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54] 동남아 여성 정치 지도자
“모친 위독” 미얀마서 걸려온 전화 한 통, 평범한 주부의 운명 바꾸다
정현목 기자
15년간 구금, 영국인 남편 임종도 못 지켜
영국에서 생활하던 주부 아웅산 수치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88년 4월 조국 미얀마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모친이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귀국한 수치는 전국적인 반정부 운동을 접했다.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하는 군정의 잔혹성을 목격한 그는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후 수치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됐다. 수치는 두 살 때 암살당한 아버지(버마 건국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건국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다.
인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64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해 철학·정치학·경제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간 수치는 영국인 교수 마이클 아리스를 만나 결혼, 두 아들을 낳았다. 평온한 생활이었지만 군부 독재에 신음하는 조국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수치는 귀국 후 야당인 NLD(국민민주연맹)를 만들어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지만 군정에 의해 89년 첫 가택연금 조치를 당했다.
NLD는 수치가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이듬해 실시된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군정은 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민주 세력을 탄압했다. 수치는 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수상식에는 영국에 거주하는 장남이 대리 출석했다. 출국하면 군정이 재입국을 거부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99년 암으로 사망한 영국인 남편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수치는 비폭력 민주화 운동을 이어갔지만, 그의 활동에 위협을 느낀 군정에 의해 가택연금과 해제가 반복됐다. 최근 21년 중 15년을 구금 상태로 지내온 수치는 지난달 13일 7년 만에 가택연금에서 풀려났다.
수치는 지난달 7일 치러진 ‘불공정’ 총선에서 압승한 군부 세력에 대화와 화합을 촉구했다.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인도네시아·1947~ )
민주화 상징된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딸
인도네시아 건국 영웅인 고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딸이자 인도네시아 첫 여성 대통령이다. 반둥대에서 농업·심리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전에 결혼해 주부가 됐다. 그는 1983년 친기독교정당(PDI)의 자카르타 지부장을 맡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높은 지지율과 아버지의 후광 덕분에 93년 민주당 총재로 선출됐다.
그러나 수하르토 정권의 정치공작으로 94년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고, 96년에는 정부와 군부 지원을 받는 당내 반대파에 의해 총재직을 박탈당했다. 그가 총재직을 박탈당하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수하르토 정권의 탄압 덕분에 오히려 그의 지명도는 더욱 높아졌다.
메가와티가 수하르토의 하야를 주장하며, 인도네시아 민주화의 상징이 된 것도 이때부터다. 32년간 인도네시아를 철권통치한 수하르토가 98년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밀려 사임한 뒤 메가와티는 이듬해 6월 투쟁민주당 당수로 총선을 지휘했다. 총선에서 투쟁민주당이 집권 골카르당을 누르고 제1당에 올라선 뒤 메가와티는 야당 세력의 대표주자가 됐다. 그러나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국민협의회(MPR)에서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보수적 이슬람 세력의 비토를 받아 부통령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2001년 7월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이 탄핵된 뒤 새 대통령으로 취임해 와히드의 잔여 임기인 2004년까지 5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2004년 10월 치러진 대선에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현 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겼다.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필리핀·1947~ )
9년 집권 후 지금은 고향서 지역구 의원으로
필리핀의 9대 대통령 고(故)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인 아로요는 미국 조지타운대학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공부했다. 대학 교수, 칼럼니스트를 거쳐 1986년 코라손 아키노 정부에서 무역산업부 차관보로 공직에 들어섰다.
92년 상원의원이 된 그는 수출진작책, 여성중소기업 지원책 등을 입안해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 98년 대통령 선거와 별도로 치러진 부통령 선거에서 ‘라카스’당 후보로 출마, 에스트라다 대선 후보(39.8%)보다 높은 지지율(47%)을 얻어 부통령에 올랐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이를 고려해 아로요를 사회복지 장관에 겸임시켰다. 그러나 2000년 10월 에스트라다의 부정부패가 폭로되자 장관직을 사임하고 야당연합 대표에 취임, 반(反)에스트라다 진영을 이끌었다.
