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25.예언가가 예찬한 길지 중의 길지- 금당실 송림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2010년 06월 07일 00시 00분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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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막이 일환 북서쪽 나무 심어
120∼300년생 소나무 군락 절경
마을 희망 수호신 자존심 '상징'
예천의 금당실 송림은 인공으로 심고 가꾼 소나무 숲이다. 숲은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고 즐거움을 나누어준다. 최근에는 천연기념물(제469호)로 지정되었다. 용문 상금곡리 금당실 마을 서북쪽에 수해와 방풍을 막기 위하여 마을 주민들이 심은 소나무가 오늘날까지 무성하게 자라 사람들의 심성을 선하게 지켜주고 있다. 금당실 오미봉 아래에서부터 용문초등학교 앞까지 약 800m에 걸쳐 심어진 소나무 900여 그루가 울창하게 우거져 예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에는 삶에 활기를 넘치게 해주는 숲이 있어야 한다.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숲은 필수적인 요소다. 숲이 없어서 마을이 살기 힘든 곳도 있는데 숲이 마을의 대표 트렌드로 이름을 떨치게 해주는 마을도 있다. 하찮은 소나무가 마을을 전국적으로 띄워 올려주는 큰일을 해주기도 한다. 금당실의 소나무가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옛날 이곳에서 살았던 조상들의 지혜로 심었던 소나무는 풍수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심고 가꿨던 나무였다. 마을의 허한 기운을 보충하고 차가운 북서풍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심었던 소나무로 비보풍수의 일종이었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상금곡리 금당실은 전쟁과 전염병, 자연재해 등이 들지 않는다는 십승지의 마을로 알려진 명당 지였다. 병화가 들지 않는다는 명당마을로 탈바꿈시킨 것은 해마다 되풀이 되는 홍수난리를 막아주고 수구막이를 해준 마을서쪽의 송림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곳의 소나무가 무슨 이유로 금당실을 승지의 마을로 부르게 해주었는지 겨울철 소나무 숲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다. 겨울이 시작되는 섣달부터 매서운 칼바람이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휩쓸 듯이 불어온다. 아무리 두꺼운 오버코트를 입어도 살을 도려낼 듯한 북서풍의 찬 기운은 막을 길이 없었다.
힘이 장사라도 들판의 가운데에 서있지 못할 정도의 강풍이 불어오는 곳이 이곳이었다고 한다. 산을 넘어온 센바람이 너른 들판을 지나면서 가속도를 받아 더욱 강한 강풍으로 변한다. 마을사람들은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위한 방법을 찾아야만했다. 바람막이의 일환으로 소나무를 심기로 했던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북서쪽에 나무를 심자.”
소나무를 심고 난 다음 나무 뒤에 동네사람들이 실제로 들판에 나가 서보았다. 우선 찬바람을 직접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아늑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숲이 얼마나 인간들에게 이로움을 주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 샘이다.
무더운 여름에는 마을사람들이 삼복더위를 피하는 방법으로 숲 속으로 모여든다. 믿을만한 휴식공간이 숲 속이 되었다. 용문중학교 동편을 중심으로 폭이 50m 정도 되는 소나무밭에는 무려 2천여 그루가 자라 하늘을 뒤덮고 있다.
(금당실은 비보풍수로 심은 소나무가 척박한 땅을 승지로 만들어 주었다)
120년생의 아담한 소나무가 대부분으로 300년 이상 된 커다란 소나무도 50여 그루나 된다. 학교와 농경지, 민가 등이 인접해 있어서 숲이 사람들을 모여들게 해준다. 쉼터와 간단한 체육시설이 있는 금당실 송림은 마을주민들의 휴식처일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야외수업장이고 마을의 각종 행사나 집회장소로도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는 황금의 장소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금당실 송림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 명소가 되었지만 금당(金塘)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연못위에 둥둥 떠 있는 연꽃 모양과 흡사한 지형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을 지켜주는 주인은 누가 뭐라 해도 소나무다.
