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와 일반적상식

가전칠우 쟁론기

ngo2002 2010. 9. 8. 10:13

[디지털 3.0] 가전칠우 쟁론기

약 300년 전 한 규방에서 바느질에 동원되는 일곱 도구들 간 논쟁을 묘사한 글이 '규중칠우 쟁론기'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즈음에 나는 규중칠우 대신에 가전칠우가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우리 거실에는 PC, TV, 냉장고, 세탁기, 전기밥솥, 에어컨, 게임기가 버티고 앉아 서로 다투게 되었다.

PC는 주인마님과 더불어 뉴욕주식거래소, 영국 대영박물관, 시드니 관광 명소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많은 것들을 정리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PC를 제외한 나머지 가전칠우들이 격렬히 항의하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모두 다 PC처럼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게 비자를 발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집안 거실에까지 닿아 있는 인터넷을 통해 PC는 자유롭게 바깥세상을 출입할 수 있었으나 나머지 가전들은 자기들만의 간단한 언어로 거실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비자 허가를 받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마님은 PC로 하여금 이들이 바깥세상을 여행할 때 통역을 대신해 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하였고 PC는 기꺼이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날 밤 PC는 가전칠우들을 모아놓고 그들만의 언어를 영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해 PC 안에 자그마한 통역방을 마련해주고 수시로 인터넷을 통해 너른 세상으로 안내하는 관문(Home gateway)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제 주인마님은 바깥에서도 인터넷으로 집안의 홈 게이트웨이를 통해 가전칠우들을 깨워 일으켜 일을 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퇴근 30분 전에 인터넷을 통해 전기밥솥을 깨워 전원을 켜도록 하니 아침에 넣어둔 쌀이 집에 도착해 보니 잘 익은 밥으로 변해 있었다. 여름에는 에어컨 온도를 지정하여 인터넷을 통해 작동하니 집에 도착할 땐 적정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PC는 본래 기능 외에 여섯 친구들이 인터넷을 타고 시도 때도 없이 바깥세상을 드나들 때마다 통역을 해주느라 낮잠 잘 여유도 없이 혹사당했지만,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이라고 자위하며 서로 잘 지내기로 하였다.

PC는 기능이 날이 갈수록 늘어남으로써 주인마님이 오히려 따라가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최근에는 와이파이, 와이브로라는 액세서리를 팔에 걸치게 되어 움직이면서도 인터넷과 소통하는 신무기를 갖추게 되었다. 이처럼 움직이는 동안에도 세상과 연결되는 기능이 추가되자 나머지 가전칠우들이 자기네들도 이제 PC 도움 없이 인터넷 세상을 여행하겠다고 야단이다. 반도체회사는 여기에 고무되어 그동안 컴퓨터칩 개발에만 열을 올렸으나 이제는 가전칠우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가전용품 전용칩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가전칠우들은 조만간 PC 도움 없이도 스스로 인터넷 세상을 여행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TV는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내 화면은 항상 한정된 채널밖에 보여줄 수 없었는데 이제 스페인 마드리드방송에서 중계하는 투우 장면, 필리핀 마닐라방송에서 중계하는 루손섬 화산 폭발 중계 장면 등 모든 나라 방송국을 직접 방문하고 더 많은 콘텐츠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세상 모든 방송 콘텐츠를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내 화면까지 끄집어 올 그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냉장고도 그날 밤 행복한 꿈을 꾸었다. 새로운 칩을 달고 인터넷 세상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백화점 식품코너를 돌며 오늘 가장 싱싱하고 저렴한 저녁거리를 조사해와 주인마님께 알려드리고 요리 전문학원에 들러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요리 방법을 배워오고 냉장실에 있는 우유 유통기한이 임박했다는 것도 미리 알려 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PC는 물론이고 모든 가전제품까지도 지능화하여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홈 게이트웨이 표준화를 준비할 때다.

[윤종록 전 KT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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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17:14:27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