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사람]희망의 이름으로, 솟을 새의 비상
솟대는 본래 우리 민족의 원형적인 심상인 기다림과 희망의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솟대문화공간에 들르는 많은 관람객들이 비교적 쉽게 솟대의 조형미와 문화적인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라는 것이다.
제천 청풍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 한편에 능강 솟대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비단에다 수를 놓았다는 금수산을 병풍으로 두르고, 앞으로는 한반도 형상의 청풍호 물줄기가 흐르는 솟대문화공간에는 ‘희망의 메신저’라 불리는 솟을 새들이 하늘로 비상한다. 온종일 해가 비추는 그 희망의 자리에 하늘로 비상하는 새들의 군무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한 폭 그림 속의 솟대를 만나다
솟대문화공간 윤영호 관장의 작업은 단순한 예술적 노동으로 한정할 수 없다. ‘희망솟대’라 명명된 솟대문화공간은 그래서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작품임과 동시에 각각의 작은 새 한 마리 역시 마땅한 제 자리가 정해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작업은 온전히 자연과 합일되어 일체를 이루어내며 또 이미 지나간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삶과 미래의 희망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그는 1985년까지 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면서 화가 천경자 등 우리나라 미술계 원로작가들의 전시기획을 담당했던 1세대 미술인 중 한 명이다. 그러던 그가 잘 나가던 당시 미술관 관장 자리를 내어놓고 솟대에 빠지게 된 이유가 있다. 그는 85년께 서양미술가 고 권옥연 선생의 ‘산마을’이란 작품 속에서 장대 위에 앉은 작은 새 한 마리를 만난다. 그 우연한 솟을 새가 그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날갯짓이 된 것이다.
“솟대는 기다림의 이미지이며, 하늘로 오르는 희망의 솟구침입니다. 장승과 함께 우리 땅 마을 어귀에 세워진 솟대는 희망의 메신저였습니다. 삼한시대에는 성지인 소도에 솟대를 세워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신의 영역에서 인간이 보내는 메시지를 전하는 안테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장대 끝에 앉은 솟을 새 한 마리는 인간이 신에게 보내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솟대는 본래 우리 민족의 원형적인 심상인 기다림과 희망의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솟대문화공간에 들르는 많은 관람객들이 비교적 쉽게 솟대의 조형미와 문화적인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라는 것이다. 어느 때인가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곳에 들러 “바로 이곳이 소도이며, 바로 이곳이 동선경”이라 일컬으며 몇 자의 글귀로 흔적을 남겨두기도 했다.
그가 처음 솟대를 접한 것은 그림 속의 이미지였다. 그 이후 그는 지금까지 거의 30년 동안 오로지 솟대작업에만 매달린다. 마음 속에 각인된 이미지를 자신의 전공인 조형작업을 통해 되살려내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 속 솟대의 이름은 희망솟대였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들의 꿈과 희망을 나누는 희망의 동산을 마음에 두고 희망솟대 공간을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의 판교신도시 광교산 자락에 오두막을 짓고 솟대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나무새에 빠져버려 반 미친 놈’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새나 깎고 앉아 있으니. ‘돈이 나와 밥이 나와’라며 질책과 염려가 따랐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나누는 것만큼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 이유만으로 그는 오로지 솟대를 세우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고서도 한동안 그는 솟대의 실제 형상을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그림 속 풍경에서 날아오르던 솟을 새의 이미지만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 틀을 깨고 새로운 나래를 펴다
“처음에는 나무를 깎아 솟대를 만들고 세우면서 기존 전통방식의 솟대 형상에서 벗어나지 못함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인위적이고 정형화된 틀 안에 새들이 갇혀 있는 모양이니 힘이 없었습니다. 예부터 전해오던 작업방식은 하나이건 열 개이건 나무를 깎아 세우는 것으로, 전국적으로 비슷한 형상이었습니다.”
당시 전통적인 솟대의 형상은 모두 공통적인 이미지와 작업방식을 고수하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지역적 특성이 다소 존재했으나, 비슷한 조형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천 년 이어온 전통 작업방식의 한계를 넘고자 미술인의 창작적 관점으로 솟대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의 조형성과 미래지향적인 이미지의 솟대로 형상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특히 정형화되고 정적인 이미지로 굳어버린 듯한 솟대의 한계성을 탈피하고, 지금 시대의 우리의 모습과 삶 속에 담긴 문화와 역동성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특히 보다 힘차게 하늘로 차고 오르는 새의 역동성, 비상하는 추진력을 지닌 소재를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맨 먼저 자연 그대로의 소재에서 솟대의 형상을 찾기로 한다. 형상 자체가 지닌 자연의 소재 그 자체의 조형성에서 역동적인 솟대의 조형미를 찾으려 한 것이었다. 그러다 처음 발견한 것이 바로 칡넝쿨이었다. 넝쿨나무의 꼬임 형태, 즉 일종의 스쿠르 형태의 조형미 속에서 땅을 박차고 오르는 역동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칡을 캐어 작업을 하기 위해 높고 깊은 산골짜기를 오르고 또 오르는 거의 심마니 수준의 산행을 해가며 작업에 몰두한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그러한 온전한 솟대의 형태를 안고 있는 칡넝쿨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고, 조형적 재료로서의 한계에 다시 부딪히게 된다.
