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개념으로 읽는 한국 근현대](1) 이용후생 : 중세의 균열을 알리다

ngo2002 2013. 3. 30. 10:54

[개념으로 읽는 한국 근현대](1) 이용후생 : 중세의 균열을 알리다

※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특징짓는 개념이 있게 마련이다. 개념은 지속성이 강하고 때론 폭발적인 파급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개념은 긴 호흡으로 역사를 조망하게 한다. 경향신문은 개념사를 연구해 온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과 함께 새 연재물 ‘개념으로 읽는 한국의 근현대’를 싣는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용후생’ ‘철학’ ‘자강’ ‘민주주의’ ‘공화’ 등은 언제 한국사에 등장했고, 근대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연재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에 깊이 있게 안내하는 또 하나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개념은 우리 의식의 심층에서 작동하는 시대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1899년 5월17일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가 개통되었다. 당시 전차는 큰 인기를 끌어 많은 사람들이 전차를 타기 위해 시골에서 서울로 몰려들기도 했다. 이 시기 이용후생의 핵심은 서양 문물 도입이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서학 이용하자” 박제가의 파격 제안
정조의 창조적 활용 거쳐 끝없는 변신
기존 질서 흔들고 근대를 향해 발아


▲ 바른 정치와 실용 조화롭게 결합
새 개념 만드는 건 우리와 미래의 몫


1786년(정조 10) 정월 22일 정조는 창덕궁에서 대신 이하 일반 관료들에게 개혁과 관련한 방책을 올리게 했다. 그리고 총 400여건의 글이 올려졌다.그 중 단연 눈길을 끈 것은 박제가(朴齊家)의 글이었다. 박제가는 “나라의 큰 폐단은 가난입니다. 이를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구체적 해결책으로 통상과 교역의 확대, 기계·제도·도서의 수용, 놀고 먹는 선비에 대한 개혁 등을 쏟아냈다. 그런데 “서양 사람은 이용후생에 정통하다. 그들을 초빙하여 각종 학문과 기술을 배우면 열 가지가 이득이고 천주교 한 가지만 손해이다. 그 문제는 서양 사람을 한 곳에 정착시키면 해결된다”라는 대목은 지금 읽어도 파격적이다. 당시에도 파장이 컸던 듯, 이 부분만은 판본에 따라 아예 삭제되기도 했다.이 개혁안은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0년 후에나 나온 개화론도 이와 다르지 않았으니 당시에는 오죽했으랴. 다만 우리는 이 파천황(破天荒)의 주장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과감히 올려질 수 있었던 정조대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서양의 학문과 기술 수용’이 ‘이용후생’을 빌려 설명되고 있음도 본다. 정조대에 이용후생이란 말은 가장 급진적인 개혁안을 품어줄 수 있는 개념이었다.

■ <서경>, 성리학자, 박지원의 이용후생

이용후생은 원래 <서경(書經)>에서 나온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순(舜) 임금의 신하 우(禹)가 순에게 아뢰길, “군주가 선정(善政)하고 양민(養民)하면 백성들의 덕을 바로잡는 정덕(正德), 백성들의 물화가 넉넉해지는 이용(利用), 삶이 윤택해지는 후생(厚生)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원문에서는 ‘선정, 양민, 정덕, 이용, 후생’이란 다섯 단어가 핵심이다. 곰곰이 보면 군주의 선정과 양민이 전제이고, 그 결과가 백성들의 정덕·이용·후생이다. 쉽게 말해 군주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잘하면 백성이 도덕적으로 변하고 삶이 윤택해진다는 소리이다.이 말을 성리학자들은 조금 다르게 변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성리학이 바라는 이상적인 정치는 군주의 바른 마음과 수신(修身)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가 민생의 안정이요, 물질의 풍요이다. 그래서인지 성리학자들은 이용후생을 인용하여 글을 쓸 때 ‘군주의 정덕이 원인이고, 그 결과가 양민이고, 양민의 효과가 바로 이용후생이다’라는 식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정조대에 일군의 학자들은 의미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비롯한 글에서 ‘이용해야 후생하고, 후생해야 정덕한다’라고 종종 강조하였다. 성리학자들의 용법에서 전제와 결과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박지원의 제자 박제가는 아예 이용후생을 뚝 떼어 ‘서학의 수용이 바로 이용후생이다’라고 주장했다. 박지원이 가치의 우선 순위를 바꾸자, 그 토대 위에서 박제가는 이용후생과 서학을 연결할 수 있었다. 박제가의 파격은 그런 연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정조대 부상하고, 고종대 부활하다

