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33.곡식의 종자와 인종을 구할 보신의 땅(3)- 있는 그 자리가 십승지다 |
입력시간 : 2010. 09.27.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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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 고운 사람들 살아가는 금계동
푸근한 이미지 닮은 귀품 넘치는 산
악착같이 오르니 소백산 정상 비로봉
많은 궁금증과 흥미를 끌어오던 십승지의 정확한 그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시대가 바뀌고 살아가는 방식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를 보이는 요즈음 어느 한 곳을 십승지의 포인트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피장처나 보길지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없어졌다. 발복지며 인간의 생명을 이어줄 그런 곳이 있다면 찾아오는 이들의 발길을 피하고 빼어난 비경을 자랑하는 명소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찾아오는 이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산골짜기는 순식간에 혼탁한 물로 가득 차 버릴 것이며 오히려 짜증만 부추긴다. 좁은 국토에서 가정마다 차가 있으니 한나절만 달려도 어디에 있든 원하는 승지에 도착할 수 있다. 감춰둔 비경을 간직한 땅이 있다면 입소문으로 전파되어 북적대는 난삽한 장소가 되고 말 것이다. 마치 원시림에 빠져든 것처럼 호젓한 여행지로 나라 안 곳곳으로 퍼질 것이며 찾는 이들로 뒤범벅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마음속에 남아있는 승지를 그리며 서있는 지금의 그 자리를 가장 좋은 승지로 알아차려야 한다. 국토의 어디가 오지며 불편한 곳이 아직도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현재의 자리를 가장 뛰어난 승지로 여기고 경외감을 갖아야 할 것이다.
감결이나 비결 서에서 말하는 안온한 곳, 즉 승지란 오늘날 서울의 강남과 같은 곳이 아니다. 떵떵거리며 살아간 곳도 아니며 겨우 병환과 질병 그리고 배고픔을 피할 만한 보신의 땅이다. 당시의 개념으로는 경제적, 전략적으로 가치가 전혀 없는 땅이었다. 그야말로 미천한 목숨을 이어가며 근근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런 곳이 경제적으로는 각광을 받고 있다. 관광지, 휴양지로 또는 별장지로 돈 있는 자들의 눈살을 피해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 이런 땅에 숨어든 자들이 살만한 편안한 땅은 어디에도 없다. 십승지를 말하는 것은 호사요 사치다. 변함없는 조국의 자연이 일등 승지임에 틀림이 없다. 현제 서있는 그 자리를 빼놓고 어디가 좋다고 찾아 나선단 말인가?
좁은 국토에서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현실 속에서 버리고 내몰리며 포기할 땅은 없다. 몸을 숨길만한 단한 평의 땅도 없는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함께 사는 길이 십승지를 찾아 나서는 것보다 백배천배나 옳다.
지금도 사람이 찾는 승지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소백산 아래가 그런 곳이다.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운 곳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뛰어난 인물들은 모두 다 이렇게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도시의 곳곳을 돌아다녀보아도 거기서는 역사적인 큰 인물이 태어나지 않는다. 마치 값진 보석이 깊은 산속 광산에서 나듯이 인물도 두메산간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다.
소백산 아래 사는 이들은 권력집단이나 금력집단 또는 그 밖의 이익이 될 만한 것이 없고 개인적인 욕망을 부릴만한 것도 없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이곳은 권력이나 명예, 금력, 현대적인 물질문명에 휘둘리지 않는 곳이다. 심성이 고운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가장 좋은 곳이 금계동이다.
권력이 크고 경제적인 이익이 클수록 그에 반비례해서 그늘도 크고 실망감도 짙다. 풍기지방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욕심 없이 한평생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살기 좋은 곳이라 하겠다.
일요일마다 계속한 산행으로 어지간한 산행에는 끄떡없이 버틸 수 있지만 소백산을 찾아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의 세상을 찾아 소백산으로 떠나가자. 그리고 산행 길에서는 선두에 서야만 마음 편하게 주변 경관을 살필 수 있고 이야기 거리를 챙길 수 있다.
