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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순의 풍수보따리<27> 다른 사람에게 불행 안겨주고 반대급부 겨냥

ngo2002 2020. 4. 6. 11:07
풍수사가 왕이 된 남자 - 역풍수
김규순의 풍수보따리<27> 다른 사람에게 불행 안겨주고 반대급부 겨냥
'천지의 기운이 사람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천기 접한 세조의 풍수 권력


 

 

풍수란 풍수적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나 후손들을 위한 미래가치를 증폭시키고자 한 것이라면, 역풍수는 풍수적인 해코지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주고, 다가올 기회의 박탈로 인한 반대급부로 자신이 이익을 구하고자 함이다. 그 시초가 태종 이방원이가 회안대군묘의 용맥을 끊어 땅의 기운을 끊어버리는 일이었다.

왕통을 자기의 후손에게 대물림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 풍수를 통하여 표출된 것이다.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났다면 조선왕조는 다행이었을 것이지만, 이후 되풀이 되고 반복되어 조선 풍수의 불행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조선 왕실이 풍수의 악용으로 말미암아 권력의 부침에 따라 풍수사의 부흥과 몰락이 수반되었기에, 풍수사의 입지는 불을 보고 날라드는 부나방과 같은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의 방법을 일찌감치 학습하여 역풍수를 확실하게 정립한 이가 바로 수양대군이다. 그는 왕기를 타고나긴 했지만, 차남이라 왕권과 인연이 없어, 왕실의 무덤을 만드는 책임자로 풍수학을 섭렵하다가,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풍수를 통해 ‘천지의 기운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천기를 접한다.

17세에 이미 중국 사신을 접대할 정도로 학식이 출중하고, 경세지관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 그는 유학뿐만 아니라 잡학에도 능통했음이 왕조실록에 전한다.

그의 야심은 형수였던 세자빈(현덕왕후)이 죽은 뒤에 고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빈궁의 능소를 안산 고읍 땅에 정하는데 그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바닷가에 무덤을 만들지 않는 관례를 깬 것부터가 이상한 조짐이다. 세종께서도 “그 땅이 바다에 가까워서 파도소리가 있을까 염려 된다 ”고 세종왕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최양선의 활약

소릉(현덕왕후의 폐릉지-안산고읍)의 선정에 관여한 풍수사는 최양선이다. 최양선은 태종 이방원 시절부터 활약한 풍수사로 1430년(세종12년)에 이미 서운장루(서운관 종7품의 벼슬)로 헌릉 고갯길 논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그의 풍수실력은 섬뜩할 정도로 영감과 직관을 갖고 있었다. 그를 눈여겨본 수양대군은 은밀히 그를 가까이 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릉 선정 직후 그는 “장사에 쓸 돌을 벌채할 때에 돌이 종소리와 같이 울었다.” 고 요망스런 말을 하여 형조에서 국문을 당하였다.

소릉을 천광할 때 그의 행태가 왕조실록(1441년, 세종27년 8월27일)에 적혀 있다. “--처음에 주산(主山) 동쪽 가까이 혈(穴)을 정하고, 다시 안산(案山)에 올라 그 산맥을 살펴보고 조금 서쪽에다 고쳐서 혈을 정하였는데, 최양선이 고쳐 정한 곳에 광(壙)을 파지 아니하고 처음에 정한 곳에다 광을 팠으므로, 민의생(閔義生)이 이를 힐책하니, 양선(揚善)이 망령되게 말하기를, ‘내가 마음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실로 공(公)이 정한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 공(公)이 ’누구인가’가 궁금하다. 민의생도 변경된 광이 아닌 잘못된 광을 팠던 최양선으로 하여금 다시 고치게 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 후로 최양선은 1443년 세종의 수릉을 살펴볼 때, 망령된 언사로 말미암아 의정부와 예조에서는 벌을 주고자 했으나 세종은 다만 그를 큰일에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의정부와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일에 대군 및 정부의 풍수학 제조(風水學提調)가 함께 수릉(壽陵)을 살필 때에, 서운 부정(書雲副正) 최양선(崔揚善)이 수릉의 혈 자리가 임방(壬方) 자리인 것을 감방(坎方) 자리라 하고, 또 허망하게 이르기를, ‘곤방 물이 새 입처럼 갈라졌다.’[坤水分觜] 하여, 그 해로움을 논하기를, ‘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는다.’[絶嗣損長子]고 하여,(생략)”