자연에서 찾은 미래지향적 솟대의 나랫짓
그렇게 높은 산속을 헤매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보물과 같은 자연이 준 선물을 발견하게 된다. 흔히 옛 어른들은 이것을 ‘부엉이 방구통’이라 부르던 것이 그의 눈에 띈 것이다.
“고산지대의 소나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죽어가는 나뭇가지에 툭 불거진 혹이 생기는데, 바로 부엉이 방구통이라 불립니다. 아직도 나이 지긋한 관람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솟대를 보고 ‘부엉이 방구통으로 만들었구먼’ 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이야기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옛날부터 이 부엉이 방구통이 집안으로 들어오면 집안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래서 대갓집에서는 큰 부엉이 방구통을 반으로 갈라 쌀뒤주에 넣고 바가지로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즉 화수분처럼 쌀이 줄지 않아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옛 선비들의 그림에 부엉이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부(富)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부엉이 방구통은 그 모양 그대로의 소재 속에 새의 형상이 숨어 있었고, 재미있는 이야기와 많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독특한 소재였다. 이후 그는 부엉이 방구통을 기본으로 솟대를 세우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이미 죽어가던 나뭇가지의 혹을 떼내어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담아 희망의 솟대를 세우는 작업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형상에서 인간의 희망이 어우러져 하나의 하모니를 이뤄 희망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희망솟대의 철학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수천년의 삶 속에 맥을 이어온 과거 전통적 형태의 솟대를 기본으로 현재의 문화와 미래의 희망을 아우르는 솟대의 창작에 몰두하며 모든 열정을 쏟는다. 그리고 2004년부터는 제천에 국내 유일한 솟대 테마공간인 능강 솟대문화공간을 마련하고 작업에 몰두한다. 이후 그는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주제 작품인 ‘열풍변주곡’이란 작품으로 개막식에서 하이라이트로 장식하며 국제적인 미술행사에서 솟대를 한국을 대표하는 조형물로 높이 세우게 된다.
“솟을 새의 생명력을 담아 역동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통해 자연적이면서도 비정형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 바로 우리의 솟대입니다. 솟대는 지난 2004년 세계박물관협회 총회에서 대한민국 문화를 대표하는 공식 상징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솟대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알리고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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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 청풍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에 자리잡고 있는 솟대문화공간 전경. |
제천 청풍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 한편에 능강 솟대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비단에다 수를 놓았다는 금수산을 병풍으로 두르고, 앞으로는 한반도 형상의 청풍호 물줄기가 흐르는 솟대문화공간에는 ‘희망의 메신저’라 불리는 솟을 새들이 하늘로 비상한다. 온종일 해가 비추는 그 희망의 자리에 하늘로 비상하는 새들의 군무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한 폭 그림 속의 솟대를 만나다
솟대문화공간 윤영호 관장의 작업은 단순한 예술적 노동으로 한정할 수 없다. ‘희망솟대’라 명명된 솟대문화공간은 그래서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작품임과 동시에 각각의 작은 새 한 마리 역시 마땅한 제 자리가 정해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작업은 온전히 자연과 합일되어 일체를 이루어내며 또 이미 지나간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삶과 미래의 희망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그는 1985년까지 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면서 화가 천경자 등 우리나라 미술계 원로작가들의 전시기획을 담당했던 1세대 미술인 중 한 명이다. 그러던 그가 잘 나가던 당시 미술관 관장 자리를 내어놓고 솟대에 빠지게 된 이유가 있다. 그는 85년께 서양미술가 고 권옥연 선생의 ‘산마을’이란 작품 속에서 장대 위에 앉은 작은 새 한 마리를 만난다. 그 우연한 솟을 새가 그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날갯짓이 된 것이다.
“솟대는 기다림의 이미지이며, 하늘로 오르는 희망의 솟구침입니다. 장승과 함께 우리 땅 마을 어귀에 세워진 솟대는 희망의 메신저였습니다. 삼한시대에는 성지인 소도에 솟대를 세워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신의 영역에서 인간이 보내는 메시지를 전하는 안테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장대 끝에 앉은 솟을 새 한 마리는 인간이 신에게 보내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솟대는 본래 우리 민족의 원형적인 심상인 기다림과 희망의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솟대문화공간에 들르는 많은 관람객들이 비교적 쉽게 솟대의 조형미와 문화적인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라는 것이다. 어느 때인가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곳에 들러 “바로 이곳이 소도이며, 바로 이곳이 동선경”이라 일컬으며 몇 자의 글귀로 흔적을 남겨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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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까지 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던 1세대 미술인 윤영호 솟대문화공간 관장은 서양미술가 고 권옥 연 선생의 ‘산마을’이란 작품 속에서 장대 위에 앉은 작은 새 한 마리를 만나면서 솟대에 빠지게 됐다. |
그가 처음 솟대를 접한 것은 그림 속의 이미지였다. 그 이후 그는 지금까지 거의 30년 동안 오로지 솟대작업에만 매달린다. 마음 속에 각인된 이미지를 자신의 전공인 조형작업을 통해 되살려내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 속 솟대의 이름은 희망솟대였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들의 꿈과 희망을 나누는 희망의 동산을 마음에 두고 희망솟대 공간을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의 판교신도시 광교산 자락에 오두막을 짓고 솟대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나무새에 빠져버려 반 미친 놈’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새나 깎고 앉아 있으니. ‘돈이 나와 밥이 나와’라며 질책과 염려가 따랐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나누는 것만큼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 이유만으로 그는 오로지 솟대를 세우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고서도 한동안 그는 솟대의 실제 형상을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그림 속 풍경에서 날아오르던 솟을 새의 이미지만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 틀을 깨고 새로운 나래를 펴다
“처음에는 나무를 깎아 솟대를 만들고 세우면서 기존 전통방식의 솟대 형상에서 벗어나지 못함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인위적이고 정형화된 틀 안에 새들이 갇혀 있는 모양이니 힘이 없었습니다. 예부터 전해오던 작업방식은 하나이건 열 개이건 나무를 깎아 세우는 것으로, 전국적으로 비슷한 형상이었습니다.”
