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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항수 | 작성일 | 2006/04/20 17:43 |
3). 전의 이씨 이태사 선산 이 도의 묘 이태사 선산의 사격
충남 공주의 금강변(홍수 통제소 옆)에 李太師(이태사) 先山이 있는데 이것은 全義 李氏(전의 이씨)의 祖墓(조묘)로 이 지방에서 유명하다. 조선의 풍수에 의하면 고려조가 생길 무렵 이 산밑에 李某(이모)라는 가난한 나루터 뱃사공이 살았다. 그는 대단히 자비로운 사람으로 궁색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빈곤함을 무릅쓰고 도왔다. 그래서 공주 부근을 배회하는 많은 거지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아버지처럼 친해졌다. 어느 날 나그네 중이 나루를 건너 달라기에 건너 주니 얼마 안 되어 되돌아와서는 또 건너달라는 것이다.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되풀이하기를 4-5회 하니 보통 사람 같으면 화를 내고 말 일이지만 이 사공은 조금도 싫어하는 얼굴을 하지 않고 친절히 건네주었다. 이 중이 크게 감탄하고 뱃사공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喪中(상중)인 것 같은데 좋은 묘지라도 찾았느냐”라고 묻는다. 뱃사공은 아버지가 별세하고 3년이 되었으나 좋은 묘지가 없어서 그냥 두고 있다고 했다. 그 중은 강 건너의 산을 가리키며 저 山腹(산복)이 길지이니 묘지로 정하여 아버지를 매장하라고 알려주었다. 다만 그 곳은 良地(양지)이기 때문에 반드시 후세 사람이 파헤치는 일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막기 위해 墓穴(묘혈)을 석회 일천가마니로 굳게 만들고 또 “南來妖師 朴相來單知一節之死未知 萬代榮華之地”(남래묘사 박상래단지일절지사미지 만대영화지지)의 문자를 돌에 새겨 묘의 상층에 묻어두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뱃사공은 전부터 은혜를 베풀어 온 많은 거지들의 협력을 받아 석회로 광을 만들고 아버지의 유해를 넣은 다음 석회로 여러 겹으로 굳게 다지고 상층 밑에 刻石(각석)을 넣고 공사를 마쳤다. 과연 이 뱃사공의 자손은 눈에 띄게 부귀 영달하여 지금의 전의 이씨의 시조라 불리는 棹(도)는 고려 태조때 부터 統合三韓三重大功臣(통합삼한삼중대공신)으로 追贈(추증)되었다. 그런데 몇 代 뒤 朴相來(박상래)라는 지관이 이 산을 둘러보고 자손에게 말하기를 “이 뒷산의 龍 즉 來龍의 脈이 중단되어 있으니 일시 발복해도 몇 대 안가서 일족이 망할 우려가 있다”라고 하면서 강하게 移葬(이장)을 권했다. 유명한 지관의 말이라 자손이 믿고 그 묘를 파려고 했다. 그런데 모두 석회로 굳게 다져져 있기 때문에 좀처럼 쉽게 팔수가 없었다. 겨우 상층을 벗겨보니 한 장의 刻石(각석)이 나왔다. 그 내용은 “南來妖云云(남래요운운) 즉 朴相來(박상래)라는 妖地官(요지관)이 와서 이곳을 흉지라 하고 移葬(이장)하기를 권하는 일이 있을 터이니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손들은 조상의 주도면밀한 마음과 讖書(참서)에 符合(부합)한 것에 놀라 다시 본 모양대로 묻고 말았다. 전의 이씨의 일족은 수만 명으로 번성했으니 禮安 李氏(예안 이씨)도 그 자손이다. 李棹 先山(이도선산)의 主山(주산)은 속리산에서 천안 왕자산을 거쳐 차령고개를 넘어 南下(남하)해 왔고 앞의 案朝山(안조산)은 마이산 대둔산을 거쳐 북으로 올라온 계룡산과 그 낙맥들이다. 入首(입수) 艮寅(간인) 艮坐坤向(간좌곤향)으로 대 명당 이다.
자료 : 한국풍수지리연구원 www.poongso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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