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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제의 도시 베이징 (상)

ngo2002 2011. 2. 14. 14:26

 

[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3> 황제의 도시 베이징 (상)

연암이 본 16개 거대한 문, 가장 많이 써 있던 글자는 ‘편안할 안(安)’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는 베이징(北京), 약칭은 징(京)이다. 한자 경(京)의 본뜻은 인공으로 만든 언덕이다. 자연적인 언덕은 구(邱)다. 자연이 배제된 인공의 언덕이 수도, 서울의 뜻이 됐다. 베이징은 전형적인 인공도시다. 하늘의 아들(天子)이라며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황제들을 위한 도시 베이징의 어제와 오늘로 여행을 떠나보자.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주역의 풍수이론에 따라 건설한 도시

단원 김홍도가 조선 연행사들이 베이징 내성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을 향해 가는 모습을 그린 연행도(燕行圖) 부분. [중앙포토]
베이징은 제왕의 땅이다. 과거 중국 왕조들의 초대 황제들은 유명한 풍수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군사 책략에 따라 도성을 결정했다. 베이징성과 자금성(紫禁城)은 풍수가들이 터를 잡고 정밀하고 세밀하게 모든 건물의 규모와 배치를 정했다. 중국 수도 건설의 지침은 주역(周易)의 풍수이론과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의 규정이었다. 수도는 황제의 도시이자 나라의 요지로 용맥(龍脈)이 흐르는 요충지다. 오행(五行)과 사상(四象, 태양·태음·소양·소음)에 따라 방위를 정하고, 건축 배치의 정교함에 일체의 허점이 없어야 했다. 베이징은 지리적으로 전 중국의 목구멍에 위치한다. 북으로 연산(燕山), 서쪽으로는 태행(太行)산맥의 끝자락인 서산(西山), 남으로는 영정하(永定河), 동쪽으로는 조백하(潮白河)가 흐른다. 전체적으로 베이징의 위치는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며 서북은 산, 남쪽은 강, 동쪽은 발해만으로 통하는 제국의 도시(帝都)로서의 풍수를 갖춘 지세가 빼어난 곳이다.

연암 박지원은 베이징에서 무엇을 보았나

베이징 도성의 건물들은 황제로 대표되는 권력기구의 권력과 지배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청(淸)나라 여행기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황도기략(黃圖紀略)’에 18세기 말 베이징의 위용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당시 외국인으로 중화제국의 황제를 만나기 위해 난생 처음 베이징에 도착한 사절의 시점으로 기록한 여행 가이드북인 셈이다. 베이징에는 조선이나 일본에서는 흔한 자연지형을 이용한 요새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기하학적인 직선을 따라 인공으로 지어진 성벽과 견고한 성문이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냈다.

다음은 연암의 기록. “성의 주위는 40리인데 꼭 바둑판처럼 생겼다. 정남향은 정양(正陽, 내성의 정문)이요, 동남은 숭문(崇文)이요, 서남은 선무(宣武)요, 정동은 조양(朝陽)이요, 동북은 동직(東直)이요, 정서는 부성(阜成)이요, 서북은 서직(西直)이요, 북서는 덕승(德勝)이요, 북동은 정안(定安) 문이 서 있다(여기까지는 베이징 내성의 아홉 개의 문이다).

붉은 담장에 누런 유리 기와 덮은 자금성

중국 학자 이중톈은 “베이징은 성(城), 상하이는 탄(灘), 광저우는 시(市)”라고 말했다. 사진은 성과 문과 담의 도시 베이징의 정가운데 위치한 자금성의 태화전. [중앙포토]

성 안에는 자금성이 있으니 주위는 17리인데 붉은 담장에 누런 유리 기와를 덮었고, 문에서 서북쪽을 지안(地安), 남쪽을 천안(天安), 동쪽을 동안(東安), 서쪽을 서안(西安)이라 부른다. 자금성 안은 곧 궁성이다. 정남은 태청문(太淸門)이요, 제2문은 곧 자금성의 천안문(天安門)이요, 제3문은 단문(端門)이요, 제4문은 오문(午門)이요, 제5문은 태화문(太和門)이며, 뒤는 건청문(乾淸門)이요, 건청의 북쪽은 신무(神武)요, 동쪽은 동화(東華)요, 서문은 서화(西華)다. 그리고 아홉 개의 문루(門樓)에는 모두 처마가 3겹이요, 문마다 옹성(甕城)이 붙어 있으며, 옹성에는 모두 2층 적루(敵樓)가 있고, 쇠로 싼 관문이 성문과 마주보고 섰고, 좌우에는 편문(便門)이 함께 있다.

그 정남쪽 한 면은 외성(外城)이 되어 일곱 개 문을 세웠으니 제도는 내성 아홉 문과 같다. 정남이 영정(永定)이요, 남쪽 왼편이 좌안(左安)이요, 오른편이 우안(右安)이요, 동쪽이 광거(廣渠)요, 서쪽이 광녕(廣寧)이요, 광거의 동쪽 모퉁이 문은 동편(東便)이요, 광녕의 서쪽 모퉁이 문을 서편(西便)이라 한다.

