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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7) 한국적인 것의 발명과 국민 교육

ngo2002 2013. 9. 17. 10:32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7) 한국적인 것의 발명과 국민 교육

ㆍ민족교육의 이면엔 ‘체제순응적 국민’ 만들기

지난 7월 덕수궁 미술관에 ‘야나기 무네요시전’을 보러 갔다. 식민지 시기 조선과 그 문화에 애정을 지녔던 그의 수집품 전시는 2006년에 이어 두 번째다. 도자기·가구·회화·자수·목공예·금속공예 등 다양한 전시가 펼쳐졌다. 아직도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야기되는 건 식민지 시기에 그가 말한 선(線)과 비애미를 중심으로 한 ‘조선적인 것’의 자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지하는 1970년대에 “나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판하는 입장”이라고 선언하며 선, 비애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야나기의 미학관과 공식 결별을 고했다. 그리고 야나기와 구분되는 힘, 단절성, 투쟁성, 희극성 등을 지닌 남성적 문화가 한국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최근 국가정체성, 민족적 자긍심·우수성, 전통 등이 강조되고 있다. 한류, 한국전통, 한국문화 등이 문화상품 차원뿐만 아니라 국격, 국민의식 그리고 국민자긍심 고양 차원에서 언급된다. 한류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전통문화의 창조적 발전전략이 필요하다든지, 전통문화 진흥이 국가 정체성과 이미지를 형성하는 핵심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한편으로 교과서 논쟁이나 국사의 필수과목 지정 등을 둘러싼 논의 속에 등장하는, ‘민족의 뿌리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후세대가 나왔을 때 역사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라는 질문 뒤에 숨겨진 것은 체제순응적인 국민을 양성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반복적으로 민족자긍심, 국가정체성 등이 소환되는 역사적 기원에는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한 ‘한국적인 것의 발명’이 자리 잡고 있다.

■ 민족중흥과 국민 만들기

1960년대 후반부터 민족중흥, 민족문화, 국난극복사, 자기긍정적 민족사 등 다양한 ‘한국적인 것’이 발명됐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 직후 한국역사에 대한 박정희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즈음에 민족주체성의 회복을 모토로 한 ‘한국적인 것’을 강조하는 흐름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가 근대화를 위한 정신적 바탕을 만드는 제2경제론(1967), 국민교육헌장(1968)에서 ‘정신이 선도하는 물질문명’의 강조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6월 민족 주체성 확립, 새로운 민족문화 창조, 개인과 국가의 조화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 등의 이념을 담은 국민교육헌장 제정을 권오병 문교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5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선포식에 참석해 393자의 헌장 전문을 직접 낭독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0년대 후반 들어 정부와 지식인 모두 한국적인 것에 천착했던 이유 중 하나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이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재식민화의 공포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안보위기’와 더불어 근대화에 따른 광범위한 도시대중의 출현과 이들의 불만이 1971년 경기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번졌던 상황은 정부에 또 다른 위기감을 안겨줬다. 이에 따라 유신체제는 근대화에 따라 확산된 서구물질문명과 대중문화에 대한 검열과 통제를 확대하는 한편, 이를 대체하는 자기긍정적 민족문화, 민족중흥을 위한 민족사의 재해석, 민족영웅의 재발명 그리고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는 정신혁명을 통해 체제에 순응적인 국민을 만들고자 했다.

■ 국적 있는 교육의 창안

정신문화에 대한 강조는 민족중흥의 주체로 생산적, 효율적, 순종적, 윤리적 주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대규모 민족문화의 재발견과 연관된 사업들이 추진되면서 국적 있는 교육과 민족사관, 국난극복사관의 시각화를 통해 자폐적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일례로 ‘국적 있는 교육’을 살펴보자. 1969년 한국사학계 중진인 한우근, 이기백, 이우성, 김용섭은 ‘중고등학교 국사교육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을 통해 새로운 교과요목 시안으로 한국사 전 기간을 통해 민족주체성을 살리며, 민족사 전 과정을 내재적 발전방향으로 파악할 것을 강조했다. 정부도 ‘국적 있는 교육’에 기초한 민족사관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72년 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는 그간 국적 없는 교육을 실시해 막연한 세계인을 만드는 데 치중했다고 지적하면서,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인 8000명이 참석한 ‘총력안보를 위한 전국교육자대회’에서 국적 있는 교육을 지시했다. 제3차 교육과정에서는 교육과정의 기본 방향으로 민족주체의식 고양, 전통을 바탕으로 한 민족문화 창조, 개인의 발전과 국가 융성 조화 등을 제시해 국사의 위상은 급격하게 높아졌다.

■ 내재적 발전론, 문학사 시대구분론 그리고 실학

비슷한 시기에 정부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내재적 발전론, 근대문학사 그리고 실학 연구가 확산되며 독자적인 한국적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다. 먼저 역사학계는 1967년 한국경제사학회 논의를 시작으로, 한국사연구회가 결성되어 정체성론(停滯性論), 반도론 등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했다.