유독 정조대에만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조선왕조실록은 이용후생에 관한 흥미로운 경향을 보여준다. 실록에서 이용후생이 등장하는 사례는 총 28건이다. 정조 이전에는 5건으로 쓰임이 적었고, 정조 이후가 대부분이다. 그 중 정조대가 7건, 고종대가 11건으로 3분의 2에 육박한다.이 경향은 <일성록> 같은 다른 관찬 역사서를 첨가해보면 더 선명해진다. 두 사서를 합하면 이용후생은 총 74건으로 늘어난다. 그 중 영조 이전이 10건이고, 정조대 20건, 순조대 16건, 헌종·철종대 2건, 고종대 21건, 순종대 5건이다. 이를 보면 이용후생은 정조대 급작스레 사례가 늘어나고 순조대까지 여파가 이어지다가 헌종·철종대는 줄어들고, 고종과 순종대 다시 자주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들 수 있다. 이용후생은 원래 ‘정덕’과 짝을 이룬 개념이었다. 지금 ‘이용후생’을 한 단어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정덕’은 함께 사용되지 않았나? 실록에서 ‘정덕, 이용’ 혹은 ‘정덕, 후생’이 따로 쓰인 사례는 없었다. 다만 ‘정덕, 이용, 후생’이 함께 들어간 사례는 4건이었다. 그러면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정조대부터 자주 쓰인 이용후생은 정덕을 떼버리고 그냥 ‘이용후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용후생은 정조대부터 정덕에 거의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념화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물질 방면의 개선을 중시하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 안민에서 서학까지, 개화에서 부강까지

정조대에 쓰인 이용후생이 새로운 내용 일색인 것은 아니었다. 정조대의 용례를 보면 <서경>과 성리학 식의 용법이 2분의 1 정도이다. 나머지는 화폐, 물자유통, 도시민 육성, 수레와 수차 사용 등이다. 반 수 정도가 이전과는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하였다. 가장 급진적인 사례가 앞에서 본 박제가의 서양 선교사 초빙 주장이었다. 다양한 요구를 대하는 정조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정조는 모든 요구를 포괄하려 했다. 성리학적 가치를 포기할 수 없었고, 물질의 개선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굳이 표현하면 이용후생을 통한 생활 개선이야말로 성리학적 안민책의 핵심으로 생각했다는 정도랄까. 개혁안들이 꿈틀대고 국왕이 간접적으로나마 이를 반영하던 분위기는 순조대부터 위축되었다. 순조대에 이용후생의 사용은 줄지 않았다. 그러나 물질개선과 관련한 내용은 1건이고 나머지는 안민을 강조하는 전통적 용법 일색이다. 마치 정조대의 여파는 남아 있으나, 알맹이 빠진 그림자만 드리워진 느낌이다. 헌종과 철종대는 그마저도 사라졌다.하지만 이 현상은 어디까지나 실록과 같은 관찬 역사서만을 통해 볼 때의 일이다. 거기에서 포착되지 않는 재야의 학자들은, 비록 서학에 대한 탄압으로 주춤하기는 했지만, 다양한 차원의 이용후생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개화 의지가 표명되자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고종대는 워낙 급변하는 시기였던지라 용법의 변화가 극을 오갔다. 1879년(고종 16)까지는 전통적 용법과 물질 개선의 용법이 거의 반반이다. 마치 정조대와 비슷한 분위기이다.1882년(고종 19) 8월과 9월에는 서양의 기계와 서적, 각종 개화서를 구입하자는 내용이 서너 차례 나온다.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 이용후생을 내세워 개화를 역설한 사례이다. 조금 전인 1880년에는 이용사(利用司)가 설치되어 경리, 재용 등의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1898년(광무 2)까지 이용후생은 개화를 반대하는 논리로도, 정반대로 개화를 찬성하는 논리로도 사용되었다.

