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3) 전태일, 열사 그리고 김진숙의 외침
ㆍ새 세상 꿈꾸는 노동자들의 영원한 영웅 ‘전태일’
지난 7월, 학생들과 함께 ‘made in 창신동’ 전시를 보러 갔다. 이제는 사라져 가는 창신동에는 전태일과 시다들의 기억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전시장 한구석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병철은 전시 안 하고 전태일만 전시하남….” 그분에게 창신동의 기억과 전태일은 여전히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박광수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이다. 전태일을 역사화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만든 이 작품을 보고 뭔가 개운치 않았다. 지식인의 보호와 배려 대상으로 그려진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편치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지식인 친구를 그토록 원했던 전태일과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부채의식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전태일 주변 여성노동자들이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은 불만스러웠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1990년 상영된 독립영화 <파업전야> 이야기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인공이 기계를 끄고 스패너를 들고 공장 밖으로 달려 나가는 장면이다. 주인공 한수가 든 스패너는 1980년대 노학연대의 상징인 동시에,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 노동운동이 지향한 ‘노동자상’이었다. 이런 3가지 에피소드처럼 우리들 안에는 ‘여러 개의 전태일’이 있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 전태일 열사, ‘유신’ 속의 전태일
창신동 인근, 과거 평화시장 주변을 덮었던 전태일의 삶의 공간은 전태일의 분신에 관한 기억이 역사화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잊혀지기 어려운 장소였다. 청계피복노동조합가 데모할 때면 이곳에서 시작하곤 했다. 1958년 청계천 복개 이전부터 수차례에 걸친 화재 발생과정을 거쳐 1962년 2월에 시장개설 허가가 나왔다. 평화시장, 통일상가 그리고 동화상가는 당시 의류 내수시장의 80%를 차지하며 가난한 시절을 감싸안았다. 내수 의류를 거의 이곳에서 공급했기에 상가 내에 있던 공장들은 점차 상가 밖으로 밀려나 창신동 인근 건물과 주택까지 파고들었다. 이소선 여사의 투쟁, 청계피복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9·9투쟁, 청계피복노조 정상화 그리고 1980년 신군부의 강제적 해산 이후 투쟁 등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다만 유신 시절에 전태일의 죽음, 그리고 열사로서의 의미가 1980년대와 같진 않았다. 1970년대 전태일은 교회의 추도 형식을 띤 예수의 부활이나 민중의 한 등으로 이야기됐다. 1970년대 당시 반유신에 앞장섰던 함석헌, 도시산업선교회 지식인들은 전태일의 분신을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했다. 바로 주위의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보호해준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에게 중요한 것은 여공들을 보호해주는 것이었다. 소녀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싱을 돌리고 가위를 잡고, 희미한 눈동자로 잠을 참는 비참한 노동환경이 그녀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전태일이 쓴 글을 모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에는 당시 비참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아이롱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으니 정말 죽고 싶다. (…) 육체적 고통이 나를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청계피복노조, 동일방직, 원풍모방,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터 등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 유신정부, 고용주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던 한국노총에 맞서 이들은 최대로 힘을 내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전태일이란 세 글자는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전태일에게 대학생 친구가 되지 못했던 지식인들에게는 ‘연대’ 혹은 ‘부채’라는 이름으로 계속 남았다.
■ 전태일, ‘열사’로 살아나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이후 1980년대로 이어지는 열사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죽는 분신은 다른 사회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저항 방식’이었다. 힌두교에서 사티(suttee)와 같이 과부가 남편의 시신을 화장할 때 자신의 몸을 던져 죽는 순사와 달리, 한국에서 분신이 지닌 저항적 의미는 변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열망에도 지배권력의 압도적인 폭력성으로 인해 이를 실현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였다.
전태일 이후 열사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분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은폐된 자살이 아닌 공개된 자살이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군중을 의식한 점이다. 이처럼 분신과 열사가 잇달아 일어나며 그 안에 ‘열사 전태일’의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1986년 신흥정밀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를 철회하라, 노동3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박영진 열사도 죽어 가면서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000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전태일이 1000만 노동자의 상징이자 열사로 자리 잡은 본격적 계기는 1988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였다.
당시 분위기를 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난해 11월13일 전태일 열사 추모일의 그 장엄한 광경을 (…) ‘노동악법 철폐하고 노동해방 앞당기자’ (…) 전태일은 그렇게 살아 있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우리 노동자의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달려가 그 한가운데 서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형제들이여! 내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말라’고….” 이를 반영하듯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를 정점으로 거의 모든 노제의 시작은 “전태일 열사여”로 시작될 정도로 열사 일반, 노동열사로서 전태일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컸다.
