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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엔 교수 아들 등원, 밤엔 대리운전.. "오늘도 '노비'가 됩니다"

ngo2002 2018. 9. 17. 12:30

아침엔 교수 아들 등원, 밤엔 대리운전.. "오늘도 '노비'가 됩니다"

박지연 입력 2018.09.17. 04:45 수정 2018.09.17. 09:41  


하루 15시간 일하고 한 달 60만원.. 갑질에 신음하는 대학원생

교수 동호회 동원돼 도우미 역할… 식권 1장 받아

졸업ㆍ취업 권한 쥐고 있어 부당지시 받아도 견뎌

학생 연구비 통장에 남은 인건비를 10만원씩 쪼개 50일 동안 상납 받은 교수, 공동 과제비로 딸에게 선물할 아이패드와 카메라를 산 교수. 개인 모임 후 대리운전 시키려고 조교를 부르는 교수까지… 교수 갑질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 그래픽 신동준 기자

오랜 시간과 각고의 노력을 쏟아부어 학계에 발자취를 남기고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기는커녕, 연구비 횡령으로 대표되는 인건비 상납 생태계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연구자들. 학생 신분이지만 어엿한 사회인이며 몇몇은 누군가의 부모이기도 한 대학원 연구생들은 어째서 부조리 앞에 이토록 무기력한 것일까.

박사과정 휴학 중인 이화평(가명)씨는 한 마디로 답했다. “석ㆍ박사과정에 입학하는 순간 자발적으로 ‘노비문서’에 도장을 찍는 셈이니까요. 교수님이 졸업과 취업 권한을 쥐고 있으니, 반발하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영역의 일을 해내니 고급인력 아니냐고 되묻자 “그렇다면 고급노비쯤 되겠다”고 자조했다.

◇공부시간조차 없는 ‘고급 노비’의 일상

대학원에서 조교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 이씨는 연구실에서 하루 꼬박 15시간씩을 보냈다. 오전 9시. 출근과 함께 자신의 실험상황을 확인하고 전날 늦게까지 이어진 실험으로 어수선한 실험실을 정리한다. 9시30분. 자신이 담당하는 학부생 30여명의 레포트를 검사한다. 점심시간 전까지 끝내야 오후 수업 준비가 가능하니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하다. 11시30분. 서둘러 점심을 먹고 곧바로 수업을 챙긴다. 1시에 시작한 수업은 5시에 마친다. 이씨는 그제서야 숨을 돌린다. 멍하니 앉아 30분쯤 보낸 뒤 저녁을 먹는다. 조교업무를 하느라 하루 중 절반가량을 보낸 셈이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면 이미 기진맥진합니다. 수업 전ㆍ후로 질문하러 오는 학생들이 있고 레포트도 저마다 작성하는 방식이 다르니 검사에 긴 시간이 걸리는 날도 많습니다.”

오후 6시30분. 이제야 비로소 이씨가 ‘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실험을 하고 논문을 뒤적이며 정리하다 보면 금세 자정이 넘는다. 밤늦게까지 실험하고 주말에도 연구실에 나가는 게 이씨에겐 흔한 일과이다.

중간ㆍ기말고사 기간엔 이 정도 시간도 확보하기 힘들다. “조교들이 담당 교수님 시험지 채점을 도맡으니 죽어납니다. 이 학과에선 학기에 네 차례 시험을 치는데 수강생이 100명이 넘어요. 시험 볼 때마다 사나흘은 날립니다. 주말은 당연히 없고요. 자꾸 공부시간 떠올리며 속상해봤자 소득 없으니 그냥 이것도 공부려니 합니다.” 이씨가 쉴새 없이 일하고 받는 인건비는 월 60만원가량. 한 학기 등록금은커녕 생활비로 쓰기에도 빠듯하다.

대학원생이 겪는 저임금 실태, 불확실한 연구기간에 따른 불투명한 미래를 풍자한 미국 폭스(FOX)사 TV만화 ‘심슨네 가족들(The Simpsons)’ 에피소드 중 일부.

10여년 전 미국에서 방영된 TV애니메이션 ‘심슨네 가족들’ 가운데 대학원생의 열악한 현실을 풍자한 장면은 지금도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흔하게 전해진다. 바트 심슨(심슨 가족의 아들)이 말총머리를 하고 “이거 봐라. 난 서른살 대학원생이다. 작년에 60만원 벌었다”고 장난을 치자 엄마 마지는 “바트! 대학원생 놀리지 말거라. 그들은 그저 잘못된 선택을 한 것뿐이란다”라고 훈계하는 장면이다.

특히 연구조교의 업무와 사적인 부탁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보니 조교들은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토로한다. 연구조교는 교수의 수업을 보조하는 역할이지만 수업 보조의 경계는 모호하기만 하다. 구슬아 전국대학원생노조 위원장은 “조교 업무 가이드라인이 없는 곳이 많다”며 “어디까지 수업 보조로 인정할지 지침이 없으니 결국 교수 재량에 맡겨진다”고 말했다. “조교에게 사소한 부탁을 하나둘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적인 업무 지시로 이어집니다. ‘골프 치러 가야 하는데 차 좀 주차장에 갖다 놔’ 하는 지시처럼 말이죠.”

