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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53. 조선왕조 오백년을 지켜온 서울-(5)한이 서린 경복궁

ngo2002 2011. 10. 4. 11:01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53. 조선왕조 오백년을 지켜온 서울-(5)한이 서린 경복궁
입력시간 : 2011. 09.05. 00:00


황후 시해·아관파천 상처 왕궁 운명 막내려

옛 모습 복원으로 '천년의 궁궐' 자리매김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조선 왕조 제일 법궁

경복궁은 조선의 서러운 한이 서린 정궁이다. 태조가 서울을 도읍지로 결정한 이후부터 경복궁은 조선의 왕궁이었다.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의 병화로 조선인에 의해 처참하게 불탄 이후 273년간 무서운 몰 꼴을 보여주며 잡초만 무성했다. 사람의 발길이 끈긴 그곳에는 대낮에도 호랑이가 출몰했다고 한다.

나라님은 자신이 먼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간신배들의 말만 믿고 우선 도망치기에 바빴다. 아직 서울에 남아 있는 백성들이 죽거나 말거나 헤아릴 바가 아니었다. 명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경도시 의주로 도망쳐버렸다.

이에 격분한 민중들은 급기야 경복궁의 의리 번쩍한 왕궁건물에 불을 지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불탄 이후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빈터에 고종 2년(1865) 그의 생부 흥선 대원군이 중건에 착수했다. 처음 창건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왕궁의 웅장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경복궁의 가장 뒤쪽 은밀하고 조용한 곳에 자리한 건청궁에서 당시의 퍼스트레이디 명성왕후가 일본의 폭도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졸지에 홀아비신세가 된 고종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다급한 과제였다. 결국 그는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이 왕궁으로서의 모든 운명은 끝을 맺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식민지로 전락하자 침략자 일본은 경복궁에 서린 민족의 고귀한 혼(魂)을 지우기 위해 갖가지 몹쓸 짓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국권을 강탈한 그들은 경복궁내에 남아있던 200여동의 각종 전각들을 모조리 헐어버렸다.

경회루와 중심건물인 근정전만 남기고 거의 다 헐어버린 일제는 근정전의 남쪽 정면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이로써 찬란한 오백년의 전통을 이어오던 조선의 맥은 끊어지고 수려했던 왕실의 자태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도록 철저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최근 들어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한 경복궁속으로 들어가 보자.

근정전(국보 224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근정(勤政)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은 이름이다.

근정전은 상, 하 월대위에 덩실한 2층의 거대한 건축물이다. 우람하고 높아 보이며 주변의 모든 건물들을 압도한다. 건물내부는 상하층 구분 없이 통 층으로 넓고 높아 국왕의 권위와 근엄함이 저절로 살아난다.

근정전을 옆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진 지붕선이 거칠어진 마음까지 부드럽게 풀어준다. 낭창거리며 길게 늘어진 곡선이 하늘로 향하며 이어진다. 서양의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건축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화려하게 짜여진 공포가 같은 간격으로 줄지어 늘어선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慶會樓)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외국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고 크게 다시 지어 더 많은 물을 가뒀다. 네모반듯한 연못 속에는 48개의 돌기둥을 세웠다. 물과 돌이 만나 인간을 위한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음과 양이 만나 신세계를 기원하는 것이다.

누각의 일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이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의 높낮이를 다르게 해서 앉은 이의 품계에 맞춰 안배했다. 경회루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고 외관이 뛰어난 석조기둥을 썼다. 소중한 건축물이라 하겠다.

궁궐의 마당에는 큰 나무를 심지 못하게 하는 제도 때문에 기화요초의 아름다움과 녹음방초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했다. 특히 궁중 여인들의 바깥출입이 엄격하게 규제된 상황에서 그들이 계절과 시절에 맞는 수목과 꽃을 보는 여유와 낭만을 찾아 즐기는 곳으로 꾸몄다.

아미산에는 화강 석재를 써서 여러 단으로 언덕을 쌓아 단마다 특징 있는 나무와 꽃을 심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 모습의 괴석을 갖다놓아 수석감상의 기름지고 윤기 나는 공간으로 꾸몄다. 한국최초의 수석정원이라 할 수 있다. 돌을 쪼아 만든 석분에는 여인네들이 즐겨하는 화초를 심어 은밀한 후원이자 미적 아름다움이 저절로 흐르는 공간으로 가꾼 것이다.

지금은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무늬들은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굴뚝에는 십장생, 사군자를 새겨 넣어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고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를 넣고 화마와 악귀를 막아주는 상서로운 짐승들로 그렸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로 지붕을 덮었다.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은 작은 창으로 예쁘게 만들었다. 굴뚝의 기능을 충분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구성이 조화롭고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조형물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건물의 구획을 그어주는 담도 경복궁에서는 꽃담으로 치장을 했다. 굴뚝과 담의 중간에는 어김없이 타일모자이크의 꽃담이 두 눈을 즐겁게 해준다. 담장도 쓸 만한 조각품처럼 자리를 잡았다. 조선여인의 고운 심성을 배려한 정서적인 정원 가꾸기이다.

돌과 나무와 묵직한 담장과 굴뚝이 조화를 이룬다. 계절에 따른 변화를 읽을 수 있게 했다. 세세한 발상의 전환이 상상력을 뛰어넘는 미의 이미지를 전해주는 창의적인 예술이다.

이들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적당한 크기와 눈높이에 새겨 넣었다. 의도한 뜻을 담은 적절한 무늬가 주변의 다른 시설들과 어울려 조화롭고 은은한 멋을 풍겨준다.

교태전에는 용마루가 없었다. 멀리서 보면 조금은 묘하다는 느낌이지만 살아있는 용인 왕이 주무시는 곳이라서 두 마리의 용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건물에 있어야할 용은 없애버린 것이다. 교태전에 딸린 벽돌로 쌓은 굴뚝은 단순한 굴뚝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살려낸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땅바닥에 홈을 파고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굴뚝으로 연결했다.

무늬는 조물주와의 직접적인 대화를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장수, 기복(祈福),벽사, 길상의 뜻을 담았다. 밑그림을 예쁘게 그리고 구워낸 자기로 모자이크했다. 가히 범상한 건물로 여느 곳에서나 보던 것이 아닌 궁궐만의 고고한 냄새를 풍겨준다.

조선인의 한이 서린 그곳은 앞날을 내다보는 미래를 위한 왕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끈질긴 조선인의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자존심이었다. 경복궁의 운명은 이제 영원히 우리들의 품속으로 닥아 왔다. 옛날의 모습을 되찾은 경복궁이 궁다운 모습으로 우리들을 부른다.

서울이여 영원하여라! 서울도성의 중심에 자리한 서울 속의 서울인 경복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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