노동자들은 ‘나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란 등사물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켰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유언은 분노와 각성의 계기가 됐다. 또 학교시절 교사로부터 들은 전태일 이야기가 이후 학생운동, 노동현장에 들어가게끔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기도 할 정도로 전태일에 대한 신념은 종교에 가까울 정도였다.
열사에 대한 애도와 일체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각종 운동의례로 드러나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기점으로 열사에 대한 거리노제, 걸개그림, 깃발, 만장, 대형 이동그림, 열사 영정 등을 통해 열사의 영웅화가 계속됐다. 해방 직후 김구 장례식에서 볼 수 있었던 노제가 1980년대 전태일과 그 후예들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1988년에 제작된 <노동해방도>(최병수 작품)는 대형 앰프 위에 배치된 3명의 노동자를 통해 전태일의 후예들이 지향하는 노동자상을 그려냈다.
바로 전태일 열사는 한 가족의 자식이 아닌 ‘천만 노동자의 아들’이자 죽음을 통해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는 ‘영웅’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또 전태일과 그 이후 노동열사들의 죽음은 열사만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열사의 죽음을 둘러싸고 존재하던 폭력의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의 신체, 언어 등을 열사의 것과 ‘일체화’시킴으로써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역사의 증언자로 자신을 변모시키고자 했다.
■ 전태일, ‘역사’가 될 것인가?
다시 평화시장, 창신동으로 돌아와 보자. ‘made in 창신동’ 전시 공간에는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사계’가 울려 퍼졌다. 그 주변에는 복원된 다락방, 미싱, ‘시다 구함’이란 전단지 등이 전시됐다.
문득 든 생각은 전태일은 ‘과거의 역사’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었다. 1970년 어린 여공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고,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자 노동자들이 바랐던 인간형이었던 전태일을 우리는 1970년대 산업화 과정의 어두운 그림자의 한 자락 혹은 어두운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겨야 할까? 1980년대가 전태일을 한 사람의 노동자가 아닌 열사와 그를 따랐던 투사로 만들었듯이, 1970년 전태일의 유서와는 다른 세계를 우리는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김진숙,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김주익 열사 추모사’ 중에서)
2003년 김주익 열사를 보내며 한 김진숙의 이 외침에 눈물로만 답해서는 안되지 않는가.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지난 7월, 학생들과 함께 ‘made in 창신동’ 전시를 보러 갔다. 이제는 사라져 가는 창신동에는 전태일과 시다들의 기억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전시장 한구석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병철은 전시 안 하고 전태일만 전시하남….” 그분에게 창신동의 기억과 전태일은 여전히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박광수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이다. 전태일을 역사화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만든 이 작품을 보고 뭔가 개운치 않았다. 지식인의 보호와 배려 대상으로 그려진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편치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지식인 친구를 그토록 원했던 전태일과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부채의식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전태일 주변 여성노동자들이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은 불만스러웠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1990년 상영된 독립영화 <파업전야> 이야기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인공이 기계를 끄고 스패너를 들고 공장 밖으로 달려 나가는 장면이다. 주인공 한수가 든 스패너는 1980년대 노학연대의 상징인 동시에,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 노동운동이 지향한 ‘노동자상’이었다. 이런 3가지 에피소드처럼 우리들 안에는 ‘여러 개의 전태일’이 있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의 상징이자 열사로 자리매김한 전태일을 1970년대 산업화 과정의 어두운 그림자의 한 자락으로만 남겨야 할까. 사진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내에 재현된 1970년대 봉제공장 세트. | 박민규 기자 parkyu@kyunghyang.com
■ 전태일 열사, ‘유신’ 속의 전태일
창신동 인근, 과거 평화시장 주변을 덮었던 전태일의 삶의 공간은 전태일의 분신에 관한 기억이 역사화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잊혀지기 어려운 장소였다. 청계피복노동조합가 데모할 때면 이곳에서 시작하곤 했다. 1958년 청계천 복개 이전부터 수차례에 걸친 화재 발생과정을 거쳐 1962년 2월에 시장개설 허가가 나왔다. 평화시장, 통일상가 그리고 동화상가는 당시 의류 내수시장의 80%를 차지하며 가난한 시절을 감싸안았다. 내수 의류를 거의 이곳에서 공급했기에 상가 내에 있던 공장들은 점차 상가 밖으로 밀려나 창신동 인근 건물과 주택까지 파고들었다. 이소선 여사의 투쟁, 청계피복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9·9투쟁, 청계피복노조 정상화 그리고 1980년 신군부의 강제적 해산 이후 투쟁 등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다만 유신 시절에 전태일의 죽음, 그리고 열사로서의 의미가 1980년대와 같진 않았다. 1970년대 전태일은 교회의 추도 형식을 띤 예수의 부활이나 민중의 한 등으로 이야기됐다. 1970년대 당시 반유신에 앞장섰던 함석헌, 도시산업선교회 지식인들은 전태일의 분신을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했다. 바로 주위의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보호해준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에게 중요한 것은 여공들을 보호해주는 것이었다. 소녀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싱을 돌리고 가위를 잡고, 희미한 눈동자로 잠을 참는 비참한 노동환경이 그녀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전태일이 쓴 글을 모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에는 당시 비참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아이롱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으니 정말 죽고 싶다. (…) 육체적 고통이 나를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청계피복노조, 동일방직, 원풍모방,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터 등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 유신정부, 고용주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던 한국노총에 맞서 이들은 최대로 힘을 내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전태일이란 세 글자는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전태일에게 대학생 친구가 되지 못했던 지식인들에게는 ‘연대’ 혹은 ‘부채’라는 이름으로 계속 남았다.
