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총수 일가 견제할 상법 개정안 박차… 공익재단부터 지주회사까지 ‘전방위 압박’
정부 출범 첫해 ‘재벌의 자발적인 변화’를 촉구했던 문재인 정부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2017년 말부터 “국민들이 기업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며 재벌들을 다그치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2018년 신년사에서 공정위의 올해 중점 추진과제로 재벌개혁 문제를 가장 먼저 거론했다.
김 위원장은 학자 시절부터 “재벌개혁은 긴 시간이 필요한 싸움”이라며 급진적인 재벌개혁안 추진을 경계해 왔다. 2017년 11월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5대그룹 최고경영인과의 간담회를 마친 후에도 “정부 출범 6개월 이내에 재벌개혁을 완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정부가 몰아치듯이 나서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정부가 재벌의 ‘셀프개혁’을 위한 ‘1차 데드라인’으로 꼽은 2017년 12월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던 상황도 반영된 발언이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최후통첩’
하지만 12월까지 드라마틱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태광이나 CJ 사례 등을 언급하며 일정 부분 셀프개혁의 성과를 거론했지만 “100점이 만점, 60점이 낙제점이라면 첫해 셀프개혁 점수는 80점에 못미친다”(<뉴스1> 인터뷰)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재벌의 자발적인 변화가 기대에 못미치고, 김 위원장이 입각 직전 재벌개혁을 위해 정부 출범 첫해 통과시켜야 한다고 했던 상법 개정안, 자본시장법 개정안 등도 줄줄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자 공정위라도 우선 칼을 빼드는 선택을 한 것이다.
김 위원장의 ‘최후통첩’ 속에 재계가 받아든 ‘2차 데드라인’은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몰려 있는 3월 말의 이른바 ‘슈퍼 주총데이’다. 전자투표제 도입, 집중투표제 도입 등과 같은 지배구조 개선안만 해도 주총의 의결이 필요한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재계가 어떻게 화답하느냐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전반적인 재벌개혁 수위와 속도도 결정될 전망이다.
김 위원장은 재벌개혁을 중점과제로 언급하면서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경제력 남용(일감 몰아주기 등) 문제를 짚었다. 지배구조 개선의 경우 재벌들의 지배구조를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바꾸려면 기업의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이사회가 정상화돼야 하고, 이에 앞서 이사들을 선출하는 주주총회가 다양한 소액주주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이에 공정위도 매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 발표를 통해 기업들이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파악 중이다.
주총의 전자·서면투표제나 집중투표제 도입은 특히 소액주주의 의견을 반영하고 총수 일가 지배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꼽히고 있지만 도입률이나 그 실효성은 높지 않다. 공정위가 발표한 ‘2017년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 자료를 보면 26개 민간 대기업집단 소속 169개 전체 상장사 중 전자투표제를 도입한 회사는 39개사로 23.1%를 차지했다. 2016년 조사(16.4% 도입) 대비 6.7%포인트 증가한 수치로, 주요 재벌기업 4곳 중 1곳은 전자투표제를 도입했다고 볼 수 있는 수치다.
취지 퇴색한 전자투표제·집중투표제
하지만 소액주주의 의사를 듣기 위해 마련된 전자투표제가 그 취지대로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공정위도 회의적이다. 전자투표제의 경우 2009년 상법 개정안을 통해 전자적 방법에 의한 의결권 행사가 허용되면서 도입됐다. 제도가 허용된 후 상당 기간 동안 재벌 총수들은 전자투표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2014년까지 5년간 전자투표제를 도입한 상장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15년 들어 도입률이 8.8%로 갑자기 늘더니 2016년에는 16.4%, 2017년엔 23.1%까지 올랐다. 왜일까.
재벌들이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고 소액주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 결과일까. 결론적으로는 ‘아니다’에 가깝다. 상장사에 국한된 통계는 아니지만, 2016년 3월 말 기준 전자투표제를 이용한 회사 총 487곳 중 460곳은 ‘섀도보팅’을 요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자투표를 이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섀도보팅은 기업이 주주총회 성립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예탁결제원에 의결권 행사를 부탁하는 제도다. 한마디로 주총 개최를 위한 인원수를 채우려는 목적으로 기업들이 전자투표제를 이용한 셈이 된다.
