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1.04.28 08:36
[한국아파트 60년]
1958년. 한국산(産) 첫 아파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세워졌다. 이때부터 아파트는 전후(戰後)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규모로 지어진다. 고급 맨션이 유행하고 ‘건설 붐’으로 여의도·반포·잠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며 아파트는 우리나라 대표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아파트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기술까지 담긴 셈이다. [편집자주]
서울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에서 나와 청계천 방향으로 걸어가면 청계천 물길을 따라 창신동과 숭인동에 걸쳐 삼일시민아파트(3·1시민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다. 1969년 준공돼 지어진 지 50년이 넘었다. 이름은 아파트지만 이 건물에 주거 공간은 없다. 지상 1~2층 규모 건물에는 골동품과 만물상, 상사, 레코드점, 공구점 등 소규모 가게가 모여 있다. 그런데 건축물대장에 적힌 이름은 삼일아파트. 포털사이트 지도에 적힌 이름도 삼일아파트. 삼일시민아파트가 ‘아파트 없는 아파트’가 된 데는 서울의 역사가 담겨 있다.
고성민 기자
◇삼일고가도로, 삼일빌딩과 함께 ‘근대화의 상징’
삼일시민아파트는 1960년대말 대규모 주택공급 정책이었던 ‘시민아파트’ 사업으로 지어졌다. 시민아파트는 6·25 전쟁 이후 도시화로 서울 곳곳에서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자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로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불도저’처럼 추진한 사업이다. 주거 환경을 단기간 개선하겠다는 목표였다. 현재는 철거된 서대문구 금화시민아파트를 시작으로 건립 첫해인 1969년에만 총 32개 지구, 406동, 1만5840가구 아파트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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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 23일 김현옥 서울시장(왼쪽)이 공사가 진행 중인 금화 시민아파트를 시찰하면서 관계자들로부터 공사현황을 보고받고 있다. /서울사진아카이브.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에 대해 1968년 12월 5일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적었다.
해마다 수십만씩 지방에서 전입해오는 이주민들로 말미암아 주택 사정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아무리 강제철거를 해도 무허가 판잣집이 오히려 늘어나기만 하는 이유는 그만큼 주택 사정이 심각하다는 것을 말하며 강제철거가 연중행사처럼 되풀이되고 그때마다 주민들과의 사이에 투석전, 오물 세례 등 한심한 소동이 벌어진 것도 대안 없는 강권 발동이 빚어낸 비극의 일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번 서울시가 계획한 서민 아파트 건립안은 서민의 주택난 해소에 약간의 도움이 될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시민아파트 건립에는 서울시의 1년 예산보다 많은 돈이 필요해 추경이 투입될 정도였다. 1969~1971년 3년간 무려 2000동에 달하는 아파트를 짓는 사업이어서다. 1969년 4월 22일 조선일보는 이렇게 적었다.
동당 1200만원이 드는 이 아파트를 1년에 400~600동씩 지어 48억~72억원의 시비를 주택사업에 집중 투하하는 것이 서울의 현재 형편으로 과연 옳으냐가 문제인 것이다. 48억원은 서울시의 1965년도 일반회계 예산 전액보다 많다.
1969년 3월 22일 개통한 삼일고가도로. /서울사진아카이브
삼일시민아파트도 이때 지어졌다. 이 시기 청계천은 근대화의 상징과 같았다. 1958년 청계천 복개 사업이 시작됐다. 1969년엔 삼일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가 개통했으며 인근에서 삼일시민아파트가 준공됐다. 1969년은 3·1운동 50주년이라 ‘삼일’로 명명됐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삼일빌딩이 인근에서 당시 국내 최고층 건물로 지어져 63빌딩 준공 전까지 국내 최고층 빌딩을 차지했다. 근대화로 동네가 ‘확’ 바뀐 상징 지역이다.
◇골조만 짓고 내부공사는 안 해… “삼선개헌 앞둔 전시행정” 비판도
삼일시민아파트는 지상 7층, 24개동, 총 1243가구로 지어졌다. 청계천 남쪽 황학동에 12개동, 청계천 북쪽 창신동에 6개동, 숭인동에 6개동이 각각 지어졌다. 공급면적 11평(전용면적 8평), 방 2개, 화장실 1개 구조다.