■ 전태일, ‘열사’로 살아나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이후 1980년대로 이어지는 열사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죽는 분신은 다른 사회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저항 방식’이었다. 힌두교에서 사티(suttee)와 같이 과부가 남편의 시신을 화장할 때 자신의 몸을 던져 죽는 순사와 달리, 한국에서 분신이 지닌 저항적 의미는 변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열망에도 지배권력의 압도적인 폭력성으로 인해 이를 실현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였다.
전태일 이후 열사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분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은폐된 자살이 아닌 공개된 자살이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군중을 의식한 점이다. 이처럼 분신과 열사가 잇달아 일어나며 그 안에 ‘열사 전태일’의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1986년 신흥정밀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를 철회하라, 노동3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박영진 열사도 죽어 가면서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000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시절의 전태일
하지만 전태일이 1000만 노동자의 상징이자 열사로 자리 잡은 본격적 계기는 1988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였다.
당시 분위기를 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난해 11월13일 전태일 열사 추모일의 그 장엄한 광경을 (…) ‘노동악법 철폐하고 노동해방 앞당기자’ (…) 전태일은 그렇게 살아 있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우리 노동자의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달려가 그 한가운데 서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형제들이여! 내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말라’고….” 이를 반영하듯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를 정점으로 거의 모든 노제의 시작은 “전태일 열사여”로 시작될 정도로 열사 일반, 노동열사로서 전태일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컸다.
노동자들은 ‘나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란 등사물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켰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유언은 분노와 각성의 계기가 됐다. 또 학교시절 교사로부터 들은 전태일 이야기가 이후 학생운동, 노동현장에 들어가게끔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기도 할 정도로 전태일에 대한 신념은 종교에 가까울 정도였다.
열사에 대한 애도와 일체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각종 운동의례로 드러나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기점으로 열사에 대한 거리노제, 걸개그림, 깃발, 만장, 대형 이동그림, 열사 영정 등을 통해 열사의 영웅화가 계속됐다. 해방 직후 김구 장례식에서 볼 수 있었던 노제가 1980년대 전태일과 그 후예들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1988년에 제작된 <노동해방도>(최병수 작품)는 대형 앰프 위에 배치된 3명의 노동자를 통해 전태일의 후예들이 지향하는 노동자상을 그려냈다.
바로 전태일 열사는 한 가족의 자식이 아닌 ‘천만 노동자의 아들’이자 죽음을 통해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는 ‘영웅’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또 전태일과 그 이후 노동열사들의 죽음은 열사만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열사의 죽음을 둘러싸고 존재하던 폭력의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의 신체, 언어 등을 열사의 것과 ‘일체화’시킴으로써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역사의 증언자로 자신을 변모시키고자 했다.
■ 전태일, ‘역사’가 될 것인가?
다시 평화시장, 창신동으로 돌아와 보자. ‘made in 창신동’ 전시 공간에는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사계’가 울려 퍼졌다. 그 주변에는 복원된 다락방, 미싱, ‘시다 구함’이란 전단지 등이 전시됐다.
문득 든 생각은 전태일은 ‘과거의 역사’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었다. 1970년 어린 여공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고,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자 노동자들이 바랐던 인간형이었던 전태일을 우리는 1970년대 산업화 과정의 어두운 그림자의 한 자락 혹은 어두운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겨야 할까? 1980년대가 전태일을 한 사람의 노동자가 아닌 열사와 그를 따랐던 투사로 만들었듯이, 1970년 전태일의 유서와는 다른 세계를 우리는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김진숙,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김주익 열사 추모사’ 중에서)
2003년 김주익 열사를 보내며 한 김진숙의 이 외침에 눈물로만 답해서는 안되지 않는가.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입력 : 2013-08-16 21:20:47ㅣ수정 : 2013-08-16 22: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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