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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순의 풍수보따리<26> 조선풍수 -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다

ngo2002 2020. 4. 6. 11:06
조선시대 최고권력자의 무기가 된 풍수
김규순의 풍수보따리<26> 조선풍수 -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다
태조 이방원의 풍수적 헤코지... 전대미문의 사건 주역 수양대군
 
김규순


 

왕조시대에는 왕이 행했던 의례가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백관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결정한 의례들은 그 자체가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릉의 규모나 양식과 만드는 과정이 최상급이 되고, 이를 기준으로 생략되고 축소되어서 사대부나 백성들이 무덤을 만드는데 적용되었다.

조선왕조 초기의 풍수는 처음부터 순탄하지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취현방에 묻었다. 취현방은 지금의 정동이며 신덕왕후릉은 현재 미대사관저 안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 곳에서 문인석이 발견된 이유이다.

태종 이방원은 왕으로 등극하자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의 영역을 축소하고, 그의 참모인 하륜이가 그 옆에 저택을 짓고 살도록 허락한다. 아버지 이성계가 살아 있음에도 대담한 일을 저지른 것은 왕자의 난에 대한 보복성 행위가 다분하다. 살아 있는 권력의 무서운 징벌이 시작된 것이다.

▲ 광통교. 광통교 아래에 가보면 왕릉에서 사용되는 무늬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들은 태조 이성계의 처, 신덕왕후의 능에 있었던 석물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능을 훼손했다는 것은 매우 치욕스런 일이다. 사진 우측 아래 금강저의 조각문양이 보인다.     © 김규순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죽자 경복궁에서 바라보이는 취현방(지금의 정동)에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성안에 무덤을 둘 수 없다는 의견을 들어 무덤을 파헤쳐 사을한沙乙閑(지금은 정릉동)으로 옮기게 하였다. 신덕왕후의 능호가 정릉이었으므로, 능호가 동네의 이름이 되어 정릉동으로 불린다.
 
그 당시에 무덤을 장식했던 둘레석과 장대석은 청계천의 광통교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600년 전 행적의 증거가 광통교의 석물에 그대로 남아 있다. 소위 새엄마와 전실 자식 간의 권력투쟁에서 신덕왕후는 철저하게 내버려졌다. 근거는 이방원의 지시로 중신들이 ‘신덕왕후가 계비가 아니라 후처’라고 규정하였으므로, 왕비로 예를 갖추지 말라고 명한 것이다.

이방원의 생모인 신의왕후가 살아 있을 때, 이성계가 따로 부인을 얻었다는 것이 근거가 되었다. 즉, 생모는 향처鄕妻였고 신덕왕후는 경처京妻였다. 유교적으로 정궁(正宮)은 한 분이므로 신덕왕후는 계비도 아닌 후처라고 한 것은 왕후의 제례를 폐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그 후 여러 차례 회복이 논의되었으나 1669년 9월(현종10년)에야 송시열의 주장에 의해 왕비로써 제례가 복구된다.

태종 이방원의 성정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신의왕후가 잠든 제릉에 묻혀야 했다. 생모 신의왕후 한씨(1337-1391)의 능이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소재한 제릉(齊陵) 이다.

생모는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사후에 왕후로 추증되었다.

아들의 성향을 보니 신덕왕후 강씨 옆에 묻히지 못할 것을 예견한 이성계는 남재의 땅과 교환한 검암 땅(건원릉)을 수릉으로 점지한다. 이는 남재의 묘표墓表에 상세하게 적혀 전한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에게 왕릉을 선정하라고 시킨 것으로 왕조실록에 전하지만 그것은 승자의 기록일 뿐이다. 결국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수릉(건원릉)에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방우(1)-방과(2,정종)-방의(3)-방간(4)-방원(5,태종)-방연(6,조졸)
-방번(7,강씨소생)-방석(8, 강씨소생)

태종은 형제와의 관계에서도 철저하게 풍수적인 우위를 차지하려고 노력했다.

정사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회안대군 묘(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산59-5)와 관련하여 전승되는 풍수 설화를 살펴보면 태종이 풍수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태종은 회안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풍수사를 보내 그간 사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이들은 태종에게 회안대군의 묘가 군왕이 나올 자리라고 진언하자 “회안대군의 자손이 왕이 된다면 내 자손은 어떻게 되느냐”며 지사들에게 그곳으로 다시 가서 지맥을 끊으라고 명한다. 지사들은 다시 전주로 내려와 맥을 자르고, 뜸을 떴다. 거의 6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뜸자리와 맥을 자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산 정상은 거대한 암반으로 둥근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 거대한 암반 덩어리를 무엇으로 잘랐는지 사람 키보다 깊은 골이 길게 나 있다. 또한 암반 맥을 자른 몇 미터 근처에는 뜸을 놓았던 흔적이 보인다.
 

▲ 회안대군 묘. 태조이성계의 넷째 아들 방간의 묘.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아우 이방원에게 패하여 토산으로 귀양 갔다. 태종의 배려로 처형되지는 않았다. 태종 이방원이 군왕지지라는 말을 듣고, 지사를 보내 지맥을 절단하고 뜸을 떠서 회복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전승설화로 유명하다.     © 김규순


태종은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써 임금이 되는데 정통성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형제들의 후손들의 왕권 탈취 가능성에 매우 민감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설화이다. 이러한 불안감을 풍수에 기대어서 막아보겠다는 태종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권력은 독점을 전제로 하는 독배이다. 부富는 나누어도 권력은 나누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에서 풍수는 최고 권력자가 가진 칼보다 무기가 되었다. 풍수사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시기가 조선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풍수적 해코지는 장난에 불과했다. 전대미문의 일이 조선에서 일어난다. 그 주인공이 수양대군이다. 그의 행적을 좇아가보도록 하자. [김규순 서울동인학회 원장  www.locationart.co.kr]


기사입력: 2013/06/19 [12:18]  최종편집: ⓒ 환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