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7주년 특집 - 우리 안의 우리]나에게서 우리를 발견하라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이론적으로 증명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조건이 충족한다면’ 개개인이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서 행동할 때 이들의 행동이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조정될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최적이 된다는 것을 보인 바 있다. 아주 어려운 수학으로 이루어진 이 증명은 한편으로는 경쟁이 가져올 이로운 효과를 증명한 것이지만, 이를 뒤집어 놓고 보자면 경쟁을 통해 이로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엄격한 조건이 성립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규모의 경제는 없어야 하고, 외부성도 없어야 하며, 공공재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등등으로 이어지는 엄격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개인들의 자기 이익 추구는 사회적으로 최적인 결과를 보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결과를 가리켜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실패’ 혹은 ‘조정의 실패’라고 부른다.
문제는 이러한 시장의 실패가 경제학 교과서 맨 뒤편에 과수원 주인과 양봉업자의 관계를 예로 들어 잠시 등장하고 말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출근을 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 다수와의 약속을 지킬 것인지의 문제, 얼마만큼 교육을 받고 얼마만큼 지식을 축적할 것인가의 문제, 얼마나 많은 전기를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 가진 돈을 부동산에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 내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켜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문제, 투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 등을 둘러싼 우리의 결정은 그 결정을 내린 당사자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러한 사안들을 둘러싼 우리의 의사결정이 내 자신의 이익만을 기초로 이루어질 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내가 한 행동이 남에게 끼치는 영향을 감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은 완전하기 때문에 개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해의 충돌이 시장에서 원만히 해결될 것이라고 믿은 때가 있었다. 서로 주고받는 영향에 대해 (완전한) 시장이 적정한 가격을 매길 것이므로, 누군가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면 그 영향만큼 그 행위자에게 가격을 지불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바꿔 말하면, 시장이 완전하지 않은 경우 시장은 서로간에 주고받는 영향력을 제대로 평가해내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시장이 완전하지 않은 경우, 혹은 부재한 경우 서로간 이해의 충돌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게 된다. 이때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둘러싼 선택을 내리면서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지를 고려하는 것,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영향력을 둘러싼 상호 견제와 스스로의 절제 등이 필요하다. 개인들은 이 속에서 자신들의 행동의 사회적 책임성을 자각하고,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고려해서 행동하게 된다.
1980년대 이후 많은 이들이 이러한 ‘실패’를 교정할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어떤 이들은 시장의 실패가 문제이므로 이는 국가의 개입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폈고, 또 다른 이들은 시장의 부재가 원인이므로 이는 시장의 도입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어떤 경우에는 시장이 갖고 있는 한계가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경우는 시장의 부재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국가냐 시장이냐의 이분법을 뚫고, 기존의 시각에서는 벗어나 있던 아주 흥미로운 사례들이 보고되면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200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뇨 오스트롬 교수의 작업이 대표적이다. 오스트롬 교수는 기존의 시각으로 볼 때는 ‘뜬금없이’, 소규모 어촌 공동체에서 어떻게 자율적 어장 관리가 이루어지고, 산악지역 마을에서 어떻게 공유삼림을 관리해왔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었다. 이들 사례 속에서 개인들은 시장과 국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오랜 역사 속에서 자발적인 참여와 서로간의 자율적 행위 규제 등을 통해 시장의 실패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왔다. 어장에서 어획량을 결정하고, 삼림에서 채취할 수목의 양을 결정하며, 어떤 차례로 논에 물을 댈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익이 늘어날 때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사람들이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경제주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는 도덕적인 경제주체들의 모습을 찾아내고, 이들의 존재가 경제적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자기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이익도 고려하는 사람들, 평등한 분배 상태를 선호하는 사람들, 자신의 몫을 희생하면서까지 불공정함을 시정하려는 바람을 갖는 사람들, 남을 신뢰하고 상대방의 신뢰에 보답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제는 경제학 문헌에서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그리고 어촌 공동체뿐 아니라 위키피디아에서도, 그리고 리눅스라는 컴퓨터 운영체제에서도, 윤리적 소비나 협동조합들에서도 그런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가져온 물질적 성공의 배경에 경쟁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에 토를 달 필요는 없다. 애덤 스미스는 경쟁에 기초한 ‘상업사회’가 하층 농부조차도 예전 유럽의 왕자보다 더 잘살게 만들어준 물질적 성과뿐 아니라 상업활동을 벌이는 사람들 사이에 협동하고 절제하며 다른 이의 요구에 맞출 줄 아는 새로운 도덕성도 만들어낼 것이라고 기대한 바 있다. 애덤 스미스가 경쟁이 가져올 물질적 그리고 도덕적 성과에 대해 낙관적인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경쟁이 전체 파이(애덤 스미스는 이를 가리켜 국부라고 불렀다)의 크기를 증가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경쟁은 애덤 스미스가 바라봤던 모습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경쟁은 전체 파이의 크기를 증가시키는 수단이기보다 주어진 파이에서 각자의 몫을 증대시키는 수단으로만 기능하기 시작했다. 의자의 수를 늘리지 못한 채 모자란 의자를 놓고 서로 뺏는 양상으로 진행되는 게임 속에서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공유자원에 대한 자율관리의 사례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자신도 중요하지만 남도 중요시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어떻게 잘 작동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최정규 |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문제는 이러한 시장의 실패가 경제학 교과서 맨 뒤편에 과수원 주인과 양봉업자의 관계를 예로 들어 잠시 등장하고 말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출근을 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 다수와의 약속을 지킬 것인지의 문제, 얼마만큼 교육을 받고 얼마만큼 지식을 축적할 것인가의 문제, 얼마나 많은 전기를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 가진 돈을 부동산에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 내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켜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문제, 투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 등을 둘러싼 우리의 결정은 그 결정을 내린 당사자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러한 사안들을 둘러싼 우리의 의사결정이 내 자신의 이익만을 기초로 이루어질 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내가 한 행동이 남에게 끼치는 영향을 감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http://img.khan.co.kr/news/2013/10/04/l_2013100501000538400053273.jpg)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시장은 완전하기 때문에 개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해의 충돌이 시장에서 원만히 해결될 것이라고 믿은 때가 있었다. 서로 주고받는 영향에 대해 (완전한) 시장이 적정한 가격을 매길 것이므로, 누군가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면 그 영향만큼 그 행위자에게 가격을 지불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바꿔 말하면, 시장이 완전하지 않은 경우 시장은 서로간에 주고받는 영향력을 제대로 평가해내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시장이 완전하지 않은 경우, 혹은 부재한 경우 서로간 이해의 충돌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게 된다. 이때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둘러싼 선택을 내리면서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지를 고려하는 것,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영향력을 둘러싼 상호 견제와 스스로의 절제 등이 필요하다. 개인들은 이 속에서 자신들의 행동의 사회적 책임성을 자각하고,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고려해서 행동하게 된다.