공정위도 2015년부터 조사대상 상장기업들의 전자투표제 도입이 갑자기 늘어난 이유를 이 ‘섀도보팅’에서 찾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섀도보팅은 2015년 1월 폐지 결정이 났지만 전자투표제 도입회사 등에 한해 3년간 섀도보팅을 운영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줬다”며 “전자투표제 도입회사가 2015년부터 급증한 이유도 섀도보팅 유예기간을 누리기 위한 목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섀도보팅 유예기간의 경우 2017년 12월 31일부로 완전히 종료됐다. 금융위원회가 갑작스러운 섀도보팅 폐지에 따른 대안을 마련 중인 가운데, 섀도보팅이라는 ‘미끼’가 사라진 마당에 기업들이 전자투표제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미지수다.
집중투표제의 경우 소액주주들이 힘을 모아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이사를 선출할 수 있게끔 하는 제도다. 상법에서는 2인 이사의 선임을 목적으로 주총이 소집될 때 발행 주식총수의 3%(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는 1%) 이상에 해당하는 주식을 가진 주주가 집중투표의 방법으로 이사를 선임할 것을 청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재벌 총수들의 ‘거수기’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사회를 정상화할 수 있는 주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169개 상장사 중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곳은 7개(4.1%)에 불과하다.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된 제도가 아닌 이유로 전체 상장사의 94.5%가 집중투표제를 아예 못하도록 정관에서 배제하고 있는 탓이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상장사라도 집중투표제 방식으로 의결권이 행사된 경우는 최근 2년간 전무했다. 기업들은 “주주들이 집중투표제를 청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취지에 맞게 제도를 활용하려는 기업들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 역시 만만찮다.
총수의 지배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들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기업 내 총수 및 총수 일가의 지배력은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총수가 있는 21개 대기업집단의 소속회사 중 총수 일가가 1명 이상 이사로 등재된 회사의 비율은 2017년 17.3%(165개사)로 2013년 대비 8.9%포인트 감소했지만, 재벌 계열사 중 사익편취 규제대상 회사 및 주력회사에 이사로 등재된 비율은 모두 50%에 가까웠다. 총수들이 그룹 내 일명 ‘알짜회사’에만 집중적으로 이름을 올리고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대자동차, 한진, 금호아시아나, 부영, 영풍 등의 그룹들은 총수가 4개 이상 계열사에 이사로 등재돼 있다.
‘악용’ 지적 많았던 재벌의 공익재단
문재인 정부가 바라는대로 기업들 스스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면 전자투표제나 집중투표제의 자발적인 도입 등이 필요하지만, 2017년에 이 같은 제도들을 도입한 재벌기업은 SK그룹을 제외하곤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는 일단 3월 주총까지는 좀 더 기다려본다는 입장이지만,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경우 ‘강제적으로’ 제도 도입을 의무화하는 쪽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높다. 바로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의 통과 문제다. 김상조 위원장이 “공정위 혼자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공정거래법상 수단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타부처와의 긴밀한 공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언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재 대기업들은 누가 먼저 ‘총대’를 메는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며 “삼성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 재판 문제로, 현대자동차의 경우 중국발 판매부진 문제 등으로 셀프개혁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터라 다른 대기업들이 앞장서서 총대를 메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개혁을 화두로 꺼내들긴 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재벌들의 셀프개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김상조 위원장이 새해에도 “기업과 협의를 통해 진행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2017년처럼 마냥 기다리지는 않겠다는 게 정부의 포석이다. 재계에서는 공정위가 지난해 말부터 대기업의 공익재단과 지주회사 수익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서 찾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공익재단이나 지주회사 문제 모두 그간 ‘무풍지대’라고 불리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아온 게 사실”이라며 “주요 대기업의 경우 큰 ‘약점’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조사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업들을 압박하고 다그치기 위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익재단 문제의 경우 총수들이 사실상 편법적인 수단으로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거나 경영권 세습의 통로로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김상조 위원장도 학자 시절부터 공익재단들이 보유한 그룹 계열사 지분에 비해 의결권 행사나 이를 통한 이익 실현에 소홀해 왔다는 점을 들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김상조 위원장은 공정위가 조사에 나섰음을 밝히면서 “삼성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재계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공익재단이 보유한 지분의 양이나 금액면 등에서 삼성이 다른 재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연대가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17년 7월 기준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중 20개 그룹이 42개의 공익재단을 운영 중이다. 이들 공익재단은 전체 84개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 중이고, 그 가치는 6조원이 넘는 것으로 분석됐다. 공익재단들이 보유한 지분가치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 삼성그룹의 공익재단들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 삼성문화재단, 삼성복지재단 등 3개의 공익재단을 운영 중인 삼성의 경우 이들 공익재단이 보유한 지분가치가 3조원에 달한다. 이 중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가장 핵심 계열사인 삼성생명 주식을 합계 6% 이상 가지고 있는 삼성생명공익재단·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이 이 부회장이다.
