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옛사람들이 생각한 좋은 물
내 고향 백운의 ‘익산바우’ 아래, 여름이면 손이 시린 샘이 있었다. 아버지는 여름이 되어 첫물 풋고추를 따오면 ‘익산바우’ 샘물을 길어오게 했다. 그 시원한 샘물에 밥을 말아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넓지 않으므로 물이 어느 곳이나 흔했다. 그래서 ‘흔전만전 물 쓰듯 한다’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물을 사먹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물을 사먹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고, 생수 시장이 번창하고 있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어떤 물을 좋은 물이라고 여겼을까? 송강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이 지은 <기옹만필>에 그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일학 노숙은 불문의 종사이다. 오대산에 입정해 근 50년이나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젊어서 율곡을 따라 산천 구경을 떠났다. 한 곳을 지나다가 돌구멍에서 나오는 샘물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서 물을 마셨다. 율곡도 한 모금 마시고는 ‘이 물은 둘도 없는 맛이다’ 하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조금도 특이한 것을 몰랐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저 물은 맑은 것이 좋은데, 맑으면 무게가 무겁다. 흐린 물은 비록 모래와 진흙이 섞였더라도 무게는 맑은 물을 따르지 못한다’ 하였다. 같이 가던 사람들이 다투어 시험해 보았다. 과연 그 물의 무게가 다른 물의 두 배나 되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만물의 이치에 모르는 것이 없음이 다 이러한 것을 알았다.”
율곡뿐만이 아니라 황희 정승을 비롯한 조선의 사대부들도 대부분 물을 길어다 무게를 달아 무거운 물을 먹었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의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 ‘절 샘’ 편에도 좋은 물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절 샘, 봉갑사 터 앞에 있는 샘, 봉갑사에서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보성골 원님이 고을의 좋은 물들을 다 길어 오도록 하여 무게를 달아보니 이 샘의 물이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갔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가끔씩 묻는다. “흐리고 탁한 물과 맑고 깨끗한 물 중 어느 물이 더 무거울까?” 환경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도 백에 아흔아홉은 “흐린 물이 부유물질이 많이 섞여 있어 더 무거울 것”이라고 말한다. 물에 대한 선인들의 상식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에 대한 서양식 이해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선인들은 어떤 자세로 물을 대했는지, 또 어떤 물을 좋은 물이라고 여겼는지, 이런 내용을 교과서에 실어 동서양의 물에 대한 인식을 함께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입력 : 2012-06-14 21:23:25ㅣ수정 : 2012-06-14 21: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