법원의 ‘대학 연구비 횡령’ 관련 판결 건수=그래픽 강준구 기자

◇대리운전ㆍ동호회 동원… 사역하는 학생들

문제는 연구활동과 전혀 무관한 일을 시키는 교수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대학원생들은 이럴 때 스스로 ‘노비’ 또는 ‘노예’라 느낀다고 토로했다. 최근 전국대학원생노조에 제보된 교수의 부당지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교수님은 저를 연구조교가 아니라 ‘비서’로 생각하세요. 교수님이 발표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연구조교가 만들어 교수님의 숙지를 도운 일도 있습니다. 여러 학회에 따라다니는 건 그나마 제 공부라도 되죠.”

대학원생 문수진(가명)씨는 “그래도 비서는 양호한 거 아니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씨는 연구실로 출근하기 전 어린이집에 들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문씨는 미혼이다. 아이도 없다. 지도교수의 아들을 등원시키려 간다. 종종 하원도 시킨다. 등ㆍ하원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논문을 쓰다가도 흐름이 끊길 수밖에 없다.

구 위원장은 주말 이틀간 교수의 취미 동호회에 동원됐던 일화를 털어놨다.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종일 땡볕 아래 대기하며 동호회를 찾는 이들에게 안내하는 일. “저처럼 교수님에게 차출된 다른 학교 학생들과 눈이 마주쳤어요. 어이가 없어 서로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가 받은 수고비는 달랑 식권 한 장. “휴일에 제대로 못 쉰 것도 타격이지만 시간이 더 아까웠어요. 그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했으면 생활비에 보탬이라도 됐을 테니까요.”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교육연구환경 조사보고서(2016년)에 따르면 행사에 동원되거나 집합 등을 강요받았다고 답한 연구생은 38.2%(467명)에 달한다. 폭언이나 욕설 등 인격적으로 모욕감을 느끼는 말을 들은 경우도 33.8%(413명), 집단적 따돌림이나 배제, 소외 등을 경험한 응답자는 3.9%(179명)였다. 연구 대신 사역에 내몰리는 건 구 위원장만이 아니다.

학생을 운전기사로 부리는 교수의 사례는 여러 학생의 분노를 자아냈다. “개인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는 대리운전을 해달라고 조교를 부르는 교수도 있습니다. 학문의 계승자로 학생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소유물처럼 부리는 거죠. 연구실 회식 후 자신과 함께 술을 마신 제자에게 음주운전을 강요하는 일도 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박사과정 C씨는 최근 자퇴를 택했다. 10년 넘게 몰두했던 연구성과가 물거품이 됐지만, 꿈을 포기할 만큼 큰 상처를 받아서다. 처음엔 자신의 연구능력이 볼품 없는 탓에 졸업이 늦어진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채찍질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더 뛰어난 학자가 되도록 하려는 교수님의 계획이겠지.” 그러나 교수 편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이 희생되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 C씨는 망설임 없이 학업을 중단했다. 동료들은 C씨가 연구과제 수행능력이 뛰어나고 인건비 공동관리를 문제 없이 잘 해냈다고 증언했다.

교수에게 장래가 달린 대학원생들은 ‘이런 일을 견디면서 학위를 받아야 하나’라고 고민한다. 존엄성마저 저버리면서 졸업하는 게 의미 있겠냐고 하소연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논문으로 매듭짓지 못한 채 취업시장에 나서기에는 위험요소가 너무 크다. 그러니 부당한 지시를 받아도, 연구조교의 업무 영역을 벗어나는 교수 개인 업무를 맡게 돼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공대생 서영호(가명)씨는 말했다.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면 참고 넘어갔을 거예요. 교수가 학생더러 ‘장학금을 출금해 오라’고 해도 ‘네’라고 답하는 겁니다. 이왕 고생한 거 졸업까지만 참자는 마음에서요. 지도교수를 바꾸거나 졸업한 뒤에도 결국은 교수와 같은 업계에 있게 되는데, 교수가 학생 평판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면 타격이 크잖아요. 그러다 ‘교수가 내 인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편의를 위해 이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학생들도 돌변해 신고하거나 제보를 합니다.”

국내 이공계 대학원에서 ‘관행’이라 불리는 연구비 공동관리 흐름도 예시=그래픽 박구원 기자

◇가설 맞추려 연구 신뢰성 떨어뜨리기도

열악한 대학원생 처우만큼 심각한 문제는 더 있다. 바로 연구의 신뢰성이다. 전국대학원생노조 강태경 부위원장은 “연구결과가 가설에 들어맞도록 강요하는 풍토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에서 발주하는 연구용역을 수행하는 학생이 실험 결과 당초 가설과 다른 연구 결과를 내놓으면 교수가 “다시 확인하라”며 암묵적으로 결론을 강요한다는 설명이다. “연구라는 게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인데, 가설이 틀렸다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이를 묵살하고 예상되는 데이터를 내놓을 때까지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는 연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같은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2016년 11월 대학원 인권장전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대학원이 설치된 전국 182개 대학교에 인권장전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대학원생은 조교 근무 또는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합당한 기간을 두고 근무 시간ㆍ내용, 임금 혹은 장학금을 포함한 대가성 인건비 금액 등의 사항을 포함한 상세한 근무조건을 서면으로 통보 받을 권리를 지닌다. 해당 조건이 협의 없이 부당하게 변경되면 이를 거부할 권리도 갖는다. 나아가 과도한 조교 근무나 프로젝트 등으로 정상적인 학업시간을 침해 받지 않을 권리 또한 보장된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