당시 전통적인 솟대의 형상은 모두 공통적인 이미지와 작업방식을 고수하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지역적 특성이 다소 존재했으나, 비슷한 조형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천 년 이어온 전통 작업방식의 한계를 넘고자 미술인의 창작적 관점으로 솟대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의 조형성과 미래지향적인 이미지의 솟대로 형상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특히 정형화되고 정적인 이미지로 굳어버린 듯한 솟대의 한계성을 탈피하고, 지금 시대의 우리의 모습과 삶 속에 담긴 문화와 역동성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특히 보다 힘차게 하늘로 차고 오르는 새의 역동성, 비상하는 추진력을 지닌 소재를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맨 먼저 자연 그대로의 소재에서 솟대의 형상을 찾기로 한다. 형상 자체가 지닌 자연의 소재 그 자체의 조형성에서 역동적인 솟대의 조형미를 찾으려 한 것이었다. 그러다 처음 발견한 것이 바로 칡넝쿨이었다. 넝쿨나무의 꼬임 형태, 즉 일종의 스쿠르 형태의 조형미 속에서 땅을 박차고 오르는 역동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칡을 캐어 작업을 하기 위해 높고 깊은 산골짜기를 오르고 또 오르는 거의 심마니 수준의 산행을 해가며 작업에 몰두한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그러한 온전한 솟대의 형태를 안고 있는 칡넝쿨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고, 조형적 재료로서의 한계에 다시 부딪히게 된다.
자연에서 찾은 미래지향적 솟대의 나랫짓
그렇게 높은 산속을 헤매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보물과 같은 자연이 준 선물을 발견하게 된다. 흔히 옛 어른들은 이것을 ‘부엉이 방구통’이라 부르던 것이 그의 눈에 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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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솟대는 기다림의 이미지이고, 하늘로 오르는 희망의 솟구침이다. 솟대문화공간에서 볼 수 있는 솟대들의 모습. (왼쪽 아래)솟대문화공간에서 내려다보이는 청평호. |
“고산지대의 소나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죽어가는 나뭇가지에 툭 불거진 혹이 생기는데, 바로 부엉이 방구통이라 불립니다. 아직도 나이 지긋한 관람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솟대를 보고 ‘부엉이 방구통으로 만들었구먼’ 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이야기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옛날부터 이 부엉이 방구통이 집안으로 들어오면 집안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래서 대갓집에서는 큰 부엉이 방구통을 반으로 갈라 쌀뒤주에 넣고 바가지로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즉 화수분처럼 쌀이 줄지 않아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옛 선비들의 그림에 부엉이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부(富)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부엉이 방구통은 그 모양 그대로의 소재 속에 새의 형상이 숨어 있었고, 재미있는 이야기와 많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독특한 소재였다. 이후 그는 부엉이 방구통을 기본으로 솟대를 세우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이미 죽어가던 나뭇가지의 혹을 떼내어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담아 희망의 솟대를 세우는 작업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형상에서 인간의 희망이 어우러져 하나의 하모니를 이뤄 희망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희망솟대의 철학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수천년의 삶 속에 맥을 이어온 과거 전통적 형태의 솟대를 기본으로 현재의 문화와 미래의 희망을 아우르는 솟대의 창작에 몰두하며 모든 열정을 쏟는다. 그리고 2004년부터는 제천에 국내 유일한 솟대 테마공간인 능강 솟대문화공간을 마련하고 작업에 몰두한다. 이후 그는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주제 작품인 ‘열풍변주곡’이란 작품으로 개막식에서 하이라이트로 장식하며 국제적인 미술행사에서 솟대를 한국을 대표하는 조형물로 높이 세우게 된다.
“솟을 새의 생명력을 담아 역동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통해 자연적이면서도 비정형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 바로 우리의 솟대입니다. 솟대는 지난 2004년 세계박물관협회 총회에서 대한민국 문화를 대표하는 공식 상징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솟대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알리고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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