우리들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부정한 액막이로 소나무가지를 잘라 금줄을 건다. 그리고 죽어서는 소나무로 짠 나무관속으로 들어가 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나라님이 살던 궁궐이나 민초들의 집도 소나무로 짓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의 애국가에도 소나무가 등장한다. 남산위에는 소나무가 자라며 우리들의 기상을 대변해주며 고고한 인품으로 자라기를 기원한다. 한국인에게 생과 사를 넘나들며 함께 살아가는 나무는 소나무뿐이다.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또 멋이 넘치며 즐겨 그리는 산수화속에 등장하는 나무도 역시 소나무였다.
송림의 역사는 깊다. 금당실 마을은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작은 지류인 복천과 용문사 계곡을 흐르는 지천이 내려간다. 두개의 하천이 만나 넓은 평야를 이루며 복된 땅이다. 그러나 이곳은 여름이면 하천물이 범람하고 겨울이면 북서풍의 찬바람을 피하는 것이 당장 필요한 급선무였다.
그래서 금당실 주민들은 수백 년 전에 바람을 막고 수해를 줄이기 위하여 2천m에 이르는 소나무 숲을 조성한 것이다. 사람의 손을 빌려 가꾼 마을은 천하에 제일가는 십승지의 마을로 변모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의 격변기(1892년)에 이르러 송림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되고 말았다. 그해 7월 마을 뒷산 오미봉에서 금을 몰래 캐던 광부들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쫒아 내려고 했다. 사나운 노비들을 시켜 광부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몇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살해된 광부는 러시아가 소유한 광산회사의 하수인이었다. 자칫 잘못했다는 외교문제로 비화될 소지도 있었다. 마을을 승지의 마을로 지켜온 것은 풍수지리상으로 마을의 뒷산 오미봉덕분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마을은 크게 보면 배 모양의 형국으로 오미봉이 배의 돛에 해당된다. 핵심이 되는 중심이다.
배에서 돛은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그런 오미봉을 허물고 금을 캐낸다니 마을 주민들의 분노를 불러왔고 격분된 행동은 광부들을 집단으로 몰아내는 폭행치사 사건이 일어나고만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잡혀간 노비 30여명의 옥바라지를 하고 처형의 위기에 처한 그들을 구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위하여 소나무를 잘라 팔아야했다. 키가 크고 곧게 자란 소나무는 그 무렵 대부분이 잘려나가고 송림은 순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지금 남아 있는 소나무는 굽거나 휘어져서 볼품이 없는 앙상한 나무만 살아남았다.
현재 자리를 지켜주는 소나무는 그때 살아남은 것들로 작거나 쓸모없는 것들이 자란 것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굽어진 가지와 아무렇게나 자란 가지가 눈요기 감으로 변했다. 요사이는 생김새가 조금은 이상해야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고 기묘한 가지의 소나무가 더 많은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소나무의 역사인 샘이다. 인생역전이요 볼품없는 흉이 복으로 변한 것이다.
반듯하게 쭉쭉 자라던 소나무는 잘려나가고 공터로 변한 곳에는 다시 소나무를 심어야 했다. 잘린 나무로 인해 허한 공터의 자리는 승지의 땅이 아니었다. 맨땅에는 다시 소나무를 심어야 한다. 바람막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이 고장 출신으로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관직을 마치고 금당실로 내려와 99칸 집을 짓고 살면서 송림보호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지켜온 소나무는 지금까지 내려오며 급기야는 오늘날 천연기념물로 살아남았다. 그는 소나무가 죽거나 상하면 동네 사람들도 소나무처럼 죽거나 마을이 없어질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소나무는 마을의 수호신과 같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부티 나게 마을을 지켜온 소나무가 마을의 희망이며 자존심이다. 마을을 지켜오며 십승지의 명맥을 이어준 것이다. 고마운 소나무라 하겠다. 금당 송림은 마을의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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