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느릿느릿 걷는 즐거움 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나는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는 데에는 오직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어진 뒤에야 그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나의 벗 이공 주도가 평해에 살면서, 매양 달밤이면 술을 갖고 소를 타고서 산수 사이에 놀았다. 평해는 명승지로 일컫는 곳이라, 이공은 옛사람이 채 알지 못한 묘한 유람의 즐거움을 다 알았을 것이다. 무릇 물체를 볼 때 빠르면 정(精)하지 못하고 더디면 그 묘한 것을 다 볼 수 있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 … 만사를 뜬구름같이 여기고 긴 휘파람을 맑은 바람에 보내며 소를 놓아 가는 대로 따르고 생각나는 대로 스스로 술을 부어 마시면 가슴이 확 틔어 스스로 그 낙이 있으리니, 이 어찌 사사로움에 매인 자가 능히 할 바이랴! …소를 타는 즐거움을 그 누가 알랴!” 나는 자동차 운전은 물론이거니와 자전거도, 오토바이도 못 탄다. 중국의 창산을 오르면서 가슴 졸이며 말을 타 본 것 외에는 소도 타본 적이 없다. 1991년 가을에 받은 유일한 면허증인 2종 운전면허증이 10년 무사고가 되자, 운전 한 번 안 하고도 녹색면허증에 1종 면허증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으니 그야말로 ‘장롱 면허증’인 셈이다. 얼마 전 일이다. 강연이 있어 논산시 벌곡면의 시골길을 가는데 어느 좁다란 농로에서 길이 끊겼다. 운전을 하고 있던 동행인이 앞으로만 갈 수 있지 뒤로 후진을 못한단다. 나는 도와줄 길도 없고, 그저 앞서가며 나를 따라오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차는 거의 제자리를 맴돌고 약속시간은 자꾸 다가오고 초조했다. 그때 마침 논물을 보러온 농부를 만나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아직 운전도 못하느냐는 듯 측은한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본다. 생각해보니 내가 잘하는 것이라곤 두 발로 여기저기를 떠도는 재주밖에 없다. 뜬 구름만큼, 흘러가는 강물만큼 가없는 나그네 신세. 그것이 팔자인지도 모르겠다. 혹여나 소를 탈 기회가 생겨도 성질이 급한 나는 내려서 걸어갈 게 뻔하고, 저만치 걸어가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소를 망연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터득한 것이 ‘느릿느릿 걷는 즐거움’이라면 그것마저도 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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