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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사람]근대역사 숨결이 깃든 정동

ngo2002 2012. 6. 22. 14:07

[길에서 만난 사람]근대역사 숨결이 깃든 정동

정동길은 서울의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한제국의 탄생과 시대의 소용돌이, 그리고 민중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다.

지금도 근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정동은 서울 도심 속 ‘근대 유산 1번지’로 불린다. 정동은 유서 깊은 근대 유산의 내력을 소개하고 전해주는 박물관, 전시관, 미술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의 김종규 관장은 “덕수궁 둘레의 정동길이 우리 문화재와 역사를 되살리는 시민참여운동의 중심”이라고 강조한다. 100년의 근대 역사를 기억하고 덕수궁 대한문을 출발해 경향신문사까지 발걸음을 내디뎠다.

전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동길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늘어나고 있다.


역사문화 살아 숨쉬는 정동
정동길로 불리는 덕수궁을 빙돌아 경향신문사까지 길을 잡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주년을 맞이했던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노 대통령을 상징하는 노란색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기도 했다. 대한문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전 국민의 시선이 집중된 곳이 바로 이곳 덕수궁 대한문이다.

정동길의 출발지라 불리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지난 100년의 근대 역사의 알고리즘을 떠올려본다. 근대의 역사와 현대의 역사가 교차된다. 조선왕조 600년. 서울의 사대문은 서울 성곽으로 둘러쳐진 공간으로 도시 외곽과의 경계이자 중심지로서 하나의 커다란 광장으로 풀이된다. 특히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까지의 덕수궁은 우리 민족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서구 열강 등 외세는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여 정동의 둘레에 각자의 거점을 마련한다. 정동이 근대 역사의 중심으로 자리한 것은 개화기 때부터다. 1883년 미국 공사관이 처음 정동에 들어서면서, 정동은 서양세력의 주요 근거지가 된다. 외교 각축을 벌이던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각국의 공관이 정동에 차례로 들어선 것이다.

정동은 하나의 커다란 역사 문화의 광장
19세기 말 정동의 둘레는 하나의 커다란 광장(廣場)으로 해석된다. 정동은 덕수궁을 중심으로 빙 둘러 하나의 커다란 광장의 구조를 형성한다. 정동길을 따라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고 외교가로 변모해 간다. 또한 자연스럽게 근대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수용되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조선 고종 37년, 광무4(1900)년쯤의 서울 모습. 영국 왕립아세아협회가 소장한 지도로, 1902년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서양에 소개해 널리 알려진 지도다. | 문화유산국민신탁 제공


외국인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고 발을 디딘 곳이 정동이다. 정동에 외교가가 형성되면서 뒤이어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와 교육, 의료활동을 펼친다. 이에 따라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서양식 교육기관과 종교시설, 의료시설 등도 잇달아 들어섰다. 현재 정동길은 서대문 터 근처인 경향신문사에서 시작돼 덕수궁 대한문 앞까지이다. 경향신문사 사옥과 이웃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는 1894년 외교관들의 사교모임인 외교구락부가 있었다. 또 20m쯤 내려간 맞은편 창덕여중에는 프랑스 공사관이 있었다.

외교 공관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옛 러시아 공사관이다. 1890년 완공된 러시아 공사관은 정동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외교관과 병사들을 위한 러시아 정교회가 지금의 경향신문 사옥 자리에 세워졌고, 공사관 앞에는 한국 최초의 수녀원도 있었다.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자리에 있던 손탁호텔 역시 정동 거리에서 한 획을 그은 명소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사립교육기관인 배재학당 터(지금의 배재공원)와 서울시립미술관은 유달리 변화가 많았던 곳이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는 최초의 민간 신문사인 독립신문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과 함께 정동을 근대 언론의 발상지로 만들었다.

민간기금으로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하는 법인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의 김종규 이사장.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은 덕수궁 앞에서 광화문까지, 그리고 넓게는 사대문 앞까지의 공간이다. 지금의 서울시청 앞 시민광장 자리에는 늘 나라를 걱정하는 민중이 모여들었다. 민중은 덕수궁 앞 광장에 모여 당시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안위와 나라를 걱정했다. 덕수궁을 중심으로 많은 민중의 활동이 있었다. 정동교회는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지였다. 이곳에서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등사되었고, 당시 담임목사였던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는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어 있던 인물로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1885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교육 기관인 배재학당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소설가 나도향, 시인 김소월, 한글학자 주시경, 독립운동가 지청천 등을 배출한 곳이다.

1919년 3월 3일, 대한문 앞에는 수많은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고종황제의 승하는 3·1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1919년의 3·1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춰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당시 정동은 길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광장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이 광장에서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으며, 그때마다 민중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 대한문 앞에 자리한 서울광장은 약 90년 전 민중의 함성이 촉발된 시민광장과 다름 아니었다. 프랑스의 바스티유 광장이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후 지금까지 시민을 대변하는 것처럼, 대한제국을 상징하던 덕수궁 앞은 어쩌면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광장으로서 바로 대한제국의 자주적 의지와 우리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장소인 것이다.

근대 유산 1번지로 불리는 정동은 유서 깊은 근대 문화유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위 _ 구세군중앙회관, 아래 _ 경향신문사 전경.


정동길은 서울의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한제국의 탄생과 시대의 소용돌이, 그리고 민중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다. 덕수궁은 고종이 승하한 뒤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해 궁역을 크게 줄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남았다. 일제는 많은 전각을 철거해 공원으로 조성했고, 현재의 덕수궁은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됐다.

철도와 전화, 신문 등 서양의 문물과 문화가 처음 들어온 곳이 정동이다. 어쩌면 근대의 역사적인 중심지인 정동을 중심으로 한 언론사의 태동과 배경은 당연한 것이다. 현대에 들어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주요 신문사 등 언론과 방송이 정동에 자리한 것 역시 그러한 까닭일 것이다.

다 같이 돌자, 정동 한바퀴
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 정동길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늘어나고 있다. 정동처럼 좁은 지역에서 100년 동안의 수많은 사건과 역사의 현장을 간직한 곳도 드물다. 덕수궁을 빙돌아 정동길을 걷다보면 한순간도 역사의 숨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를 가든 근대 100년 동안 이 거리에 당시의 역사와 목소리가 남아 있고, 민초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의 김종규 이사장은 “이러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다음 세대에 문화재로 남겨야 한다”며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시민이 지켜나가기 위한 신탁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 달에 1만원씩(청소년은 3000원)의 기부를 통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문화유산 보존사업에 동참하는 시민회원이 3000명에 달한다. 시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회원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민간기금으로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하는 법인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시민이 직접 참여하고 지켜나가는 문화재 보호의식을 확산하고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는 시민회원의 참여를 기다린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문화재청 주관으로 5월 26일부터 27일 이틀간 ‘다같이 돌자 정동 한바퀴’ 행사를 펼쳤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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