2001년 1월 사임한 에스트라다의 임기를 승계, 새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2004년 대선에서 당선되면서 대통령직을 유지하게 됐다.
아로요는 9년의 집권 기간 동안 경제 악화에 시달렸고, 이슬람 반군·부정부패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올 6월 후임으로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이 취임하자 그는 말라카냥 궁전을 떠나며 “재임기간의 행적에 전혀 후회가 없다”고 밝혔다. 또한 “부정선거 의혹 등 모든 사건은 공정하게 법대로 처리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로요는 고향인 팜팡가 제2지역구 하원의원으로 정치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코라손 아키노(필리핀·1933~2009)
남편 피살 뒤 반 마르코스 투쟁 선봉에
아시아 최초이자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 ‘코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국회의원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마닐라의 파이스트 대학에서 고향의 명문가 출신인 베니그노 아키노와 만나 1955년 결혼했다.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4남 1녀를 낳았다.
67년 상원의원이 된 남편 아키노는 차기 대권주자로 주목을 받았다. 독재자 마르코스가 72년 남편을 투옥시키자 코리는 8년간 옥바라지를 했다. 80년 심장질환 수술을 이유로 부부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아키노는 3년 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귀국했으나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저격범들의 흉탄에 쓰러졌다.
아키노의 암살은 필리핀 국민들의 반정부 운동을 고취시켰다. 주부 코리는 남편의 죽음과 국민적 지지에 힘입어 반(反)마르코스 대열에 가담했다. 85년 야당 대선후보로 추대된 코리는 이듬해 2월 대선에 도전했지만, 마르코스의 부정선거로 인해 패배했다. 코리와 국민들은 무혈 시민혁명인 ‘피플 파워’로 20여 년에 걸친 ‘마르코스 왕조’를 붕괴시켰다. 마르코스와 아내 이멜다는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고, 코리는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다.
코리는 대통령 임기를 6년 단임제로 제한하고, 헌법을 개정하는 등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졌다. 그러나 부족한 정치경험으로 인해 여러 기득권 세력에 휘둘렸다. 여러 번의 쿠데타 기도와 경제난 등 계속적인 소요를 겪었다. 92년 5월 대선에서 피델 라모스에게 패한 뒤 대통령직을 인계했다. 코리는 퇴임 후 복지재단을 만들어 대외활동을 계속했으나 지난해 8월 대장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76세. 올 5월 아들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돼 사상 첫 모자(母子) 대통령의 기록을 낳았다.
왜 동남아 여성 지도자 많나
동남아는 역사적으로 여성의 역할이 강한 지역이다. 농사와 장사를 대부분 여성이 담당했기 때문에 아내가 가사의 주도권과 경제권을 장악했다. 중국의 역사책인 명사(明史)는 16~17세기 태국 사회를 소개하면서 “왕부터 서민까지 모든 일은 부인에 의해 결정된다. 부인들은 속이 깊고 계산을 잘하니 실로 남자들보다 뛰어나다”고 적었다.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과 말레이 반도에서 여성들이 왕국을 통치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여성의 공적인 역할을 부인하는 이슬람이 전파된 뒤에도 상당 기간 이런 관행이 유지됐다. 독재로 흐르기 쉬운 남성 군주에 비해 여성 군주가 여러 기득권 세력과 잘 타협하는 등 조정자 역할이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동남아의 여성 군주 시대는 평화롭고 상업이 융성했다. 종교적 영역에서도 신이나 초자연적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자격은 여성에게만 부여됐다.
근대 이후 동남아의 전통적 여성상이 약화되긴 했지만, 동남아 여성의 힘은 사회 각 분야에서 여전히 강하다.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도 8~10%로 높다. 경제 분야에서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에서 상업 종사자의 절반은 여성이다. 동남아 여성은 산업 노동력으로서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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