요즘 기준으로 상당히 좁아 보이는데, 당시에도 ‘좁은 아파트’였다. 저소득 영세민을 대상으로 공급된 아파트여서다. 당시 고급 아파트 대명사였던 이촌 한강맨션(1971년 준공)은 27~51평. 분양가는 27평이 340만원, 51평이 646만원이었다. 또다른 고급 아파트인 종로구 세운상가(1967년 준공)는 1970년 기준으로 24평이 400만원(1970년 7월 15일 조선일보)이었다고 한다.
반면 시민아파트 분양가는 30만원대. 1969년 11월 9일자 조선일보 광고란에는 동숭시민아파트 분양가가 30만원, 청운시민아파트 분양가가 32만원으로 나와 있다. 특이한 점은 ‘내부 공사는 입주자가 하며, 공사비가 약 13만5000원 든다’는 내용. 서울시가 골조와 전기배관, 상수도 공사 등만 해주고 도배, 칸막이, 온돌 설치 등 내부공사는 입주자 몫이었다.
1970년 4월 9일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골조공사 이외는 모두 입주자가 부담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슬럼가를 집단화한 데 불과하여 시민 아파트는 또하나의 도시의 치부로 등장한 것이다. 이래서 집은 다 됐지만 집 안 단장을 못 해 못 들어간 사람이 지난 1월말 현재 50동 200가구나 됐다.
또다른 기사에선 시민아파트가 ‘겉만 달라진 슬럼가’로도 표현됐다. 중상류층 고급 아파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은 평가를 받은 주거시설이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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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층 아파트가 철거되기 전인 2000년 촬영된 삼일시민아파트의 모습. /서울연구원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판잣집 대용으로 지은 주택이라는 점에서 판잣집보다는 주거환경이 꽤나 개선된 건축물로 평가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무허가 판잣집이 수두룩했던 시절이어서다. 1969년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56.5%(2019년 기준 96.0%)에 불과했다. 또 1969년말 기준 전국 아파트가 총 750동 존재했는데 이 중 480동이 시민아파트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한편, 정권이 시민아파트 건설에 집중한 속내는 3선 개헌안 국민투표를 앞두고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란 비판도 있었다. 위 1970년 4월 9일자 조선일보는 ‘국민투표를 앞둔 정치적 전시효과를 노린 사업이란 일부의 비평이 뒤따른다’고 평가했다.
삼일시민아파트는 시민아파트 중에서는 최초로 주상복합으로 지어진 점이 특징이다. 1~2층에 상가가 들어서고 3~7층에 주거시설이 들어서는 구조였다. 주상복합으로 지은 이유는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은데, 세운상가가 1967년 인근에서 주상복합으로 지어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시민아파트는 주로 산 중턱에 지어진 것과 달리 이곳은 준공 전부터 인근에 상권이 형성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이 일대는 6·25 전쟁 이후 서울의 대표적인 중고품 시장으로 성장했고, 1970년대에는 ‘빨간 비디오’로 불린 모텔용 비디오와 ‘빽판’으로 불린 레코드점으로 유명했다. 황학동 삼일아파트 상가는 벼룩시장, 개미시장, 도깨비시장, 만물시장, 고물시장, 마지막시장 등으로 불렸다.
◇1~12동 3~7층 싹둑 잘려… 13~24동은 롯데캐슬로 재개발
대대적인 비용이 투입된 시민아파트 사업은 준공 1년 만에 마포구 와우시민아파트가 붕괴하며 금세 실패로 드러났다.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의 한 동(15동)이 무너지며 사망 33명, 부상 38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가 아파트 아래 판잣집을 덮치며 1명의 사망자와 2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총 사망자 34명, 부상자 40명.
