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선생 묘역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532년(중종27) 토정 이지함이 모친상을 당하자 이곳에 자리를 정하고, 2년 전에 돌아가신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여 함께 합장하였다. 이때 이지함이 예언하기를 우리 삼형제(지번, 지무, 지함)는 己亥年(1539)에 귀한 자식을 얻고 일품의 벼슬을 하는 자가 나올 것이라 하였다. 그 후 기해년(1539)에 과연 맏형 이지번은 이산해(영의정)를 낳았고, 둘째 형 이지무는 이산보(이조판서), 토정 자신은 이산두를 낳았다. 그러나 토정의 큰아들 이산두는 21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토정선생의 묘에 대해서는 풍수계에서 설왕설래 말이 많은 곳이다. 토정선생이 생전에 천문과 지리에 밝았고, 젊은 나이(16세)에 그의 모친과 부친 묘를 이곳에 정하는 등 숱한 기행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의 앞날을 예측하는 토정비결을 저술하였다는 것 때문에 특별한 선입견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토정 이지함 묘소
그리하여 이곳을 답사하는 일반인들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탁 트인 묘역에 대해 “과연 명당은 이러한 곳이구나” 하며 감탄을 한다. 하지만 풍수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두 그룹의 가장 큰 차이는 일반인들은 묘소 전면의 풍광을 바라보고 감탄하는 것인데, 안산의 형태가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쪽 멀리 넓은 바다가 보이는 후련한 풍광 때문에 눈이 즐거운 것이다.
반면 후자의 사람들은 묘소 뒤편의 밋밋한 용세와 경사진 당판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좋은 터는 반드시 평탄하여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곳 묘역은 심한 경사가 진 언덕지형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가 즐겨 쓰는 말을 소개해 보겠다. “아마추어는 묘소의 전면을 보고 말하고, 프로는 묘소 뒤쪽의 상태를 보고 숙고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고서에서 말하기를 穴取安止라 하였다. 즉 혈은 안정적으로 멈춘 곳에서 취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곳은 심하게 경사진 지형으로 인해 편안한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이곳 묘역에서 여기가 진혈이니 저기가 진혈이니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어느 묘소도 최소한의 당판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말에 돌을 굴렸을 때 구르던 돌이 멈춘 곳과 지게꾼이 쉬어가던 곳이 명당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주산에서부터 이어진 용맥의 끝자락이면서 주변이 편안하고 풍광까지 뛰어난 곳이니 가족묘역으로는 편안한 곳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문가적 소양을 키우려면 좀 더 기본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장묘문화가 바뀌어 묘를 쓰는 것이 크게 줄었다 할지라도 풍수의 근본 원리는 바뀌지 않는다. 가장 작은 것을 모르면 큰 것을 도모할 수 없다. 물론 편안하고 듣기 좋게 글을 쓰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 잡지의 르포일 때이다. 그러한 곳에서는 좌청룡 우백호도 거론할 필요가 없다.
이쯤에서 주차장변 도로 쪽에서 묘역을 바라보면 뒤편 봉우리가 단정하고 반듯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곳 지형을 위성지도로 보면 주산의 봉우리가 일자문성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묘역의 주산이 된다. 그리고 묘소는 산줄기 끝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을 보면 이곳 묘역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묘역의 뒤편을 계속 오르면 용맥의 상태가 상하좌우 많은 변화를 하고 있는데, 그 형세가 예사롭지 않다. 반듯한 주산에서부터 이어진 용맥이 과협을 이루고, 단정한 현무정을 만들었으며, 분주한 용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지점 편안하고 넉넉하게 자리를 펼쳐주고 있는데, 그곳에서 좌향은 乾坐巽向(동남향)이 된다. 그렇다면 토정선생 묘역은 위쪽에서 혈을 맺고 남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자리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묘역의 근처에서만 맴돌 뿐 산에 오르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에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필자가 말한 지점이 한산이씨의 문중산이라면 언젠가는 대승적으로 그곳의 활용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하겠다. 참된 혈은 無價値寶라 하였고 인재를 양성하는 인류 최고의 자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