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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5) 유신·신자유주의 그리고 하이에크

ngo2002 2013. 9. 11. 10:57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5) 유신·신자유주의 그리고 하이에크

ㆍ욕망이라는 이름의 ‘경쟁열차’

유신체제 붕괴가 1년 남짓 남은 1978년 9월9일 오후, 김포공항에는 귀빈을 넘어 ‘진객’으로 불린 팔순의 노경제학자 한 명이 홍콩으로부터 막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F A von Hayek). 주지하듯이 그는 밀턴 프리드먼과 함께 20세기 신자유주의의 최고봉을 이루는 헌신적인 자유지상주의자로,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20여년간 지속되던 케인지안 시대의 종결자가 되어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만개를 알린 인물이었다. 최고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그가 최악의 반자유주의적 유신 국가를 방문한 까닭은 무엇일까.

■ 경제개발이 불러 온 사회·문화적 자유주의

1978년 9월 방한해 최각규 상공장관, 전경련 관계자들과 만난 신자유주의 이론가 하이에크.

어느덧 시대의 총아가 된 자유주의를 키워드로 1970년대를 검색해보면 무엇이 나올까. 먼저 정치 영역에서는 자유주의와 반자유주의가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 1970년대 정치와 운동을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이해하는 것이 지배적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 자유주의 대 반자유주의의 성격이 짙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전격 처형에서 보이듯이 상궤를 벗어난 체제의 살벌함은 수많은 지식인들을 민주화 운동으로 몰아갔고 그들이 붙잡은 핵심적 가치가 곧 자유주의였다. 사상·양심·언론·출판의 자유와 함께 인권이 저항운동의 마르지 않는 이념적 저수지 역할을 했다. 요컨대 자유주의라 쓰고 민주주의라 읽은 셈이었다.

사회·문화 영역에서도 자유주의는 상당량의 검색 결과를 보여줄 터였다. 이른바 ‘통블생’과 장발로 대표되는 청년층의 대중문화 흐름은 서구 자유주의와 긴밀히 연동되는 것이었고, 문단의 자유주의를 상징했던 ‘문학과지성’이 1970년 창간됐다. 유신체제는 이런 흐름을 ‘서구의 노라리풍’이라고 노골적 경멸의 시선으로 응시했으며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라는 민족주의적 비아냥도 들려왔다. 요컨대 개인에 눈뜨고 개인의 자유를 열망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유신의 한복판에서 대거 출현한 셈이었는데, 실상 이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체제가 명운을 걸고 추진한 경제개발이었다.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 서구화 그리고 대중사회화가 기본 배경을 이룬다고 본다면 자유주의는 유신의 사생아일 것이다.

그런데 시장의 자유주의는 어떠했을까? 경제 유신으로 불리는 8·3 조치나 중화학공업화 등은 박정희가 총사령관이 돼 추진한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으며 아무래도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사실 유신체제가 하이에크의 방한을 반겼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8박9일의 짧지 않은 체류기간 중 그가 만난 정부 고위 관료는 최각규 상공장관 정도였고 환영 만찬장에도 정부 측 인사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매일경제와 동아일보가 하이에크 방한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동아일보는 특파원을 동원해 홍콩에서부터 하이에크를 취재했는가 하면 조순, 김입삼 등과의 대담까지 마련하는 등 정성껏 대우했다.

■ 신자유주의자 하이에크를 초정한 전경련

하이에크를 초청한 주체는 다름 아닌 전경련이었다. 전경련이 그를 초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세계적 석학이라는 것이 한 이유였을 것이다. 노벨상으로 상징되는 서구 지식체계에 대한 한국 사회 및 엘리트 지식인들의 오래된 콤플렉스를 생각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경련이 이런 이유만으로 그를 초청할 리는 없었다.

하이에크의 핵심 키워드는 자유, 경쟁, 시장으로 요약됐다. 그의 기본 입장은 개인에게 모든 지식이 축적될 수는 없기에 분산된 지식이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최악의 시장이 최고의 계획보다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적 자유를 보증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관’에 불과하고 ‘국가의 감시 아래 있는 시장 대신 시장의 감시 아래 있는 국가’가 목표였다. 그는 또한 경제적 자유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는데,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 또한 경제의 자유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주장했다. 하이에크가 방한 도중 중앙은행의 발권기능 폐지와 민간은행의 자유 경쟁을 주장해 대담자를 당황시켰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1978년 남덕우 부총리 주재로 열린 경제장관회의는 수입 개방을 무기로 통화 및 물가 안정을 이루겠다고 결의했다. 남덕우 부총리(태극기 앞자리) 왼쪽으로 김용환 재무, 최각규 상공, 신형식 건설, 오른쪽으로 장덕진 농수산, 장예준 동력자원, 신현확 보건 사회부 장관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이에크의 방한은 확실히 신자유주의의 좋은 계기였다. 동아일보는 “자유의 고귀함을 깨닫게 되고 민간 창의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하이에크의 내한은 이 이상 값진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는가 하면, 당시 친정부지였던 경향신문의 ‘정경문화’ 1978년 9월호에는 “자유사회인 한 경제발전의 주인공이 민간기업이지 정부의 계획당국이 아니라는 점은 너무 당연한 이치”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하이에크 방한에 즈음한 1970년대 중·후반의 자본은 확실히 국가권력의 입만 바라보던 왕년의 그들이 아니었다. 1973~1978년 사이 46대 재벌이 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8%에서 17.1%로 높아졌다. 커진 덩치만큼이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전경련 회장으로 하이에크 초청의 주역이었던 정주영은 1978년 12월28일 국무총리 초청 간담회에서 정부의 전환기적 결단을 촉구하면서 민간이 담당할 수 있는 부문은 민간에 넘겨 자율성을 부여하고 시장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9년 1월17일에는 경제 4단체장과 경영자협회장이 신현확 부총리를 초청해 ‘관·민 합동간담회’를 개최해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가격정책, 금융기관의 자율적 운영, 자율적 임금 결정 등을 요구했다.