그 후 최양선은 수양대군의 권력에 기대어 종3품의 벼슬까지 오르고 80세가 넘도록 천수를 누린다. 이는 1464년(세조10년)에는 세조가 늙은 그를 위로하는 자리를 가졌던 것을 보아서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소릉을 점지할 때 수양대군의 야심은 최양선을 통해 드러난 것이었다. 최양선은 승리한 권력의 편에서 편안한 삶을 즐겼던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간 풍수사가 있었으니 그가 목효지이다.
 

▲ 소릉에서 발굴된 석물.    



소릉 점지

그는 관노였다. 성과 이름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양반 또는 사대부가문에서 권력쟁투에서 패망한 가문일 것이다. 목씨는 사천 목씨뿐이다.

목효지는 빈궁(현덕왕후)의 능소인 안산고읍의 땅이 흉지라고 세종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그의 상소문을 보면, ‘내룡이 약하고 끊어진 곳이 많아서 이럴 경우 후손이 녹아버린다’ 거나, ‘청룡이 물을 따라 달아나는 형국인데, 이럴 경우 장자와 장손이 일찍 죽는다’고 하였고, ‘고현(古縣)은 부녀가 미천하다’는 내용을 올렸다.

진양대군(후일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함께 목효지에 대한 힐문을 참청하였으나 목효지는 굽히지 않았다. 이에 세종은 왕세자빈의 무덤을 살피게 하였다. 이 당시 힐문에 참가한 신개, 민의생, 이정녕, 정인지 등은 이미 수양대군과 교류가 깊었던 인물들이다. 수양대군은 성군 세종의 왕자로써 세종과 왕세자를 대신하여 종친부와 수릉제조 등 이미 많은 업무를 대행하였는지라 대신들과 스스럼없는 관계를 구축하는 기회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수양대군의 간계로 소릉은 변함없이 안산고읍에 만들어졌고 목효지의 예견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 소릉에서 발굴된 석물.    



현릉의 대립

수양대군은 문종이 죽자 현릉을 선정하는 부분에서도 목효지와 대립한다. 헌릉 부근에 자리를 잡은 문종의 능소에 대해 목효지는 단종에게 비밀 서간을 올린다. “헌릉의 내맥(來脈)은 나는 듯한 봉우리에 거꾸러지는 다리[倒脚]로, 산으로 가는 다리[足]이니, 주인은 약하고 객은 강하여 산의 근원이 막다른 땅이요, 수맥은 동쪽을 향하여 등져 흐르고 혈도(穴道)는 굽으니, 정히 관협(關峽)·가화(假花)의 땅이요, 정룡(正龍)·정혈(正穴)이 아닙니다.”

목효지의 뜻은 대신들에 의해 묵살되고 천광이 진행되지만 목효지의 말대로 한번은 물이 나고 두 번째는 돌이 나와서 폐기되고 구리의 동구릉에 만들게 된다.

동구릉의 현릉도 마찬가지로 수양대군의 역풍수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현릉도 절손지지(絶孫之地)의 땅이었던 것이다. 조카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이 풍수라고 철저하게 믿었고 실행에 옮긴 그였다. 풍수야 말로 조상의 정기신(精氣神)의 기를 받아 천명을 바꾸어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풍수사가 왕이 된 남자 그는 세조였던 것이다. 그의 조선 왕실에 대한 명분이 어떤 것이었던지 간에, 그의 권력을 향한 집념을 보면 권력에 환장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이로부터 역풍수는 사대부와 백성들에게까지 그대로 영향을 미쳐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송사(山訟事)로 이어지는 빌미를 제공하는데, 그 여파로 암장, 평장, 의장(擬葬), 공장(空葬), 늑장(勒葬), 투장(偸葬)은 물론이고 시체모독과 단맥(斷脈)으로 나타났다.

 

[김규순 서울동인학회 원장  www.locationart.co.kr]

 

기사입력: 2013/07/26 [10:45]  최종편집: ⓒ 환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