(자금성의 서북문인) 지안문 밖에는 고루(鼓樓)가 있고, 고루의 북편에는 종루(鍾樓)가 있다. 각루(角樓)가 여섯 개요, 수문(水門)이 세 개다. 성을 두른 못 물은 (도성 서북쪽의) 옥천산(玉泉山)에서 발원해 고량교(高梁橋)를 지나 물은 두 갈래로 흩어졌다. 한 갈래는 성 북쪽을 돌아 동쪽으로 꺾어 남으로 흐르고, 하나는 성의 서쪽을 돌아 남으로 꺾어 동으로 자금성에 들어 태액지(太液池·지금의 중남해)가 되었고, 이 물은 아홉 문을 감돌아 아홉 개의 수문(水門)을 지나서 대통교(大通橋)에 이르는데, 동서 언덕은 모두 벽돌과 돌로 쌓았다. 아홉 문의 못 도랑은 모두 큰 돌다리를 놓았다. 외성의 못 물은 역시 옥천의 물이 갈라져 서각루(西角樓)에서 성을 감싸 돌며 남으로 흘러서 또 동으로 꺾어 동각루(東角樓)까지 이르러 일곱 문을 거쳐 동으로 운하(運河)에 들어간다.(중략)

제국의 안정 갈망했던 황제의 심정 문에 새겨

바로 정양문을 나서 10리 밖 남교(南郊)에는 원구(圓邱)가 있고, (내성의 북동문인) 정안문 밖으로 곧장 10리를 가면 북교(北郊)가 되어 방택(方澤)이 있고, 조양문 밖을 줄곧 10리를 나가면 동교(東郊)가 되어 해가 여기서 뜨고, 부성문 밖으로 줄곧 10리를 나가면 서교(西郊)가 되어 달 지는 데가 여기다. 태묘(太廟)는 대궐의 왼쪽에 있고, 사직(社稷)은 대궐의 오른편에 있고, 육과(六科)는 단문의 좌우에 있으며, 육부(六部)와 여러 관청은 태청문 밖 좌우에 있다.

"내가 이미 중국으로부터 돌아와 지난 곳을 회상할 때 모두 감감해 마치 아침 노을이 눈을 가리는 듯하고, 침침하기는 마치 넋을 잃은 새벽 꿈결인 듯싶어 남북의 방위를 바꾸기도 하고 명목과 실상이 헝클어지기도 했다. (중략) 대체로 황도(皇都)의 제도는 앞은 조정이요, 뒤는 시장, 왼편은 종묘(宗廟), 오른편은 사직이요, 아홉 개의 문이 바르고 아홉 개의 거리가 곧아 도성이 한번 바로 서자 천하가 바로잡힘을 볼 수 있었다.”

연암의 기록과 같이 당시 베이징은 내성에 아홉 개의 문과 외성에 일곱 개의 문과 견고한 담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성벽의 도시였다. 문의 이름들에 가장 많이 들어간 글자는 편안할 안(安)자였다. 제국 주변의 안정을 그토록 갈망했던 황제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동쪽엔 부유한 상인들 … 서쪽엔 황족·학자들

명·청시대 베이징은 ‘사구성(四九城)’으로 불렸다. 아홉 개의 문, 동서남북 네 구역으로 나뉨을 표현한 말이다. 여기에 ‘동부서귀, 남천북빈(東富西貴, 南賤北貧)’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성 안 동측에는 각종 창고가 많았다. 성의 동쪽 교외 지역인 퉁저우(通州)는 대운하의 종착지였다. 강남에서 올라온 식량과 각종 물산이 동쪽의 창고에 저장됐다. 자연스레 부유한 상인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부유한 동쪽의 유래다. 서쪽에는 청나라 황제의 아들이나 형제들이 거주하던 친왕부(親王府)가 밀집해 있었다. 인공호수가 조성돼 풍광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기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일류 학자들이 서쪽에 모여 살았다. 권력과 학식을 가진 귀인들 덕에 ‘서귀(西貴)’가 됐다. 청대 내성 안에는 만주족 팔기(八旗)들만이 거주할 수 있었다. 한인(漢人)들은 외성에 모여 살았다. 숭문문 남쪽에는 수공업자들이, 선무문 밖에는 각급 관원들이 많이 살았다. 이들은 일반 백성보다는 지위가 높았지만 만주 귀족들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천한 남쪽은 만주족들의 민족 분리 거주 정책을 보여주는 사례다. 성의 북쪽은 상업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교통도 불편했다. 돈 많고 권세 있는 분들이 살 곳이 못 됐다. 자연스레 몰락한 하층 만주족 팔기들이 이곳으로 밀려났다. 가난한 북쪽은 하층 만주 기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부르는 말이었다.

청나라 망하고 새로 세운 4개의 문

청나라가 망하고 난 뒤 신화문(新華門), 화평문(和平門), 건국문(建國門), 부흥문(復興門) 네 개의 문이 새로 들어섰다. 신화문은 황성에서 내성으로 나가는 문으로 천안문 서쪽에 세워졌다. 현재의 중국 정부인 국무원 정문이다. 화평문은 1926년 지어졌다. 당시 신화가(新華街) 주변에 살던 주민들이 내성을 드나들기가 불편하다며 성벽을 뚫어 문을 내줄 것을 요구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정양문과 선무문 사이에 문을 내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전문(前門) 주변 상인들은 통행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 풍수쟁이를 부추겨 성문을 새로 만들면 왕기(王氣)가 새어나갈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황제 등극을 노리던 위안스카이는 소문을 듣자 그 계획을 취소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 정부를 장악한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이곳에 두 개의 아치형 구멍을 뚫었다. 바로 화평문이다. 건국문과 부흥문은 1939년 일본군이 만들었다. 그들은 베이징의 서쪽 교외에 조성한 일본군 주둔지와 성 동쪽에 조성한 공업중심지를 연결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했다. 이 두 지역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도로가 지금의 장안가(長安街)다. 장안가를 가로막는 내성 성벽에는 동쪽에 계명문(啓明門·지금의 건국문), 서쪽에 장안문(長安門·지금의 부흥문)을 세웠다. 청대와 같이 화려한 성루의 문을 세우지는 않았다. 단순히 성벽에 구멍을 뚫는 방식이었다. 지금 베이징에 성벽과 성문은 거의 모두 자취를 감췄다. 왜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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