공정위가 공익재단 조사를 통해 어떤 결과를 발표할지, 조사내용을 근거로 어떤 제재에 나설지 등은 불분명하다. 재계 일각에서는 “공익재단 조사 자체가 월권”이라는 반발이 나오고 있고, 강제처분 등에 나서려면 법개정도 필요한 부분이어서 조사가 곧바로 제재로 이어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공정위가 공익재단 조사에 나서면서 재벌들이 향후 공익재단을 통해 추가적으로 계열사 지분을 늘리는 등의 편법을 쓰는 건 어려워질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만 해도 2016년 삼성SDI가 매각에 나선 삼성물산 주식 500만주 중 200만주를 사들여 논란이 된 바 있다. 당시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신규 순환출자고리가 형성되자 법률에 따라 삼성SDI가 가지고 있던 삼성물산 주식 500만주를 매각하라고 결정했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보유현금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수익 확보 차원”이라며 200만주를 사들였지만 사실상 이재용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 강화를 위한 조치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지주회사의 과도한 수익 추구 비판도
삼성SDI는 올해 9월까지 삼성물산 지분 404만주(2.11%)를 추가로 매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2017년 12월 공정위가 “삼성물산 합병 당시 삼성SDI의 삼성물산 보유지분 처분 결정이 잘못됐다”며 추가로 404만주를 매각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삼성은 겉으로는 “그룹 지배구조에 영향을 주는 물량은 아니다”라는 입장이지만 삼성물산의 경우 향후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과정에서 핵심 계열사에 해당해 지분 단 1%가 아쉬운 마당이다. 과거 같았다면 그룹 공익재단을 통해 삼성이 또다시 삼성물산 지분 확보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공정위가 공익재단을 뒤지고 있는 마당에 2016년처럼 공익재단에서 404만주 중 일부를 가져오기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전망이다.
지주회사 수익 문제의 경우 당초 설립 목적과는 달리 지주회사가 과도한 수익 추구를 통해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지주회사는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지배하는 목적만 가지는 회사라, 주요 수익원은 보유지분에 따른 배당금이 돼야 한다. 하지만 국정감사에서 기업별로 이른바 ‘상표권 수수료’ 명목으로 많게는 수천억원대의 돈을 지주회사가 계열사들로부터 받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 바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조사를 통해 지주회사 상표권 수수료 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날 경우 공시 개선안을 만드는 등 제도 정비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최재혁 팀장은 “공익재단이나 지주회사 문제 등은 재벌의 경제력 남용과 일감 몰아주기 문제와도 직결된 문제들이라 정책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지켜볼 방침”이라며 “공정위의 업무계획이 확정되는대로 올해 정부가 집중해야 할 재벌개혁 과제를 선정해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최대 관건은 정부가 ‘기존 순환출자고리 해소’ 등과 같은 극약처방을 쓸 것이냐의 문제다. 순환출자 문제의 경우 2014년 법이 개정되면서 신규 순환출자에 대한 규제만 이뤄지고 있다. 2014년 기준 16개 대기업에서 전체 483개에 달했던 순환출자고리는 2016년 초 기준 94개로 크게 줄어든 상태다. 이마저도 94개 순환출자고리 중 절대다수인 67개를 차지하던 롯데그룹이 지난해 말부터 지주회사 전환을 시작하면서 올 상반기까지 순환출자고리 대부분이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상조 위원장은 평소 “기존 순환출자 해소 논쟁은 재벌개혁에서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을 밝혀 왔다. 경제적 효과가 크지 않은 데 비해 정치적 논란만 가중되는 등 실익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올 초 <서울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올 상반기까지 다른 부처들의 제도 정비와 재벌들의 자체 개선 노력 등을 지켜보겠다”며 “우리 사회와 시장이 기대하는대로 재벌그룹들의 순환출자 개선이 안될 경우 과거의 결정(신규만 규제)에서 더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삼성·현대차에 ‘극약처방’ 나올까
과거 김상조 위원장이 순환출자 문제의 주요 사례로 꼽아온 곳이 바로 현대자동차그룹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개의 순환출자고리를 안고 있는데, 현대자동차를 지배하고 있는 현대모비스가 그룹 순환출자고리의 핵심이다. 정몽구 회장의 경우 본인이 직접 보유한 현대차 지분 5.17%와 현대모비스 지분 6.96%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는 데 비해 경영권 승계자인 정의선 부회장의 경우 현대차 지분은 2.3%로 더 적고 현대모비스 주식은 하나도 보유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골드만삭스는 2017년 3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현대차가 지주회사 전환과 경영권 승계작업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 과정에서 순환출자 문제가 해소될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현대차는 최근까지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당장 순환출자를 해소하려면 최대 5조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한 것도 문제다.