1980년대 이후 많은 이들이 이러한 ‘실패’를 교정할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어떤 이들은 시장의 실패가 문제이므로 이는 국가의 개입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폈고, 또 다른 이들은 시장의 부재가 원인이므로 이는 시장의 도입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어떤 경우에는 시장이 갖고 있는 한계가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경우는 시장의 부재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국가냐 시장이냐의 이분법을 뚫고, 기존의 시각에서는 벗어나 있던 아주 흥미로운 사례들이 보고되면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200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뇨 오스트롬 교수의 작업이 대표적이다. 오스트롬 교수는 기존의 시각으로 볼 때는 ‘뜬금없이’, 소규모 어촌 공동체에서 어떻게 자율적 어장 관리가 이루어지고, 산악지역 마을에서 어떻게 공유삼림을 관리해왔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었다. 이들 사례 속에서 개인들은 시장과 국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오랜 역사 속에서 자발적인 참여와 서로간의 자율적 행위 규제 등을 통해 시장의 실패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왔다. 어장에서 어획량을 결정하고, 삼림에서 채취할 수목의 양을 결정하며, 어떤 차례로 논에 물을 댈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익이 늘어날 때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사람들이었다.
![](http://img.khan.co.kr/news/2013/10/04/l_2013100501000756300053341.jpg)
‘우리’는 사회의 기초이며 공동체의 기본단위다. 우리는 크게는 민주주의, 작게는 이웃들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시장 만능주의와 경쟁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감이 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우리끼리 도와주는 미덕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잃었던 우리를 도로 되찾을 때다. 경향신문은 창간 67주년을 맞아 협동조합원을 비롯해 지방이민, 이주민, 땅콩집 주민 등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 주변의 이웃을 찾았다. 강원 원주 협동조합원들이 4일 협동조합 출범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 기념관에 모였다. 왼쪽부터 이희영(육아협동조합), 권용원(노인생협), 정용호(밝음신협), 김경숙(로컬푸드카페협동조합), 김달현(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송경관(의료생협) 조합원. 원주 | 강윤중 기자
많은 경제학자들이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경제주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는 도덕적인 경제주체들의 모습을 찾아내고, 이들의 존재가 경제적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자기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이익도 고려하는 사람들, 평등한 분배 상태를 선호하는 사람들, 자신의 몫을 희생하면서까지 불공정함을 시정하려는 바람을 갖는 사람들, 남을 신뢰하고 상대방의 신뢰에 보답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제는 경제학 문헌에서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그리고 어촌 공동체뿐 아니라 위키피디아에서도, 그리고 리눅스라는 컴퓨터 운영체제에서도, 윤리적 소비나 협동조합들에서도 그런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가져온 물질적 성공의 배경에 경쟁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에 토를 달 필요는 없다. 애덤 스미스는 경쟁에 기초한 ‘상업사회’가 하층 농부조차도 예전 유럽의 왕자보다 더 잘살게 만들어준 물질적 성과뿐 아니라 상업활동을 벌이는 사람들 사이에 협동하고 절제하며 다른 이의 요구에 맞출 줄 아는 새로운 도덕성도 만들어낼 것이라고 기대한 바 있다. 애덤 스미스가 경쟁이 가져올 물질적 그리고 도덕적 성과에 대해 낙관적인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경쟁이 전체 파이(애덤 스미스는 이를 가리켜 국부라고 불렀다)의 크기를 증가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경쟁은 애덤 스미스가 바라봤던 모습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경쟁은 전체 파이의 크기를 증가시키는 수단이기보다 주어진 파이에서 각자의 몫을 증대시키는 수단으로만 기능하기 시작했다. 의자의 수를 늘리지 못한 채 모자란 의자를 놓고 서로 뺏는 양상으로 진행되는 게임 속에서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공유자원에 대한 자율관리의 사례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자신도 중요하지만 남도 중요시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어떻게 잘 작동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최정규 |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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