철근 정량이 부족하고 시멘트배합률이 낮은 등 부실 공사와 지나치게 짧은 공기가 원인이었다. 와우시민아파트는 1969년 6월 26일 착공해 불과 6개월 만인 12월 26일 완공됐다. 앞서 인용한 1970년 4월 9일자 조선일보는 ‘시민아파트의 경우 동당 건축비를 1200만원을 책정, 이 중 택지 조성, 축대 구축 등 300여만원의 비용을 뺀 약 900만원을 실제 건축비로 썼다. 결국 평당건축비는 약 2만원꼴. 그러나 와우아파트의 경우와 같이 악덕 업자의 농간이 곁들여지면 평당 건축비는 1만1000~1만2000원원밖에 소요되지 않은 것’이라고 보도했다.
같은해 7월 15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촌 한강맨션의 평당 건축비는 12만6000원. 강남 고급 아파트 공사비가 3.3㎡(1평)당 500만원대인 요즘 시세로 보면, 시민아파트는 3.3㎡당 50만원 안팎의 비상식적인 저가로 지어진 아파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황학동 롯데캐슬베네치아(왼쪽)와 삼일시민아파트(오른쪽 아래)의 모습. /서울연구원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사고를 계기로 정부와 서울시가 뒤늦게 모든 시민아파트의 안전진단에 나선 결과, 대부분 단지가 안전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심각한 결과가 드러났다. ‘군사작전식 아파트 개발’의 비극이라 불렸고, 군인 출신 김현옥 시장은 사고 일주일 뒤인 4월 16일 시장직을 내려놨다. 이후 시민아파트는 1997~2005년 순차적으로 철거됐다. 현재 서울에 남은 시민아파트는 단 두 곳. 회현2시민아파트(회현2시범아파트)와 삼일시민아파트다.
회현2시민아파트는 건물 상태가 양호해 안전 우려가 없어 철거에서 제외됐고, 삼일시민아파트는 온전히 존치되지 못했다. 아파트 1~2층 상가는 남고 3~7층 아파트 부분은 ‘싹둑’ 잘려 나갔다. 시는 애초 건물 전체를 철거할 계획이었지만 상인 반발이 극심해 1~2층 상가는 존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3~7층 부분은 2005년 최종 철거됐다. 삼일아파트가 ‘아파트 없는 아파트’로 남겨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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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찾은 서울 종로구 삼일시민아파트. /고성민 기자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삼일시민아파트는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이 있다. 창신동, 숭인동에 위치한 12개동은 지상 1~2층 부분이 남아있고, 황학동 12개동만 ‘황학동 롯데캐슬베네치아’로 재개발됐다.
황학동과 창신동, 숭인동으로 각각 나뉘어 재개발이 추진됐는데, 속도가 가장 빠른 황학동 삼일아파트 12개동만 재개발된 것. 황학동 삼일아파트 12개동은 동아건설이 1993년 시공사로 선정되며 사업을 추진했는데, IMF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나며 공사가 중단되는 위기가 있었다. 이후 2001년 시공사가 롯데건설로 바뀌며 재개발이 재추진됐다. 2008년 ‘황학동 롯데캐슬베네치아’로 준공됐다. 반면 창신동(舊 창신6구역)과 숭인동(舊 숭인3구역)에 있는 삼일시민아파트 12개동(각각 6개동)은 보상 갈등 등으로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고 1~2층 건물 그대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청계천을 마주 보고 24개동의 절반은 신축 아파트로 재탄생하고, 나머지 절반은 3~7층 5개층이 싹둑 잘린 역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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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찾은 서울 종로구 삼일시민아파트 2층 상가의 모습. 원래는 상가 공간이지만 거주하는 세입자가 있다. 송모(72)씨는 “무보증금에 월세 18만원을 내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고성민 기자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3일 찾은 삼일시민아파트는 건물 외벽과 별도의 마감 없이 콘크리트로만 된 계단 등에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언제 폐업했는지 모를 ‘삼일다방’ 간판만이 삼일시민아파트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2층 상가에는 아직 일부 세입자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송모(72)씨는 “무보증금에 월세 18만원을 내고 11년째 혼자 살고 있다”면서 “천장에서 비가 새고, 복도에 쌓인 주인 없는 물건 탓에 불나면 어쩌나 걱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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