다. 청계천을 마주 보고 24개 동의 절반은 신축 아파트로 재탄생했고, 나머지 절반은 3~7층 5개 층이 잘린 모습이 된 것이다.
삼일아파트는 건물 외벽과 별도의 마감 없이 콘크리트로만 된 계단 등에서 50여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언제 폐업했는지 모를 ‘삼일다방’ 간판만이 삼일아파트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2층 상가에는 심지어 세입자가 거주하고 있기도 하다. 세입자 송모(72)씨는 “보증금 없이 월세 18만원을 내고 11년째 혼자 살고 있다”면서 “천장에서 비가 새고, 복도에 쌓인 주인 없는 물건 탓에 불나면 어쩌나 걱정”이라고 했다.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