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20.07.21 00:21
각국의 경쟁적 돈 풀기 이후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국내 가계와 민간 기업의 빚이 무서운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대출·채권 등 민간신용 비율은 올 3월 말 3866조원에 이르러 국내총생산(GDP) 대비 201.1%를 기록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통계를 내는 주요 43개국 평균(156.1%, 2019년 말 기준)보다 45%포인트나 높다. 그야말로 빚더미 공화국이다. 이 모든 게 사상 유례없는 저금리 여파로 부동산 대출이 많은 데다, 산업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해 빚으로 연명하는 기업이 늘어난 탓이다.
물가 안정 불렀던 요인 사그라져
넘치는 통화량이 물가 끌어올려
생산 비용·소비자 부담도 증가
코로나 안정되면 금리 인상 불가피
이렇게 유동성이 많이 풀리면 물가는 어떻게 될까. 최근 경제학자들뿐만 아니라 금융시장 참여자들 사이에 인플레이션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결국 물가가 오르면 각국 정책당국도 지금과는 다른 정책으로 대응할 것이고, 금융시장 참가자들도 자산구성을 다시 해야 한다.
미국의 역사가 참고될 만하다. 미국은 1956~80년까지 인플레이션 시대였다. 55년에 -0.3%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80년에는 13.6%로 크게 올랐다. 그 이후 물가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고, 2000년 이후로는 연평균 물가 상승률이 2.2%로 낮아졌다. 20여년 동안 디스인플레이션 시대가 지속한 셈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작성하는 세계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80~90년에는 연평균 18.0%였으나, 2000~2019년에는 3.9%로 크게 낮아졌다.
2000년 이후 물가가 안정된 이유를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수요 부족과 통화 승수의 감소가 물가 안정 요인으로 작용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제 GDP가 잠재 수준보다 낮게 성장했다. 세계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미국 경제에서도 2010~19년 사이에 실제 GDP가 잠재 GDP를 연평균 2% 정도 밑돌았다. 그만큼 공급보다 수요가 부족했다는 의미이다. 돈이 돌지 않기 때문에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중앙은행이 천문학적 통화를 공급하고 있는데도 물가가 안정되고 있다.
중국 주도 물가 안정 막 내려
그래픽=최종윤
공급 측면에서는 중국의 세계시장 편입이 물가 안정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중국은 저임금 등 낮은 생산요소비용을 바탕으로 상품을 싸게 생산해서 전 세계에 공급했다. 예를 들면 2001~19년 미국의 대중 누적 무역수지 적자는 5조 1447억 달러에 이르고 있는데, 그만큼 중국의 생산자가 미국의 소비자에게 상품을 공급했다. 월마트에 진열된 상품의 절반 이상이 중국산일 정도이다.
공급 측면에서 물가 안정을 초래한 두 번째 요인은 생산성 향상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진행된 정보통신혁명으로 미국의 생산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1980~95년 사이에 연평균 1.5% 증가했던 비농업 부문의 노동생산성이 1996~2007년에는 2.8%로 많이 증가했다. 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생산성 향상은 총공급 곡선을 우측으로 이동시켜 고성장과 저물가를 동시에 달성시키는 역할도 했다. 이와 더불어 유통시장의 혁명도 물가 안정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마존과 같은 회사가 낮은 유통 비용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물가 안정을 초래했던 요인들이 변하면 인플레이션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 우선 수요 측면에서 마이너스 GDP 갭률(실제와 잠재 GDP의 % 차이)이 사라져야 한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올해 2분기에는 미국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30% 이상이고, GDP 갭률은 8%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미국 정책 당국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과감한 재정 및 통화 정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가계와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2조 2343억 달러의 재정지출을 늘리기로 했는데, 이는 2019년 GDP의 10.4%, 2020년 예산의 47.5%에 해당한다. 연방준비제도는 연방 기금금리를 0.0~0.25%로 낮추고, 2008년 금융위기 수준을 뛰어넘는 통화량 공급에 나섰다.
인플레는 언제나 통화적 현상
소비자물가상승률
이런 재정 및 통화정책의 효과로 2021년 이후에는 실제 GDP가 잠재 GDP에 점차 접근하면서 마이너스 GDP 갭률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초과 공급이 해소되고 물가가 상승하게 된다. 이때는 돈이 돌면서 통화 승수도 다시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노벨상 수상자였던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이란 언제 어디서나 통화적 현상이다”라고 했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결국 물가가 오른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 시대를 예견하는 학자들은 그의 이론이 앞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다가 미국이 상대국보다 돈을 더 풀고 있기 때문에 달러 가치가 떨어질 것이고, 이 역시 물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공급 측면에서도 물가를 상승시킬 요인이 많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글로벌 가치사슬(GVC)의 붕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각종 보호무역 장벽을 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중국과의 무역전쟁이 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2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 질서를 이끌었던 자유무역이 크게 후퇴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제조업의 리쇼어링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일본 등 주요 선진국도 같은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GVC’ 대신에 ‘RVC’(Regional Value Chain) 혹은 ‘DVC’(Domestic Value Chain)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럴수록 기업의 생산 비용과 소비자 부담은 늘어날 수 있다.
정책적 측면에서도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유도할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지출을 늘린 만큼 GDP 대비 부채는 늘어날 것이다. 물가가 상승하면 분모에 해당하는 명목 GDP가 증가하면서 GDP 대비 부채 비율이 낮아지게 된다. 그러나 빚이 많은 개인과 기업은 인플레이션이 더 냉혹할 수 있다. 금리 상승에 따라 이자 부담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미리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자세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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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많은 개인·기업은 미리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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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을 결정하는 수요와 공급 요인을 보면 1~2년 이내라도 인플레이션 시대가 올 수 있고, 각 경제주체는 지금과는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먼저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긴축 정책으로 돌아설 것이다. 적극적 재정 및 통화 정책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각 경제주체의 부채가 크게 늘었다. 미국 등 선진국은 정부가, 중국을 포함한 신흥국은 기업이, 한국 등 일부 국가는 가계가 부실해졌다.
부채에 의한 성장의 한계가 도래한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로 경제가 급격하게 위축되자 부채로 경기를 다시 부양하고 있다. 물가가 오르면 각국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채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세계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 같은 위기를 겪을 수 있다.
금융시장 참여자들도 포트폴리오를 변경할 것이다. 1981년 이후 물가상승률이 떨어지고 금리가 하락했기 때문에 채권투자자들은 지속해서 이익을 낼 수 있었다. 1981년 9월 15.32%(월평균)였던 미국의 10년 국채수익률이 2020년 4월에는 0.66%까지 떨어졌다. 채권 가격이 지속해서 상승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물가가 오르면 채권 가격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이 완만하게 진행되는 국면에서 주가는 오르지만, 물가 상승 속도가 빨라지면 중앙은행은 이를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 통화정책을 긴축적으로 운용할 것이기 때문에 주가는 내려가게 된다. 금은 인플레이션 시대에 주목받는 상품이 될 것이다.
미국 물가가 상승하면 한국 물가도 상승했다.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발표되기 시작한 1966년 이후 통계로 분석해보면 미국 물가 상승률이 한국에 4개월 정도 선행(상관계수 0.85)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과관계를 분석해보아도 미국 물가가 한국 물가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한국 경제에서는 2019년 1분기에서 2020년 1분기까지 GDP 디플레이터가 5분기 연속 떨어지는 등 디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4%에 그쳤고, 올해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일 전망이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시대에 접어들면 한국 경제의 디플레이션 압력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주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출처: 중앙일보] [김영익의 이코노믹스] 디플레이션보다 냉혹한 인플레이션이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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