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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파트 60년]③ 김수근의 세운상가, 작품연보서 지워진 아픈 손가락 되다

ngo2002 2021. 7. 7. 09:57

고성민 기자

입력 2021.05.31 06:00

 

 

 

[한국아파트 60년]

1958년. 한국산(産) 첫 아파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세워졌다. 이때부터 아파트는 전후(戰後)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규모로 지어진다. 고급 맨션이 유행하고 ‘건설 붐’으로 여의도·반포·잠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며 아파트는 우리나라 대표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아파트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기술까지 담긴 셈이다. [편집자주]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안에 겁도 없이 뛰어든 ‘김수근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70년대 후반기부터 맹렬히 퍼부어진 이 비난의 소리가 김수근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김수근도 그 생전에 이 프로젝트를 한 것을 대단히 후회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연보에는 세운상가 설계에 관한 것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고(故)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6월호에 이같이 적었다. ‘세계 제일’로 불릴 정도의 초대형 건축 프로젝트이자, 현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1931∼1986)이 설계한 세운상가(1967년 준공)를 향한 날 선 비판이었다. 그의 말대로 세운상가엔 김수근의 꿈과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배어있다.

 

/ 고성민 기자

◇슬럼화된 전쟁의 상흔… 박정희-김현옥-김수근의 개발 무대로

세운상가의 역사를 보려면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부지는 당시 소개공지대(전쟁 중 발생한 화재가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 놓는 공간)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 10일, 미국이 도쿄 대공습을 펼친다. 이날 도쿄 면적의 약 40%가 불탔다. 8만여명이 사망하고 100만여명이 이재민이 됐다. 조선총독부는 직후 서울, 부산, 평양 등 도심지 곳곳을 소개공지대로 지정하고 해당 지역 건물 철거에 나섰다. 세운상가 부지는 이때 너비 50m, 길이 약 1km에 걸쳐 소개공지대로 지정됐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이 땅은 이재민 판자촌으로 슬럼화됐다. 이곳 사창가는 ‘종삼(鐘三)’으로 불리는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1968년 10월 12일 조선일보는 “난공불락의 윤락가이며 서울의 불명예스런 명물의 하나로 손꼽히던 이른바 종삼 지대”라면서 “20여년간 탕아들의 유락장이자 우범 청소년들의 소굴이었던 도심지의 불결한 치부”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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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 촬영된 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 세운상가 부지 판잣집이 철거되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치부를 정리하겠다는 계획은 서울중구청 이을삼 계장(6급)의 행정연구서에서 시작했다. 세운상가 프로젝트와 비교하면 규모가 절반 정도였다. 50m 가로 가운데 양쪽 15m에 건물을 짓고 중앙의 20m를 도로로 남기는 방안이었다. 이 보고서를 받은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은 즉시 현장을 답사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이 큰 관심을 가지며 사업이 확 커졌다. 손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5월호에 이렇게 적었다.

(1966년 7월 26일)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김 시장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강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좀 더 깊이 연구해서 소신껏 잘 처리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상공을 자주 시찰하고 다녔으니 이 지대의 실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보였던 대통령의 깊은 관심이 김현옥 시장을 미치게 한다. 그때부터 이 사업은 구청 소관에서 시 본청 소관 업무로 바뀌게 되었고… (중략) 이 지구에 상가 건물을 짓는 일을 전담하는 기구가 (서울시에) 생겼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이 남긴 상흔과도 같은 땅에 국내 최대 건축 프로젝트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로써 세운상가 프로젝트는 당시 ‘세계 제일’의 건축 사업으로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조국 근대화 열망을 가진 박정희와 불도저식 추진력으로 유명한 김현옥,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이 이렇게 만났다. 1966년 10월, 재개발지구 고시(건설부고시 2819호)가 이뤄지며 세운상가는 서울 도심부 최초의 재개발지구 사업으로 첫발을 뗐다.

1968년 촬영된 세운상가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획기적인 공중보행 설계… 현실의 벽에 부딪히다

김현옥 시장이 찾은 사람은 당시(1966년) 만 35세인 김수근 건축가였다. 김수근은 도쿄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인 28세 때 남산 국회의사당 건축 설계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되며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고, 30세 때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창설하고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에 전임강사로 취임하는 등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34세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도 맡고 있었다. 당시 김수근의 제자이며 세운상가 설계에 참여한 현(現) 한국건축가협회 윤승중 명예회장은 월간 ‘건축’ 1994년 7월호에 이렇게 적었다.

세운상가 계획이 처음 거론된 것은 1966년 어느날 당시 시장, 부시장에게 꽤 신용을 갖고 있었던 김수근 선생에게 시장이 문제의 땅의 이용 방법을 물어 왔을 때, 즉석에서 보행자몰, 보행자데크, 입체도시 등의 개념을 그럴듯하게 말로 설명하고, 시장, 부시장의 공감을 얻어내어서 프로젝트화한 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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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1월 17일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서울시장이 세운상가 준공식에서 준공 테이프를 끊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김수근은 이 건물에 건축 이상을 적극 반영했다. 핵심은 차도와 보행로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지상은 차도와 주차장으로만 구성하고, 2~4층을 상가로 구성한 뒤 건물 8개동의 3층 레벨이 모두 보행로로 연결되게끔 설계했다. 종로3가에서 남산 입구까지 이어지는 총 1㎞ 길이의 초대형 보행 쇼핑몰을 계획한 것이다. 또 상가의 옥상이자 주거 부분이 시작하는 지상 5층에는 인공대지를 만들고자 했다.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인 프랑스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의 영향을 받은 입체도시 설계였다.