현재 내재적 발전론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1960년대 식민주의 역사학을 청산하기 위한 ‘학술문화운동’이자 새로운 역사학을 재건하기 위한 집단 운동으로 전개됐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식민지가 필연이라는 역사인식을 지양하면서 조선 후기사회 저변에 농민층이 분화해 새로운 경제주체가 등장했으며 독립수공업이 대두하는 등 이미 자본주의의 맹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내재적 발전론이 등장한 것은 북한과 일본의 영향도 있지만, 중요한 원인은 지식인들의 내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4·19 혁명이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 성립으로 유산됐다고 이들은 판단했다. 삼선개헌과 유신헌법 등 현재 역사는 퇴행하고 있지만, ‘조선 후기 역사의 발견’을 통해 민족의 내재적 발전 가능성을 확인함으로써 민족에 대한 허무주의가 걷히기를 원했다.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학에만 국한된 움직임은 아니었다. 국문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영·정조대를 근대문학의 태동기라고 주장하는 김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1973)가 발표됐다. 내재적 발전론의 논리에 근거해서 17세기 자본주의 맹아를 읽어낼 수 있었듯이, 문학사 시대구분론은 문학사로 재구성된 내재적 발전론이었다.

한국적인 것을 탐색하는 또 하나의 중요 매개는 실학(實學)이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부가 대규모 지식인을 충원해 엘리트 집단의 형성이 일단락되자 이들은 정부 주도 근대화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생산했다. 반면 권력 외부에 존재했던 지식인들은 글쓰기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자아를 실현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됐다. 즉 이들은 ‘근대화 비판(비평)’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은 단지 고전이 아닌, 근대적 정신이 배태된 사상으로 여겨졌으며, 이를 근거로 지식인들은 실학이 정체된 민족사라는 부정적 편견을 역전시킬 수 있는 매개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내재적 발전론이나 문학사 시대구분론을 주창한 논자들은 대부분 식민사학과 자립적인 발전이 부정된 역사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보편적인 역사’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 대표적 지식인인 조동일(1939년생), 김용섭(1931년생), 김지하(1941년생)는 유년과 청소년기에 전쟁과 빈곤, 전통이 부정당하는 시기를 체험했고 청년기에 4·19를 맞이했다. 이들은 빼앗긴 민족적 주체성·자긍심을 지적으로 복구하고 싶었을 테고, 이것이 이들 공통의 사상적 기반이 됐다. 그것은 민족사를 ‘정상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그 작업은 자신들 세대의 손으로 국가·민족의 학문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박감 속에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구성하고자 했던 한국적인 것의 핵심에는 ‘정지된 시간’인 17~19세기 전통 속에서 민족·평민적인 요소를 추출해 세계사적인 진보에 조응하도록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정부와 지식사회의 ‘한국적인 것’의 발명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국민교육헌장, 국정 국사교과서 채택과 국적있는 교육 그리고 유신 체제로의 전환을 ‘민족적 위기’라는 근거로 정당화했다. 내재적 발전론이 제기된 근거 역시 4·19가 부정되는 민족적 위기를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들 모두 정체된 민족의 역사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민족중흥과 내재적 발전 그리고 이를 담당할 주체를 발견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 다를지 몰라도 양자는 ‘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한 담론을 공유했다.

■ 국민 만들기를 넘어서

지난 8월 경주 통일전을 방문했다. 박정희가 경주개발을 지시한 뒤 만들어진, 재발견된 화랑의 대사당인 이곳은 지금도 엄청난 규모와 조경을 자랑하지만 이제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국적 인간형으로 환골탈태하려는 많은 학생들이 방문했던 통일전은 이제 만들어진 취지조차 알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통일전을 보며 1970년대 충무공 정신의 생활화를 위해 탄신일에 맞춰 진행된 ‘성지참배 고교대행군’이 생각났다. 1972년 4월29일 대한뉴스를 보면 충무공 탄신 427주년을 맞아 교련복에 소총으로 무장한 고교생들이 서울에서 문교부 장관과 서울시장에게 출발신고를 하고 현충사까지 야영을 하며 124㎞를 행군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국무총리인 김종필까지 참여한 대규모 행사였다. 통일전과 성지참배대행군은 민족중흥을 위해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국민을 육성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국사필수, 역사교과서 논란 그리고 민족자긍심 강조 등 유신시기의 흔적이 앞으로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현재까지의 역사교육은 유신과 제5공화국 시기의 자민족중심주의와 국사 위주 역사서술을 수정, 보완하는 과정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족사에 갇힌 ‘한국적인 것’을 강요하는 국민만들기 교육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내부의 차이를 적대시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인정하며, 민족 간 국경을 넘나드는 역사적 시야를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입력 : 2013-09-13 21:59:24수정 : 2013-09-13 2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