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의 터줏대감들, 표지는 낡아도 이야기는 낡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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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기자
‘남과 북’ 고민하는 지식인, 출간 당시엔 충격
아이의 눈으로 본 이데올로기의 비극
장마 윤흥길 1980년 첫 출간돼 지금까지 20만 부 넘게 팔렸다. 해마다 1만 부 이상 팔린다. 표제작 ‘장마’를 포함, 10편을 모은 중·단편 소설집이다. ‘장마’는 각각 국군 장교 아들, 빨치산 아들을 자식으로 둔, 한 지붕 아래 사는 두 사돈 간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토착 공동체적 유대가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골을 뛰어넘을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 작품이다.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보여주는 형식을 취했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는 소설 형식과 분단·통일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제시한 ‘교육적인 내용’ 등 교과서에 실릴 만한 요건을 두루 갖췄다. 실제로 여러 고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됐고, 그에 따라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판매 주춤하다 드라마 ‘허준’이 되살려내
소설 동의보감(전 3권) 이은성 문학적 상상력으로 전통 의학서를 소설로 재구성해 ‘대박’ 난 사례. 출판사에 따르면 한창 반응이 폭발적일 때는 제본소 앞에 트럭을 대기시켰다가 책을 받아 올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의 성공은 이념 지향으로 경직됐던 1970~80년대 문학과 달리 ‘순수한 재미’를 추구하는 90년대 문학의 한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저자는 소설 쓰기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드라마 집필을 통해 쌓인 필력을 발휘해 일을 냈다. 『소설 토정비결』 등 전통 고전의 소설화 유행을 일으킨 원조 격이기도 하다. 90년대 후반 판매가 주춤했으나 99년 드라마 ‘허준’ 바람으로 되살아났다. 90년 첫 출간돼 332만 부가 팔렸다. 한 해 평균 2만3000부가 팔린다.
1980년대 대학가 필독서 … 700만부 팔려
태백산맥(전 10권) 조정래 집필 기간만 6년, 200자 원고지 1만6500장 분량인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공식 역사’에서 누락된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려는 1980년대 지식인들의 욕구와 맞물려 독서 열풍에 불을 붙였다. 48년 여수·순천 사건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순천·벌교 일대에서 벌어진 빨치산 투쟁 등 좌·우 극한 대립을 다뤘다. 걸쭉한 육담과 사투리가 읽는 재미를 더한다. ‘민감한 역사’를 건드린 죄로 94년 작가 조정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했으나 2005년 검찰에 의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무혐의 처분 이유는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표현들이 산재해 있으나 예술작품으로서 객관적·미학적 가치를 얻었고, 그 정도 표현은 국민이 자유 토론과 비판 과정을 통해 여과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올 3월, 1권 기준 200쇄를 찍었고, 10권 전체로는 700만 부가 팔렸다.
새로운 문체, 우화적 분위기로 검열 피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오른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다. 1978년에 처음 출간돼 지금까지 247쇄, 105만 부가 팔렸다. 단편 12편을 묶은 연작 소설집인 『난쏘공』은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역설적인 명칭의 주소지에 사는 난쟁이 김불이 가족을 중심으로 재개발로 인해 변두리로 밀려나는 도시 빈민들의 삶을 그렸다. 대학신문에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됐던 유신 말기, 평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소설은 사회과학도들이 먼저 찾아 읽었다고 한다. 접속사 없이 단문을 연속 배치해 단절감을 주는 이른바 ‘스타카토 문체’, 우화적인 분위기 등 형식 실험에서도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새로운 글쓰기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우회로였다.”(우찬제 서강대 국문과 교수) 당국의 ‘칼질’을 피하려다 보니 참신한 작품이 나왔다는 것이다. 메시지에서나 표현 방식에서나 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소록도를 둘러싼 자유·지배욕의 충돌 그려
당신들의 천국 이청준 1970년대 대학가에서 『광장』 『난쏘공』 등과 함께 시대를 고민하는 진지한 대학생의 필독서였다. 지난해 타계한 작가 이청준은 60년대 중반 소록도에서 실제로 발생한 나환자들의 반란 사건에서 ‘당신들의 천국’을 착상했다. 소설은 선의에서 시작한 소록도 낙원 건설 사업이 처음 ‘기획자-협력자’이던 원장과 나환자들 간의 관계가 차츰 ‘지배자-피지배자’ 간의 적대적인 관계로 변질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이런 내용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견디자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하향식 개발독재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빗대어 풍자하는 문학 표현 방식)로 읽혔다.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선도하거나 이끌어야 할 대상이 눈앞에 주어졌을 때 과연 그들의 자유를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인지, 내 선의의 이면에 자리 잡은 지배욕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지 등에 대한 쉽지 않은 질문도 던진다. 76년에 초판 발행돼 2003년 100쇄를 찍었다. 지금까지 115쇄, 29만 부가 팔렸다. 매년 1만 부씩 나간다.
외톨이 연어의 힘찬 도전, 청소년층도 환호
연어 안도현 어른을 위한 성장동화로 기획됐으나 청소년으로 독자층이 번지면서 장수하고 있다. 1996년 첫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110쇄, 82만 부가 팔렸다. 최근 3년간, 한 해에 5만~6만 부씩 팔린다. 이런 성공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책은 다른 연어들과 달리 몸 색깔이 은색이어서 외톨이로 지내던 은빛 연어가 우여곡절 끝에 남들보다 먼저 초록강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성장 스토리다. 신념에 따라 도전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강력한 자기 최면의 메시지, 심금을 건드리는 코드 등을 두루 갖춰 시장의 반응을 끌어냈다는 평가다(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 학교·대형 서점 등의 각종 ‘추천 도서 리스트’에 단골로 포함되면서 꾸준한 판매로 이어지고 있다.
대입 논술용 추천도서 리스트의 힘
문학 작품 ‘스테디셀러’에 대한 통일되고 확립된 기준이나 정의는 없다. 출판사마다 분류 기준이 제각각이라고 봐도 된다. 가령 민음사의 장은수 대표는 “1년에 1쇄 이상 꾸준히 찍는 정도가 4, 5년 이상 지속되면 스테디셀러로 본다”고 답했다. 문학평론가 황종연씨는 “스테디셀러의 기준은 매우 유동적”이라며 “(한 해에 얼마나 팔리는지) 부수에 구애 받지 않고 독자의 수요가 지속적인 작품들을 스테디셀러로 상정해도 무방하다”고 밝힌 바 있다.
문학과지성사·문학동네·민음사·창비 등 문학 전문 출판사 네 곳으로부터 추천 받은 결과 한국 문학의 스테디셀러는 1970, 80년대 이념 지향 서적에서 90년대 이후 순수한 재미와 감동을 좇는 쪽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다만 70, 80년대 문학작품의 경우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 대한 우회적인 분노 표출의 경로로서 인기를 얻었더라도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요소를 갖춰야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전문가들은 2000년대 들어 대학 입시에서 논술의 비중이 커지면서 이에 도움이 되는 이른바 권장 도서 내지는 추천 도서 리스트에 포함되는 게 스테디셀러의 결정적인 요건이라고 말한다.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는 “리스트에 포함되며 입소문이 퍼진 책들이 스테디셀러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출판인은 “요즘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책들이 스테디셀러가 된다”며 “그런 의미에서 성인 독자들의 자발적 독서에 의한 순수 스테디셀러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분히 한국적인 ‘스테디셀러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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