그러나 이런 이상은 현실에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핵심인 지상 3층 부분 공중보행로는 8개동이 모두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단절됐다. 현대·대림·풍전·신풍·삼원·삼풍 등 6개 기업과 아세아상가번영회, 청계상가주식회사까지 총 8개 사업체가 8개 건물을 각각 자금을 들여 시공, 분양하며 건물 3층 부분을 모두 잇는다는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 1층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조성되지 않고 상가가 들어섰으며, 인공대지와 아트리움 계획도 변경됐다.

 

건축계에선 이런 점을 지적했다. 손정목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6월호에서 ▲서울의 시가지는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데 세운상가는 남북 방향으로 길쭉하게 지어져 도시의 선(線)을 차단하며 ▲남북방향의 보행자와 차량이 많지 않아 보차도분리 발상이 처음부터 잘못됐고 ▲지상 7.5m에 해당하는 3층 부분에 보행로가 만들어져, 보행자가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여론은 1994년 2월 17일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건축 관련 종사자 200여명은 당시 최고 국내 건축가로 김수근(39.6%)을, 최고 현대건축물로 김수근의 ‘공간 사옥’을 꼽았다. 반면 세운상가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 현대건축물로 꼽았다.

◇선망의 대상에서 10년 만 애물단지로… 철거에서 재생으로 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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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26일 촬영된 세운상가 내부 점포의 모습. /서울사진아카이브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김수근의 건축 이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미완의 공간이었지만, 세운상가는 압도적인 크기로 준공 직후부터 서울의 명물을 차지했다. 1967~1972년 순차로 8~17층 7개동이 준공됐고, 1981년 마지막 1개동(풍전호텔)이 지어졌다. 총 2000여개 점포와 851가구, 177개의 호텔 객실이 세워졌다. 1967년 준공식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직접 참석해 준공 테이프를 끊었으며,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을 담아 세운(世運)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최대 규모, 최고급, 최신식 아파트로 선망의 대상이자 유행의 중심이었다. 1967년 7월 27일 조선일보는 ‘문을 연 세계제일’ 기사에서 이같이 소개했다.

입주 상인들과 시민들이 벌떼같이 몰려 규모에 놀라고 양 끝이 보이지 않는 옥내 도로를 따라 긴 다리를 건너는 기분을 냈다. 느린 걸음으로 20분이 걸리는 1㎞의 직선거리. 계단마다 생화분이 즐비하고 규격이 같은 흰 빛깔 상호판이 가로등처럼 끝간데를 모르게 휘황하다… (중략) 공사에 투입된 철근은 7002t으로 대한중공업의 1년 총생산량의 3분의 1. 한동안 서울 시내에 철근이 달려 값이 뛰기도 했다… (중략) 이 상가아파트는 규모에 있어 세계적으로 그 규모를 자랑하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알라모어 쇼핑센터보다 크다는 것.

지난 24일 찾은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전경. /고성민 기자

가격도 엄청났다. 1967년 4월 17일 조선일보는 “방안에 앉아 구내전화를 들면 상가 내 어느 곳에서나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며 전세세입자를 모집하는 세운상가 라동 삼원아파트는 50평이 전세금 650만원이라고 적었다.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라고 했다. 이듬해 분양한 고급 아파트 대명사 이촌 한강맨션 51평의 분양가가 646만원이었고, 저소득 영세민을 대상으로 공급한 시민아파트의 분양가는 30만원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축 효과가 꺼지며 세운상가는 점차 도시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명동에 제일백화점, 코스모스백화점 등이 잇달아 개관하며 상권의 중심은 명동으로 옮겨갔다. 강남개발이 이뤄지며 부동산의 중심도 강남으로 축을 옮겼다. ‘미사일과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로 전자·기계의 명소였지만, 이 역할도 용산에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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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찾은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전경. /고성민 기자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서울시는 오세훈 시장 시절인 2006년 세운상가와 인근 부지를 포함한 43만8585㎡를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하고 2015년까지 8개 상가를 모두 철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2009년 5월 서울시는 현대상가 부지를 철거하고 세운초록띠 공원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 간 갈등과 사업성 문제 등으로 이후 철거는 지지부진했고, 후임인 박원순 서울시장은 당선 이후 세운상가 개발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박 전 서울시장은 2014년 세운상가 존치를 결정하고 ‘다시 세운 프로젝트’로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했다.

서울시는 다시 세운 프로젝트 1단계로 단절된 3층 보행로 일부를 ‘다시세운보행교’로 연결하고, 50여년 방치된 옥상을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들여다보는 관광공간으로 개방했다. 산업지로서의 역할도 강화하기 위해 스타트업 전용 공간인 ‘세운 메이커스 큐브’를 만들고 19개 기업을 입주했다. 오는 9월 다시 세운 프로젝트 2단계가 완료하면 종묘 앞 세운상가에서 퇴계로 진양상가까지 총 1㎞에 걸친 7개 건물 전체가 공중보행길로 연결된다.

도시재생과 힙지로(힙+을지로) 열풍을 타고 세운상가는 어두운 이미지를 탈피하고 젊은층이 찾는 명소로 부활했다. 지난 24일 찾은 세운상가에는 오후 3시에도 야외 테이블에서 삼겹살과 소주, 커피 등을 먹고 마시는 2030 젊은층 모습이 많이 보였다. 다만 주택 부분은 신축 아파트 대비 건물 노후화와 열악한 학군, 커뮤니티 시설의 부재 등으로 열세다.

광화문과 가까운 직주근접 입지여서 연식을 고려하면 값은 꽤 나간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에 따르면 진양상가아파트 전용 71㎡는 지난달 4억8000만원, 대림상가아파트 전용 83㎡는 지난해 6월 4억6600만원에 거래됐다. 15년여 전인 2006년과 비교하면 각각 2억원, 1억원정도 올라 상승률은 낮았다.

#부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