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대한민국 판사는 누구인가 - 재판과 여론의 관계

2014년 말 선고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불과 3년여 만에 여론을 추종한 부당한 결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올해 초 나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죄 항소심의 사실상 무죄 판결은 선고 직후부터 국민 법감정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판사들이 고려해야 할 여론은 단순히 다수의 의견이 아닌 사회의 공감이라고 원로 법조인들은 조언한다. 2014년 2월 수원지법에서 이석기 의원 등 통진당 당원들이 내란음모 혐의 재판을 받고 있다(왼쪽 사진). 지난 2월 이재용 부회장이 서울고법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법정을 나서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김기남·강윤중 기자
“통진당 해산, 여론 추종” “이재용 집행유예, 국민 법감정 무시” 비판
‘나랏일’ 신념 강한 고참 판사들, 복잡한 사건에 사회적 관심도 반영
젊은 법관 “국가주의 입장, 정치 재판 우려…법의 논리에만 충실해야”
법관은 여론을 어느 정도로 이겨내야 하고 반대로 얼마나 고려해야 할까.
2018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죄 항소심 판결과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법관의 아슬아슬하고 난처한 처지를 보여준다. 중도 보수로 평가받는 한 전직 헌법재판관은 통진당 해산 결정은 여론을 추종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통진당 사람들 면면을 보면 나 같은 사람이 좋아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 정당 해산은 얘기가 다르다. 외국에도 잘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8 대 1로 했다. 선거로 뽑힌 정당을 그렇게 간단히 없애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그는 여론 추종은 사법기관에 독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헌재가 욕을 먹는 결정은 대부분 여론을 따라 내놓은 것들”이라고 했다.
올해 초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사실상 무죄 판결은 여론 혹은 법감정을 무시한 것으로 꼽힌다. 이 판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법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리로도 부당한 판결이라고 한다. 하지만 통진당 해산도 헌법적으로 옳다는 주장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 부회장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된 핵심은 ‘경영권 승계라는 현안이 없었다’는 사실 판단이다. 이에 대해 수도권 법원 부장판사는 문제 삼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법관은 제기된 의문에 대해 모르겠다고 말하고 끝낼 수 있다. 정형식 부장판사도 제출된 증거 안에서 판단했다는 것이고, 경영권 승계에 관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판사들에게 재판과 여론의 관계를 물어보면 애매하게 답하고 만다. 우리가 여론에 종속되는 사람도 아니지만 여론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라는 정도의 말을 한다. 실제로 판사들은 시사에 밝다. 요즘은 기자들도 자기 담당 분야가 아니면 간단한 소식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판사들은 국제 문제부터 스포츠까지 꿰고 있다. 여전히 종이신문도 열심히 구독하는 집단이다. 법률서적만 외워 판사가 됐다는 얘기가 억울해서일까. 남들 모르게 꾸준히 책을 챙겨 읽는다. 독서 강박을 보이는 판사도 많다.
이런 공통점에도 사회를 보는 시각은 판사마다 다르다. 대체로 세대별로 갈린다. 고참 판사들은 이른바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자기에게 배당되는 사건에서도 나라를 구하려 들지만 사법부 차원에서도 나라를 구하려 한다. 이를 드러내는 단어가 ‘효율’이다. 자기 재판부에 사건이 수백건 있어도 시간을 들일 사건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하드 케이스’로 불리는 어렵고 복잡한 사건이다. 하드 케이스는 법리적으로도 판단하지만 사회적 관심도로도 판단한다. 여론이 주목하는 사건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여론을 추종하거나 혹은 맞선다. 이유는 모두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우리는 애국심이 있었다”고 말하는 최고위 법조인이 드물지 않은 이유다.
젊은 법관들은 여론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편이다. 요즘 선임 판사들은 배석 판사 눈치를 보느라 직접 말은 못하지만 후배 판사에게 불만이 많다. 스펙들은 화려하지만 꽤나 보수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니 과거 판례를 따르면서 사회를 유지시킨다고 지적한다. “기업은 고용을 많이 해주기 때문에 작은 잘못은 넘어가도 되지 않느냐는 소박한 생각을 한다. 남들과 토론도 하지 않으니 이런 생각이 꺾이거나 교정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고 믿는데, 그런 생각이 판결에 반영되어 가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남에서 자라고 특목고를 졸업한 자기계급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극복의 대상으로서든 추종의 대상으로서든 법관에게 여론이란 어떤 것일까. 많은 판사들의 답은 “댓글이 여론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회적 공감을 예로 들었다. “진정한 여론은 사회적인 공감(共感)이다. 미국 하버드 로스쿨 로런스 트라이브 교수가 말했다. 미국 헌법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해석해야 한다고. 재판, 특히 헌법재판이라면 우리 사회의 10년 뒤 사회적 합의를 염두에 둬야 한다. 존재가 아니라 당위를 생각해야 한다.” 전직 최고위 법관의 얘기다.
이 같은 생각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 현직 판사는 이른바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은 자의적이고 정치적인 재판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국가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 사실 판단부터 흔들린다. 판사가 왜 국가경제를 걱정해야 하느냐. 판사는 경제를 모른다. 법의 논리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판사의 소명이다. 그래야 정치적 중립이 충실해진다. 2013년에 수능 문제 오류 재판에서 서울행정법원 재판부가 그냥 넘어가자고 판결했다. 오류를 인정하면 입시 일정을 비롯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혀 문항 오류가 인정됐는데 나라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 판사가 상황을 오판한 것이다. 그래서 판사는 법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수의 법조인은 재판과 여론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한다. 외국에서는 헌재 결정문에 여론을 검토하는 부분도 등장한다고 헌재 관계자는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헌재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면서 내린 사형제 위헌 판결이 있다. 남아공 헌재는 “사건을 심리함에 있어 여론을 고려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여론에 대한 두려움이나 아첨 없이 헌법을 해석하고 이를 수호해야 한다”며 사형제에 긍정적인 여론을 넘어서겠다고 선언했다.
헌법에 해박한 한 중견 법관은 “여론은 재판에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하면 되고, 판사들은 여론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애쓰면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와 입헌주의가 공존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