마지막 시기는 1899년부터 순종대까지이다. 이 때는 이용후생이 실업가 양성, 중등 교육 강화와 같은 주장의 수식어로 주로 동원되었다. 부국강병의 상징처럼 사용되면서 근대를 지향하는 정책과 결합한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용후생이 군대 해산의 명분으로 사용되는 등 알맹이 빠진 표어에 불과했다.

■ 이용후생의 마지막 변신

이용후생은 <서경>에서 나왔으므로 원래 용법 그대로, 성리학 식으로, 그리고 독자적으로도 사용되다가 마지막에는 근대화에 활용되었다.우리가 주목한 것은 세 번째 용법부터이다. 비록 원래 의도는 아니었지만, 정조가 경전의 개념을 물질 개선에 적극 활용한 순간, 이용후생은 새로운 용어로 탈바꿈하여 기존의 질서를 흔들었다. 실록에는 ‘(정조가) 이용후생과 백성들의 고통을 지나치게 살피니, 백성들이 임금께 의견을 올리는 상언(上言)이 참람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정조를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국왕이 내건 이용후생이 명분 질서를 균열시키는 장면을 지배층은 불안하게 보고 있었다.

이용후생의 네 번째 용법은 근대와의 결합이다. 여기서부터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용후생의 공식이 등장한다. 북학을 주장했던 박지원과 박제가가 내걸었던 개혁의 핵심 정신이 이용후생이라는 것이다. 이 정리는 물론 사실에 근거했지만, 이용후생이 이전 시기부터 장구하게 변화해왔음을 생략하게 한다. 단적으로 말해 ‘북학파의 이용후생’은 시야를 협소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점을 더 보기 위해서 이용후생과 비슷한 변신을 거듭한 실학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실학은 조선시대에는 ‘진실한 학문’ 정도의 보통명사에 가까웠다. ‘조선후기의 민족적이고 근대의 싹을 보여준 학문’으로 실학이 규정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 국학자들이 실학자들을 재해석하면서였다. 그리고 홍대용-박지원-박제가로 이어지는 학파를 실학 중의 북학파로 구분하고 그들의 정신을 이용후생으로 파악하였다. 이용후생 최후의 변신은 실학자, 그 중에서도 북학파와의 결합이다. 그것은 옛 사람들에 의한 규정이 아니라 20세기 이후의 규정이다.

왜 우리는 20세기에 이용후생을 다시 변신시켰을까. 지난 백년간 우리는 근대의 많은 기준을 서양에서 수용했다. 하지만 자체에서 성장해온 변화의 씨앗을 서양의 근대와 의식적으로 결합하여, ‘주체성 있는 근대’를 동시에 구상해 왔다. 그 구상에서 실학이나 이용후생은 중세의 질서에 틈을 내고 근대를 향해 발아하는 싹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필요충분은 아니다. 이용후생은 균열을 냈을 따름이지, 균열을 뚫고 자라나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몰랐다. 거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서양 근대를 의식하며, 방향성을 주입하였다. 이용후생의 마지막 변신은 ‘우리도 서양식의 근대를 준비하고 있었다’를 증명하고 싶은 현재의 요구가 만들어냈다.

앞으로도 이용후생은 변할 수 있다. 박지원 등이 경전의 핵심 정신을 자기 시대에 창조적으로 변용하고, 우리가 지난 백년간 이용후생을 근대 정신으로 변용했듯이, ‘바른 정치와 실용의 결합’에 기반을 둔 21세기의 새 개념을 만드는 일은 지금과 미래의 몫이다.

<이경구 |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교수>


 

입력 : 2013-03-29 20:39:33수정 : 2013-03-29 2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