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반

[매경시평] `융합`, 우선 나를 녹여라…

ngo2002 2012. 9. 1. 14:54

[매경시평] `융합`, 우선 나를 녹여라…
"자기 분야만 고집 말고 다른 분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융합이라는 화두는 말의 성찬에 머물 뿐"
기사입력 2012.04.01 18:23:45 | 최종수정 2012.04.01 18:26:27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작년 11월 하버드 경영대학원 강의실. "무슨 휴대폰을 쓰나요?" 학생들에게 물었다. 2005년 이후 매년 MBA 케이스 스터디를 진행하다 보니 이젠 학생들과도 제법 낯이 익어 수업 분위기는 캐주얼하다. 미국ㆍ한국산이 대다수, 그리고 극소수가 캐나다ㆍ대만산이다. 예상했던 답이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모두 한국 제품을 쓰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의아하게 나를 본다. "어느 휴대폰이건 핵심 부품은 모두 한국산 퓨전반도체입니다." 의아함이 놀라움으로 바뀐다.

"퓨전반도체가 미래를 지배할 겁니다." 2002년 ISSCC (반도체 최대 학회) 기조연설에서 `황의 법칙` 선언과 함께 했던 말이다. 정설로 여겨졌던 `무어의 법칙`을 깨고 반도체 용량이 매년 두 배 성장할 거라는 얘기도 당혹스러운데 웬 `퓨전반도체`? 4000여 청중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IT 암흑기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며 술렁거렸다.

당시에도 복합 칩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여러 종류 칩을 한 패키지 안에 물리적으로 결합한 이 제품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는 모바일 기기의 소형화, 다기능화 트렌드를 주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율 저하, 코스트 상승 등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융합 제품이 필요했다.

메모리, 로직, SW 등 각 부문에서 날고 긴다는 인력들을 차출하여 태스크포스를 꾸렸다. 분야별 최고 전문가들이 한 팀이 되어 융합 제품을 개발하는 일… 쉽지만은 않았다. 자기 영역에만 매몰되었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녹이고 벽을 허무는 데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1년여 산고(産苦) 끝에 이질적인 기능들을 화학적으로 융합한 최초 퓨전반도체, 즉 `하나`라는 의미를 품은 `원낸드`를 드디어 탄생시켰다. 2004년의 일이다.

2006년 나는 IT, NT, BT 등 이종 산업 간 융합이 활발히 이루어질 `퓨전테크놀로지`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또 다른 반도체 학회(IEDM)에서 발표했다. 이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융합`…, 자유전공이니 융합학과니 하는 한국에나 있을 법한 새로운 전공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신설되는 것만 봐도 가야 할 길인 건 분명한데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아카데믹한 접근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 전에 반드시 선행돼야 할 게 있다.

우선 열린 마음과 희생이다. 사회학자, 철학자, 과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만 놓는다고 인문과 과학 기술의 융합이 될까? 자기 분야를 내려 놓고 다른 분야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실천 없는 말의 성찬에 머문다.

물리적 환경도 중요하다. 세계 유명 대학에 가 보면 다양한 전공의 건물들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모습들을 흔히 본다. 스탠퍼드의 Y2E2 빌딩, UC 버클리의 CITRIS 빌딩 등이 좋은 예다. 건물 설계 단계부터 학제 간(Interdisciplinary)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백팩을 둘러맨 학생과 교수들은 흡사 노마드와도 같이 이곳 저곳을 분주히 움직인다. 융합학과는 없지만 어쩐지 융합이 잘 될 것만 같다.

우리나라에는 대학마다 수십 개의 부설 연구소가 있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으나 이들 간의 벽은 여전히 높다. 융합기술원, 융합대학원 등을 출범시킨 건 그래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들이 멜팅폿(Melting Pot)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는 운영의 묘에 달렸다. 이론도 정립되었고 환경도 어느 정도 갖춰졌다. 실천만 남았다.

세계 최고 융복합 선구자인 세종대왕을 새삼스럽게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의 융합 DNA는 탁월하다. 세계 유례 없이 주력 산업이 골고루 발달한 대한민국은 융합의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안 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우선 나를 녹여라(融). 합치는 건 그 다음이다. 그리고는 완전 연소하라. 진정한 `융합`이 눈 앞에 있다.

[황창규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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