김상조 위원장이 최근 순환출자와 함께 금산분리 강화 역시 언급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금산분리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숙제’로 꼽는 문제가 바로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주식 보유 문제다. 김상조 위원장 역시 지난해 초 재벌개혁 토론회에서 “금산분리 규제를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하려면 유독 보험업법에서만 계열사 주식 보유분을 시가가 아닌 취득가로 평가하도록 하는 것은 삼성그룹에 대한 특혜이며,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상조 위원장이 순환출자나 금산분리 문제를 거론한 것은 재계 서열 1·2위인 삼성과 현대차를 겨냥한 발언으로 봐야 한다는 게 재계 시각이다. 재계와 재벌을 동시에 상징하는 기업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정부 차원에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월 중순부터 진행될 예정인 부처별 업무보고에서 공정위가 어떤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을지도 주목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더 이상의 기다림은 재벌개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대 정부에서 봤듯이 정권 지지도가 높은 초기에 재벌개혁을 하지 않으면, 재벌들의 거센 저항으로 개혁이 실패했다”며 “이미 국회에 기존 순환출자 해소를 위한 법안이 발의돼 있는 등 재벌개혁의 적기인 만큼 정부가 구체적인 로드맵을 만들어 정책을 시행할 때”라고 밝혔다.
<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정부 출범 첫해 ‘재벌의 자발적인 변화’를 촉구했던 문재인 정부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2017년 말부터 “국민들이 기업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며 재벌들을 다그치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2018년 신년사에서 공정위의 올해 중점 추진과제로 재벌개혁 문제를 가장 먼저 거론했다.
김 위원장은 학자 시절부터 “재벌개혁은 긴 시간이 필요한 싸움”이라며 급진적인 재벌개혁안 추진을 경계해 왔다. 2017년 11월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5대그룹 최고경영인과의 간담회를 마친 후에도 “정부 출범 6개월 이내에 재벌개혁을 완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정부가 몰아치듯이 나서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정부가 재벌의 ‘셀프개혁’을 위한 ‘1차 데드라인’으로 꼽은 2017년 12월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던 상황도 반영된 발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2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청와대 사진기자단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최후통첩’
하지만 12월까지 드라마틱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태광이나 CJ 사례 등을 언급하며 일정 부분 셀프개혁의 성과를 거론했지만 “100점이 만점, 60점이 낙제점이라면 첫해 셀프개혁 점수는 80점에 못미친다”(<뉴스1> 인터뷰)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재벌의 자발적인 변화가 기대에 못미치고, 김 위원장이 입각 직전 재벌개혁을 위해 정부 출범 첫해 통과시켜야 한다고 했던 상법 개정안, 자본시장법 개정안 등도 줄줄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자 공정위라도 우선 칼을 빼드는 선택을 한 것이다.
김 위원장의 ‘최후통첩’ 속에 재계가 받아든 ‘2차 데드라인’은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몰려 있는 3월 말의 이른바 ‘슈퍼 주총데이’다. 전자투표제 도입, 집중투표제 도입 등과 같은 지배구조 개선안만 해도 주총의 의결이 필요한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재계가 어떻게 화답하느냐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전반적인 재벌개혁 수위와 속도도 결정될 전망이다.
