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5) 창춘, 만주국의 수도에서 자동차·영화의 메카로
1930년대 수세식 변기, 1940년대 트롤리 버스 … 만주국 수도는 앞서갔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일본, 청 마지막 황제 푸이 내세워 만주국 세워
멀리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의 땅이었던 이곳은 발해(渤海)와 거란의 요를 거쳐 금·원(元)·명(明)의 지배를 받았다. 명말 청(淸)초에는 몽골 하르친족의 영지였으나 청 가경(嘉慶) 5년(1800) 이곳에 처음으로 장춘청(長春廳)이란 치소(治所)가 세워졌다. 창춘시의 탄생이다. 19세기 말 동진하던 러시아가 창춘으로 밀려와 시베리아 철도의 지선을 뻗어 내려왔다. 1904년 러일전쟁 결과 맺어진 포츠머스 조약으로 창춘은 러시아와 일본 두 제국주의 세력의 변경이 됐다. 이후 창춘은 명목상 1912년 수립된 중화민국의 지배지였으나 실제로는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1873~1928)의 치하로 들어갔다. 한편 일본은 1927년 6월 말 도쿄 외상 관저에서 중국 각지의 공사와 영사를 비롯해 정부와 군부 요인들을 모아 중국 정책을 논의하는 ‘동방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서 중국침략을 강화하는 일본의 대륙정책이 확정됐다. 1928년 4월 일본 관동군은 장쭤린을 폭사시키는 황고둔(皇姑屯) 사건을 일으킨다.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1898~2001)은 일본의 기대와 달리 국민당 정부에 투항한다. 동북은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관할로 들어갔다.
군국주의가 득세하면서 일본은 1931년 만주의 영구점령을 노리고 펑톈(奉天·지금의 선양(瀋陽)) 북부의 남만주철도를 폭파시킨 뒤 인근에 주둔하던 중국군 7여단에 누명을 씌워 공격했다. 9·18사변의 발발이다. 창춘은 이 사건으로 일본군의 지배를 받게 된다. 더 나아가 1932년 3월 1일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1906~67)를 내세워 만주국을 세운다. 창춘은 만주국의 새로운 수도 신경(新京)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파리·캔버라 본뜬 신경특별시 도시계획
그뿐 아니다. 전 도시에 상하수도 시스템이 완비됐으며, 1930년대 수세식 변기가 공급된 아시아 최초의 도시였다. 40년대 초에는 중국 대륙 최초로 지하철 건설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자원 부족으로 착공하지는 못했다. 대신 트롤리 버스로 대중교통 시스템을 대체했다. 창춘은 도시설계 초기 수용인구 50만 명으로 조성됐다. 1932년 말 일본인 1만8380명, 한국인 4017명, 중국인 14만여 명을 포함해 총 16만7036명이었던 창춘시 인구는 1939년 일본인 8만9347명, 한국인 1만1330명, 중국인 29만3831명 등 총 39만5476명으로 7년간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영화를 선전도구로” 동방의 할리우드 되다
“영화를 통해 대일본제국의 국가 정책에 참가하고, 유사시는 물론 평시에도 정치와 외교에 영화가 가진 선전과 교화의 특성을 발휘해 영화보국에 앞장선다.” 이는 만영의 모델이었던 ‘대일본영화협회’의 설립 취지문의 한 구절이다. 만영은 영화를 통해 오락뿐만 아니라 식민지 사상과 문화를 주입했다. 영화를 하나의 문화로 보지 않고 선전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만영은 8년 동안 ‘일만친선’ ‘오족협화’ ‘왕도낙토’ 등 대부분 일본의 침략과 만주국의 군대와 경찰을 미화하고 공산당 팔로군을 모멸하는 내용의 극영화 108편, 기록영화와 과학영화 189편, 그 밖에 300편이 넘는 시사영화를 제작했다. 만영은 영화 제작뿐만 아니라 영화의 배급과 수출망도 장악했다. 만주국 전역에 200개가 넘는 영화관을 보유했으며 이탈리아·독일과 영화 수출입협정을 맺고 영화를 교류했다. 또한 배우훈련소를 개설해 400명 이상의 배우를 양성했다. 만영 소속의 톱스타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노래 ‘예라이샹(夜來香)’을 부른 리샹란(李香蘭·이향란·91·일본명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이 유명하다. 창설 당시 만영 직원은 100여 명에 불과했으나 1944년 1857명으로 늘었다. 45년8월 일본이 항복한 닷새 후 만영 이사장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했다. 하지만 만영은 여전히 일본 잔류 세력의 손아귀에 있었다. 영화의 선전 기능을 잘 알고 있던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에 앞서 최첨단 촬영기자재와 인적 자원을 보유한 만영 장악 작전에 착수했다. 쉽지는 않았다. 창춘에 진주한 소련군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국민당군이 창춘을 장악하자 만영을 하얼빈으로 옮겼다. 49년 신중국 수립 후에야 창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오쩌둥·후진타오가 타는 차 ‘훙치’도 이곳에서
창춘은 13억 중국인의 발을 만드는 도시다. 1953년 소련의 지원으로 이치(一汽·제일기차제조창(第一汽車製造廠)의 약칭, 중국어 기차(汽車)는 자동차)가 창춘에 세워졌다. 56년 7월 해방(解放)이란 브랜드를 단 인민해방군 군용트럭을 처음으로 생산했다. 58년에는 세단 훙치 생산이 시작됐다. 훙치는 중국의 역대 최고지도자인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가 천안문 앞에서 군대사열을 할 때 타는 차종이다. 이치는 90년대에 들어와 독일 폴크스바겐, 일본 도요타·마쓰다와 제휴해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췄다. 이치는 2004년 연간 100만 대 생산시대를 열었고, 2009년 194만 대를 출하했다. 2010년 중국은 자동차 1826만 대를 생산해 세계 최대 자동차 대국으로 부상했다. 이치는 지난 1월 한 달 동안 26만 대를 생산, 상하이차 41만 대, 우한(武漢)의 둥펑(東風) 29만 대에 이어 3위의 자동차 메이커다. 창춘에는 이치 본사와 생산공장이 위치해 동방의 디트로이트로 불린다. 94년 한국의 자동차 생산 메카인 울산과 자매도시 협정을 맺었다.
자동차뿐만 아니다. 열차 생산도 창춘이 중국 최대 도시다. 1954년 설립된 창춘궤도객차(長春軌道客車)는 중국 철도 객차의 50%, 도시 궤도열차의 70%를 생산·공급한다. 김정일 위원장도 지난해 여름 창춘 방문 시 고속열차 생산 공장을 시찰했다. 북한의 평양지하철 객차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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