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산행,걷기)

[신정일의 길]느릿느릿 걷는 즐거움

ngo2002 2012. 10. 12. 09:36

[신정일의 길]느릿느릿 걷는 즐거움 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이행(李行)은 조선 초기의 문장가로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다. 늙어서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황해도 강음현 산내면에서 살았다. 호가 기우자(騎牛子)이다. 사람들이 호를 지은 까닭을 묻자, “소의 걸음처럼 느릿느릿 걸어가면 사물을 살피고 이치를 탐구하기에 편하다”고 대답했다. 양촌 권근이 이행과 함께 평해에서 지냈던 최참지로부터 이행의 말을 전해 듣고 한 편의 글을 지었다. 그 글이 <기우(騎牛)에 대한 설>(기우는 이행의 호)이다.

 

“나는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는 데에는 오직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어진 뒤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나의 벗 이공 주도가 평해에 살면서, 매양 달밤이면 술을 갖고 소를 타고서 산수 사이에 놀았다. 평해는 명승지로 일컫는 곳이라, 이공은 옛사람이 채 알지 못한 묘한 유람의 즐거움을 다 알았을 것이다. 무릇 물체를 볼 때 빠르면 정(精)하지 못하고 더디면 그 묘한 것을 다 볼 수 있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 … 만사를 뜬구름같이 여기고 긴 휘파람을 맑은 바람에 보내며 소를 놓아 가는 대로 따르고 생각나는 대로 스스로 술을 부어 마시면 가슴이 확 틔어 스스로 그 낙이 있으리니, 이 어찌 사사로움에 매인 자가 능히 할 바이랴! …소를 타는 즐거움을 그 누가 알랴!”
나는 자동차 운전은 물론이거니와 자전거도, 오토바이도 못 탄다. 중국의 창산을 오르면서 가슴 졸이며 말을 타 본 것 외에는 소도 타본 적이 없다. 1991년 가을에 받은 유일한 면허증인 2종 운전면허증이 10년 무사고가 되자, 운전 한 번 안 하고도 녹색면허증에 1종 면허증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으니 그야말로 ‘장롱 면허증’인 셈이다. 얼마 전 일이다. 강연이 있어 논산시 벌곡면의 시골길을 가는데 어느 좁다란 농로에서 길이 끊겼다. 운전을 하고 있던 동행인이 앞으로만 갈 수 있지 뒤로 후진을 못한단다. 나는 도와줄 길도 없고, 그저 앞서가며 나를 따라오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차는 거의 제자리를 맴돌고 약속시간은 자꾸 다가오고 초조했다. 그때 마침 논물을 보러온 농부를 만나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아직 운전도 못하느냐는 듯 측은한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본다. 생각해보니 내가 잘하는 것이라곤 두 발로 여기저기를 떠도는 재주밖에 없다. 뜬 구름만큼, 흘러가는 강물만큼 가없는 나그네 신세. 그것이 팔자인지도 모르겠다. 혹여나 소를 탈 기회가 생겨도 성질이 급한 나는 내려서 걸어갈 게 뻔하고, 저만치 걸어가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소를 망연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터득한 것이 ‘느릿느릿 걷는 즐거움’이라면 그것마저도 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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