김 위원장은 재벌개혁을 중점과제로 언급하면서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경제력 남용(일감 몰아주기 등) 문제를 짚었다. 지배구조 개선의 경우 재벌들의 지배구조를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바꾸려면 기업의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이사회가 정상화돼야 하고, 이에 앞서 이사들을 선출하는 주주총회가 다양한 소액주주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이에 공정위도 매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 발표를 통해 기업들이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파악 중이다.
주총의 전자·서면투표제나 집중투표제 도입은 특히 소액주주의 의견을 반영하고 총수 일가 지배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꼽히고 있지만 도입률이나 그 실효성은 높지 않다. 공정위가 발표한 ‘2017년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 자료를 보면 26개 민간 대기업집단 소속 169개 전체 상장사 중 전자투표제를 도입한 회사는 39개사로 23.1%를 차지했다. 2016년 조사(16.4% 도입) 대비 6.7%포인트 증가한 수치로, 주요 재벌기업 4곳 중 1곳은 전자투표제를 도입했다고 볼 수 있는 수치다.
취지 퇴색한 전자투표제·집중투표제
하지만 소액주주의 의사를 듣기 위해 마련된 전자투표제가 그 취지대로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공정위도 회의적이다. 전자투표제의 경우 2009년 상법 개정안을 통해 전자적 방법에 의한 의결권 행사가 허용되면서 도입됐다. 제도가 허용된 후 상당 기간 동안 재벌 총수들은 전자투표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2014년까지 5년간 전자투표제를 도입한 상장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15년 들어 도입률이 8.8%로 갑자기 늘더니 2016년에는 16.4%, 2017년엔 23.1%까지 올랐다. 왜일까.
재벌들이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고 소액주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 결과일까. 결론적으로는 ‘아니다’에 가깝다. 상장사에 국한된 통계는 아니지만, 2016년 3월 말 기준 전자투표제를 이용한 회사 총 487곳 중 460곳은 ‘섀도보팅’을 요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자투표를 이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섀도보팅은 기업이 주주총회 성립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예탁결제원에 의결권 행사를 부탁하는 제도다. 한마디로 주총 개최를 위한 인원수를 채우려는 목적으로 기업들이 전자투표제를 이용한 셈이 된다.
공정위도 2015년부터 조사대상 상장기업들의 전자투표제 도입이 갑자기 늘어난 이유를 이 ‘섀도보팅’에서 찾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섀도보팅은 2015년 1월 폐지 결정이 났지만 전자투표제 도입회사 등에 한해 3년간 섀도보팅을 운영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줬다”며 “전자투표제 도입회사가 2015년부터 급증한 이유도 섀도보팅 유예기간을 누리기 위한 목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섀도보팅 유예기간의 경우 2017년 12월 31일부로 완전히 종료됐다. 금융위원회가 갑작스러운 섀도보팅 폐지에 따른 대안을 마련 중인 가운데, 섀도보팅이라는 ‘미끼’가 사라진 마당에 기업들이 전자투표제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미지수다.
집중투표제의 경우 소액주주들이 힘을 모아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이사를 선출할 수 있게끔 하는 제도다. 상법에서는 2인 이사의 선임을 목적으로 주총이 소집될 때 발행 주식총수의 3%(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는 1%) 이상에 해당하는 주식을 가진 주주가 집중투표의 방법으로 이사를 선임할 것을 청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재벌 총수들의 ‘거수기’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사회를 정상화할 수 있는 주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169개 상장사 중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곳은 7개(4.1%)에 불과하다.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된 제도가 아닌 이유로 전체 상장사의 94.5%가 집중투표제를 아예 못하도록 정관에서 배제하고 있는 탓이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상장사라도 집중투표제 방식으로 의결권이 행사된 경우는 최근 2년간 전무했다. 기업들은 “주주들이 집중투표제를 청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취지에 맞게 제도를 활용하려는 기업들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 역시 만만찮다.
총수의 지배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들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기업 내 총수 및 총수 일가의 지배력은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총수가 있는 21개 대기업집단의 소속회사 중 총수 일가가 1명 이상 이사로 등재된 회사의 비율은 2017년 17.3%(165개사)로 2013년 대비 8.9%포인트 감소했지만, 재벌 계열사 중 사익편취 규제대상 회사 및 주력회사에 이사로 등재된 비율은 모두 50%에 가까웠다. 총수들이 그룹 내 일명 ‘알짜회사’에만 집중적으로 이름을 올리고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대자동차, 한진, 금호아시아나, 부영, 영풍 등의 그룹들은 총수가 4개 이상 계열사에 이사로 등재돼 있다.