오늘은 비로사를 거쳐 소백산의 제일봉인 비로봉(1439.5m)에 올라 연화봉(1,383m)과 천체 관측소를 보고 희방사로 내려오는 코스로서 장장 6시간이나 걸린다. 십승지 중에서도 제일번의 땅을 걸어 나오는 답사여행이다. 버스로 이곳까지 올 때 이른 새벽 5시간과 광주까지 돌아갈 5시간으로 총 16시간의 강행군이지만 충분히 버틸 만하다.
전형적인 한국의 흙산이라 할 수 있는 소백산은 등산로가 부드러운 황토 길이라서 친근감이 물씬거리는 동네 뒷산과 같은 산이다. 그렇지만 최정상 비로봉을 선두로 국망봉(1,421m), 신선봉(1,389m), 제일연화봉(1,394m), 제이연화봉(1,357m), 도솔봉(1,314m), 선달산(1,236m), 형제봉(1,178m), 소백산 천문대(1,383m)등 1,000m이상의 첩첩 연봉으로 백두대간의 중심이 되는 산이라 하겠다.
고원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산의 꼭짓점인 능선 주변에는 겨울철이면 항상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찬란한 백색의 기품을 뽐내고 있어서 소백산小白山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소백산은 예쁘게 화장한 젊은 새색시처럼 화려하지 않고, 완숙미가 넘치는 세련된 중년 부인같이 온화한 산이라 하겠다. 그래서 소백산을 ‘여성적인 山’으로 표현하지만 여성 중에서도 푸근한 이미지를 닮은 귀품이 넘치는 그런 산이라 하겠다.
40분쯤 올라가자 왼편의 비로사에서 외우는 독경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그러니까 오늘의 산행은 소백산 최정상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비로사에서 서쪽의 희방사로 끝을 맺는 십승지를 원을 그리듯이 둘러보는 산행이다. 대부분의 사찰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절터를 잡는데 유독 비로사는 메마른 비탈길 골짜기에 터를 잡았는데도 귀한 물이 마음을 저미게 넘쳐나고 있었다.
119구조대 요청 지점을 숫자로 표시한 영주소방서장의 배려가 눈에 띠었다. 달밭 골을 지나자 등산로를 중심으로 왼편은 잣나무 숲이고 오른편에는 상수리나무와 도토리나무의 활엽수로 극명하게 구별되는 식성분포가 소백산을 가꾼 이들의 많은 손길이 닿았음을 알 수 있었다.
몇 해 전에 헬리콥터로 어린 묘목을 운반해 온 다음 갖은 고생 끝에 심은 공력이 묻어 있는 곳이 소백산이기도 하다. 산 위쪽에서 무리를 지어 내려오는 여자 등산객들과 비켜 가는 순간 짙은 화장품 냄새로, 깨끗한 산 속의 청량감을 잠시 동안이나마 잊게 하고 세속에 다시 찾아온듯해서 섭섭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양말까지 흘러 내렸지만 능선 길은 시야가 터지고 그늘이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산 밑의 욱금 저수지가 바가지에 담긴 물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금계바위의 육중한 몸체가 보였다. 고개를 들자 정상의 비로봉이 가파른 길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경사가 급해지면서 등산로가 험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죽은 산악인 고 조광래 조난 추모비가 보이자 나는 등산화 끈을 풀어 다시 조이면서 느슨한 마음을 다시 한 번 더 추슬렀다. 작은 돌을 주워 추모비 앞에 가지런히 놓았더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갑자기 경사진 길이다 했더니 통나무 계단 길이었다. 정상에는 먼저 오른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는 모습이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었다. 어느새 물병의 물은 바닥이 났고, 빈 배낭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충북의 단양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경북의 풍기에서 부는 바람이 만나는 능선의 강풍도, 비 오듯 흐르는 땀을 그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황사와 함께 뿌연 안개가 앞을 가렸지만 오른편의 월악산이 시커멓게 보였고 왼편으로는 구름사이로 올라왔던 금선정계곡이 언뜻 언뜻 스친다. 산행을 시작한지 두 시간 반, 먼저 올라가 있는 자들을 쳐다보며 악착같이 올라가자 소백산의 최정상! 비로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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