재벌은 무소불위의 유신체제에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압박했는가 하면, 실질적으로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핵심 동력이 되어갔다. 1977년 의료보험 전격 실시가 가능했던 요인은 전경련으로 대표된 재벌들의 동의 때문이었다. 재벌그룹 문화재단들이 집중적으로 설립되는가 하면 각종 스포츠 단체장을 재벌기업 회장들이 장악하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부터였다. 요컨대 자본의 사회적 형식으로서 기업은 시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스며들고 국가로 역류했다.

하이에크의 방한 직후인 1978년 12월 유신의 마지막 개각이 이루어졌는데, 9년간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남덕우 대신 신현확이 경제부총리로 기용된 것이 핵심이었다. 이 개각은 일차적으로 경제안정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의 전환이었다. 신현확 경제팀이 1979년 4월에 발표한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의 핵심 지향은 시장기능의 강화와 민간 자율성의 확대였다. 유신 말기 핵심 경제관료였던 강경식은 안정화 시책을 한마디로 “관 주도에서 시장경제로 가는 것”으로 정리하면서 “성장에서 안정으로, 보호에서 개방으로, 경쟁 촉진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정부 정책의 철학을 180도 바꾼” 것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김만제가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 계획은 미국 시카고학파의 영향력이 유신 국가를 집어삼키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뒤이어 1980년에는 1966년 이래의 과제였던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이듬해 공포됐다. 이로써 하이에크가 강조한 자유경쟁이 흘러넘칠 공정한 시장에의 꿈이 영글어갔다.

■ 자본이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으로

물론 이러한 전환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8·3 조치 직전인 1971년 2월 국무총리에 임명된 백두진의 첫 기자회견은 민간주도형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재벌들도 앞다투어 비슷한 주장을 반복했다. 이 기조는 8·3 조치와 유신 선포, 중화학공업화를 거치면서 잠시 유예되었지만 결국 10년도 안되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자본의 궁극적 목적일까. 자본이란 움직이는 화폐이고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어야 하는 영겁회귀의 운동이다. 즉 자본은 잉여가치 추출의 최적화된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한다. 8·3 조치의 반자유주의와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는 자본에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다만 자본 증식의 최적화된 조건의 역사적으로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 정주영에게 박정희와 하이에크는 자본 증식을 위한 하나의 도구, 잉여가치 창출에 투입되어야 할 산 노동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무한증식의 자본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 자체를 자신의 모습대로 복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사회체제 내부에 기업의 형식을 파급시키는 것이자 그 기업 형식으로 모든 주체들을 복제하는 것이었다. 마치 암세포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모습대로 복제해내는 자본의 위력이 1970년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바야흐로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제된 1970년대는 욕망과 경쟁이라는 키워드로 압축 가능하다. 1977년 아파트 입주는 178 대 1이라는 상상도 못할 경쟁률을 뚫어야 가능했고, 1978년 국회 직원 단 5명 모집에 2000명 이상이 지원해 400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한국의 시장은 이미 충분히 가혹해졌다. 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경쟁열차는 이미 오래전에 출발했을 것이다. 사회진화론, 문명 개화, 계몽, 실력 양성, 근대화, 선진화 등 한국의 근현대 역사 속에 명멸했던 다양한 담론들이 모두 동일한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그 종착역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 중에 김승제가 있다. 1962년부터 오랫동안 수원문화원장을 지낸 자수성가형 사업가 김승제는 1970년 1월27일자 경기연합일보에 ‘신춘유감’이란 글을 투고했다. “1970년대를 가리켜 어느 외국학자는 ‘경쟁의 시대’라고 부르고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국제적 생존경쟁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 우리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누구도 이 치열한 경쟁의 권외에 설 수는 없는 것이다. 잘살고 못사는 것도 경쟁의 결과요, 지배와 피지배의 요인도 또한 경쟁의 소산인 것이다.”

그렇기에 김승제는 “경쟁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만 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이에크가 정교한 논리로 설파한 신자유주의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경쟁논리가 1970년대 벽두에 지방 문화원장의 뇌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논리는 그가 1973년 5월9일 서울의 마천루 어느 곳에서 허공으로 몸을 날리기 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투신 이유는 사업 실패로 알려졌다. 죽마고우였던 선경 창업자 최종건의 도움을 뿌리친 그의 선택은 사업 실패가 단지 경제적인 성공과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와 연루되는 상황이었음을 암시한다. 기업 형식으로 재구성된 호모 이코노미쿠스에게 기업이 생존할 수 없다면 그 형식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미 사탄의 맷돌은 돌아가고 있었고 그것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유신체제조차 이 맷돌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입력 : 2013-08-30 21:49:20수정 : 2013-08-31 15: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