‘악용’ 지적 많았던 재벌의 공익재단
문재인 정부가 바라는대로 기업들 스스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면 전자투표제나 집중투표제의 자발적인 도입 등이 필요하지만, 2017년에 이 같은 제도들을 도입한 재벌기업은 SK그룹을 제외하곤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는 일단 3월 주총까지는 좀 더 기다려본다는 입장이지만,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경우 ‘강제적으로’ 제도 도입을 의무화하는 쪽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높다. 바로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의 통과 문제다. 김상조 위원장이 “공정위 혼자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공정거래법상 수단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타부처와의 긴밀한 공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언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재 대기업들은 누가 먼저 ‘총대’를 메는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며 “삼성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 재판 문제로, 현대자동차의 경우 중국발 판매부진 문제 등으로 셀프개혁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터라 다른 대기업들이 앞장서서 총대를 메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개혁을 화두로 꺼내들긴 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재벌들의 셀프개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김상조 위원장이 새해에도 “기업과 협의를 통해 진행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2017년처럼 마냥 기다리지는 않겠다는 게 정부의 포석이다. 재계에서는 공정위가 지난해 말부터 대기업의 공익재단과 지주회사 수익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서 찾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공익재단이나 지주회사 문제 모두 그간 ‘무풍지대’라고 불리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아온 게 사실”이라며 “주요 대기업의 경우 큰 ‘약점’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조사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업들을 압박하고 다그치기 위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월 2일 정부세종청사 공정위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경제개혁연대가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17년 7월 기준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중 20개 그룹이 42개의 공익재단을 운영 중이다. 이들 공익재단은 전체 84개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 중이고, 그 가치는 6조원이 넘는 것으로 분석됐다. 공익재단들이 보유한 지분가치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 삼성그룹의 공익재단들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 삼성문화재단, 삼성복지재단 등 3개의 공익재단을 운영 중인 삼성의 경우 이들 공익재단이 보유한 지분가치가 3조원에 달한다. 이 중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가장 핵심 계열사인 삼성생명 주식을 합계 6% 이상 가지고 있는 삼성생명공익재단·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이 이 부회장이다.
공정위가 공익재단 조사를 통해 어떤 결과를 발표할지, 조사내용을 근거로 어떤 제재에 나설지 등은 불분명하다. 재계 일각에서는 “공익재단 조사 자체가 월권”이라는 반발이 나오고 있고, 강제처분 등에 나서려면 법개정도 필요한 부분이어서 조사가 곧바로 제재로 이어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공정위가 공익재단 조사에 나서면서 재벌들이 향후 공익재단을 통해 추가적으로 계열사 지분을 늘리는 등의 편법을 쓰는 건 어려워질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만 해도 2016년 삼성SDI가 매각에 나선 삼성물산 주식 500만주 중 200만주를 사들여 논란이 된 바 있다. 당시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신규 순환출자고리가 형성되자 법률에 따라 삼성SDI가 가지고 있던 삼성물산 주식 500만주를 매각하라고 결정했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보유현금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수익 확보 차원”이라며 200만주를 사들였지만 사실상 이재용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 강화를 위한 조치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지주회사의 과도한 수익 추구 비판도
삼성SDI는 올해 9월까지 삼성물산 지분 404만주(2.11%)를 추가로 매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2017년 12월 공정위가 “삼성물산 합병 당시 삼성SDI의 삼성물산 보유지분 처분 결정이 잘못됐다”며 추가로 404만주를 매각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삼성은 겉으로는 “그룹 지배구조에 영향을 주는 물량은 아니다”라는 입장이지만 삼성물산의 경우 향후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과정에서 핵심 계열사에 해당해 지분 단 1%가 아쉬운 마당이다. 과거 같았다면 그룹 공익재단을 통해 삼성이 또다시 삼성물산 지분 확보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공정위가 공익재단을 뒤지고 있는 마당에 2016년처럼 공익재단에서 404만주 중 일부를 가져오기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전망이다.
