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소비자 피해 구제
#1. 2011년 미국에서 TV·컴퓨터 모니터용 브라운관 가격을 담합하다 적발돼 과징금 3200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361억원)를 낸 삼성SDI는 3년 뒤인 20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에서 진행된 집단소송에서 미국 소비자들에게 약 3300만달러를 배상하는 데 합의했다.
#2.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가 화학비료 입찰가격과 물량 등을 담합한 13개 화학비료 제조사를 적발했다. 이들은 농협 등이 발주한 화학비료 입찰에서 담합해 15년간 약 5조9683억원의 매출액을 올렸다. 남해화학, 동부하이텍, 삼성정밀화학 등에 총 828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그러나 비싼 돈을 내고 비료를 사야 했던 농민들은 손해배상을 여태 받지 못했다.
담합 등 기업의 불법행위로 소비자 피해가 발생해도 한국에서 개별 소비자가 이를 배상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비료 업체간 담합으로 비료 값이 올랐고, 정상가보다 비싸게 비료를 산 농민들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농민 개인이 담합으로 입은 피해를 법원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증명하는 데 수억원의 비용이 든다. 비료 담합 사건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농민 1만8000여명이 공동으로 소송을 진행하면서 피해액 입증에 성공했지만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공정위가 경제분석을 동원해 소비자나 경쟁사업자가 입은 피해 정도를 산출하면 어떻게 될까. 송기호 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소비자 피해 정도를 공정위가 분석한다면 소비자 개인이 피해액을 입증할 부담을 덜어 피해 구제에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소송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며 “위법 기업 입장에서는 민사적 제재가 강화돼 법을 어길 유인이 떨어지고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생긴다”고 말했다.
현행 규정은 공정위가 소비자 피해를 파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정위 과징금 고시는 공정위가 과징금 산정을 위해 법 위반행위의 중대성을 결정할 때 “관련 소비자 및 사업자의 피해 정도, 부당이득 취득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정위는 구체적 피해 정도를 파악하지 않고 있다.
■ 디지털포렌식 TF 4년째 TF
2013년 ‘갑을’ 문제를 공론화했던 남양유업 대리점 사건은 공정위에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초 공정위는 본사의 밀어내기 물량 매출액을 토대로 12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행정소송 끝에 과징금은 1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법원이 공정위가 산정한 관련 매출액이 정확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공정위는 밀어내기 물량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전국 대리점 2000여곳의 컴퓨터를 뒤지는 등 로그 기록을 수집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대리점주들이 받은 피해를 산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양유업이 부당하게 밀어낸 물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제재를 피하는 기업 수법은 날로 교묘해지지만 공정위의 대응은 답보 상태다. 공정위는 2013년 디지털포렌식센터 구축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포렌식조사과 신설 등을 요구해왔으나 4년째 TF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요즘 기업거래는 전부 전자문서 형태로 돼 있어 이를 은폐할 경우 조사에 어려움이 많다. 디지털포렌식팀이 반드시 필요한데 현재는 5명 인원으로, 그나마 행정지원 인원을 빼면 3명뿐이고 전문가는 1명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공정위 칼 벼려야 갑질 잡는다
지난해 10월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정위가 기업 위법행위로 소비자·피해사업자 등에게 발생한 손해액을 조사하게 하고, 이를 위해 변호사·회계사 등 전문가로 구성된 전담부서를 설치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기업의 위법행위를 밝히기 위해 경제효과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소비자 등에게 발생한 피해도 산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정위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쏟아지는 사건을 처리하기도 바쁜데 인력과 예산을 새 분야에 투입할 수 있겠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정무위원회 전문위원 역시 “현재 공정위는 외국 경쟁당국에 비해 적은 인원으로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며 “인력·재원 보강이 이뤄질 경우 조사 분야부터 늘려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고 지적했다.
향후 중요성이 더 확대돼야 할 디지털 조사 예산은 2년째 줄어들고 있다. 2015년 7억1000만원이 배정된 디지털 조사센터 구축 예산은 지난해 5억4000만원으로 30% 가까이 줄어든 뒤 올해 예산에서도 4억9000만원으로 줄었다. 규제개선 및 경제분석 예산(2억4700만원)도 지난해보다 1400만원(5.4%) 감소했다. 김 위원장이 기업집단국 신설, 대기업 집중 감시 방침 등을 내걸면서 공정위 경제분석 기능의 중요성은 더 커지게 됐다.
김남근 참여연대 변호사는 “그간 공정위는 ‘피해구제기관이 아니다’라는 도그마에 빠져 소비자나 피해사업자에게 발생한 피해를 방관해왔다”며 “과징금 일부를 피해자 구제기금으로 조성해 손해액 분석 등 공정위 전문성을 강화하는 데 쓰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참여연대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