지주회사 수익 문제의 경우 당초 설립 목적과는 달리 지주회사가 과도한 수익 추구를 통해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지주회사는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지배하는 목적만 가지는 회사라, 주요 수익원은 보유지분에 따른 배당금이 돼야 한다. 하지만 국정감사에서 기업별로 이른바 ‘상표권 수수료’ 명목으로 많게는 수천억원대의 돈을 지주회사가 계열사들로부터 받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 바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조사를 통해 지주회사 상표권 수수료 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날 경우 공시 개선안을 만드는 등 제도 정비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최재혁 팀장은 “공익재단이나 지주회사 문제 등은 재벌의 경제력 남용과 일감 몰아주기 문제와도 직결된 문제들이라 정책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지켜볼 방침”이라며 “공정위의 업무계획이 확정되는대로 올해 정부가 집중해야 할 재벌개혁 과제를 선정해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최대 관건은 정부가 ‘기존 순환출자고리 해소’ 등과 같은 극약처방을 쓸 것이냐의 문제다. 순환출자 문제의 경우 2014년 법이 개정되면서 신규 순환출자에 대한 규제만 이뤄지고 있다. 2014년 기준 16개 대기업에서 전체 483개에 달했던 순환출자고리는 2016년 초 기준 94개로 크게 줄어든 상태다. 이마저도 94개 순환출자고리 중 절대다수인 67개를 차지하던 롯데그룹이 지난해 말부터 지주회사 전환을 시작하면서 올 상반기까지 순환출자고리 대부분이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상조 위원장은 평소 “기존 순환출자 해소 논쟁은 재벌개혁에서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을 밝혀 왔다. 경제적 효과가 크지 않은 데 비해 정치적 논란만 가중되는 등 실익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올 초 <서울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올 상반기까지 다른 부처들의 제도 정비와 재벌들의 자체 개선 노력 등을 지켜보겠다”며 “우리 사회와 시장이 기대하는대로 재벌그룹들의 순환출자 개선이 안될 경우 과거의 결정(신규만 규제)에서 더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오른쪽)와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1월 3일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행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대한상공회의소 제공
삼성·현대차에 ‘극약처방’ 나올까
과거 김상조 위원장이 순환출자 문제의 주요 사례로 꼽아온 곳이 바로 현대자동차그룹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개의 순환출자고리를 안고 있는데, 현대자동차를 지배하고 있는 현대모비스가 그룹 순환출자고리의 핵심이다. 정몽구 회장의 경우 본인이 직접 보유한 현대차 지분 5.17%와 현대모비스 지분 6.96%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는 데 비해 경영권 승계자인 정의선 부회장의 경우 현대차 지분은 2.3%로 더 적고 현대모비스 주식은 하나도 보유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골드만삭스는 2017년 3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현대차가 지주회사 전환과 경영권 승계작업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 과정에서 순환출자 문제가 해소될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현대차는 최근까지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당장 순환출자를 해소하려면 최대 5조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한 것도 문제다.
김상조 위원장이 최근 순환출자와 함께 금산분리 강화 역시 언급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금산분리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숙제’로 꼽는 문제가 바로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주식 보유 문제다. 김상조 위원장 역시 지난해 초 재벌개혁 토론회에서 “금산분리 규제를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하려면 유독 보험업법에서만 계열사 주식 보유분을 시가가 아닌 취득가로 평가하도록 하는 것은 삼성그룹에 대한 특혜이며,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상조 위원장이 순환출자나 금산분리 문제를 거론한 것은 재계 서열 1·2위인 삼성과 현대차를 겨냥한 발언으로 봐야 한다는 게 재계 시각이다. 재계와 재벌을 동시에 상징하는 기업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정부 차원에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월 중순부터 진행될 예정인 부처별 업무보고에서 공정위가 어떤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을지도 주목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더 이상의 기다림은 재벌개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대 정부에서 봤듯이 정권 지지도가 높은 초기에 재벌개혁을 하지 않으면, 재벌들의 거센 저항으로 개혁이 실패했다”며 “이미 국회에 기존 순환출자 해소를 위한 법안이 발의돼 있는 등 재벌개혁의 적기인 만큼 정부가 구체적인 로드맵을 만들어 정책을 시행할 때”라고 밝혔다.
<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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