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년의 경은 오행 중 금 … 금은 흰색에 해당돼 올해가 백호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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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기자
문= 십이지(十二支) 중 호랑이띠의 특징은.
답= 우리나라 사람들은 띠 동물의 생태적 특징을 사람의 성격·운명과 결부시켜 풀이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호랑이는 동물의 왕으로 모든 동물에게 위협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호랑이띠는 남의 밑에 들기 싫어하는 성격에 통솔력이 강하다고 풀이된다. 옛날엔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야생동물을 퇴치하기 위해 호랑이 똥을 뿌려놨다.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동물들이 그 똥만 보아도 도망쳐서다. 그 정도로 무서운 백수의 왕이기에 옛날 사람들은 ‘호랑이띠가 있는 집안은 짐승이 안 된다’고 했다. 호랑이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혼자 살아간다. 수컷은 교미가 끝나면 제 영역으로 돌아가고, 새끼 역시 생후 2년이 되면 어미에게서 냉혹하게 쫓겨난다. 피를 나눴다 하더라도 아비의 영역에 잘못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호랑이띠는 자식 복이 없다’고 했다. 호랑이는 야행성 동물이다. 망막에 색깔을 감지하는 원추세포는 없지만 명암을 느끼는 봉세포가 많아 희미한 빛만으로도 물체를 판단할 수 있다. 밤이 돼야 기백을 뽐낼 수 있기에 ‘호랑이띠 남자는 밤에 태어나는 게 좋다’는 속설이 있다. 여자는 그 반대로 봤다. 여자가 호랑이의 거친 성정이 발휘되는 밤에 태어나면 더 거세지리라는 관념 때문이다. 띠 궁합에서 호랑이띠와 닭띠는 원진(元嗔·서로 꺼리는 궁합) 관계라 서로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이 역시 호랑이의 야행성과 관련된 해석이다. 옛 사람들은 호랑이가 닭 울음을 가장 싫어한다고 여겼다. 닭이 울면, 즉 날이 밝으면 호랑이가 활개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 경인년이 백호띠라는데.
| 까치 호랑이. 19세기, 종이에 채색, 116.5X82cm, 삼성미술관리움 소장. 소나무 위에 앉은 까치가 호랑이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새해가 되면 까치 호랑이 그림을 내걸어 액운은 물리치고 즐거운 소식이 찾아오길 기원했다. | |
문= 민화에서 호랑이와 까치는 왜 함께 등장하나.
답= 정초엔 궁궐부터 민가까지 호랑이의 그림을 대문에 붙여 나쁜 귀신의 침입을 막는 풍속이 있었다. 백수의 왕인 호랑이는 능히 벽사(僻邪·사악한 기운을 물리침)에 효력이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새색시의 가마엔 호피나 호피 그림이 그려진 담요를 씌우고, 새신랑은 호랑이 발톱을 지녀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다. 집에 호랑이 그림을 걸어두면 관직이 높은 귀한 아들을 얻는다는 믿음도 있었다. 방문이나 대문 위에 호랑이 뼈를 끈에 꿰어 걸어두거나 베갯모에 호랑이 그림을 장식한 것도 벽사용이었다. 그런 호랑이는 다른 소재와 결합돼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곤 했다. 호랑이와 매가 함께 있으면 풍(風)·수(水)·화(火)에 의한 세 가지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여겨 삼재부적으로 쓰였다. 새해 벽두엔 ‘까치 호랑이’ 그림을 많이 걸었다. 호랑이의 벽사 기능에 까치가 즐거운 소식을 전하라는 뜻이 함께 담긴 것이다.
문= 한반도에선 언제부터 호랑이가 살았나.
| 경인(庚寅)년은 백호의 해다. 용인 에버랜드의 백호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중앙포토] | |
문= 한국호랑이가 왜 ‘시베리아호랑이’인가.
답= 호랑이는 원래 단일종이지만 지역에 따라 8개 아종(종을 세분한 분류 단위)으로 구분된다. 시베리아호랑이·중국호랑이·인도지나호랑이·벵골호랑이·수마트라호랑이·자바호랑이·발리호랑이·카스피호랑이 등이다. 한국의 호랑이는 학술적으로 그중 최대 아종인 시베리아호랑이(아무르호랑이)에 속한다. 이전엔 조선호랑이·만주호랑이 등으로 부른 적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이들이 국경을 달리할 뿐 형태나 습성엔 차이가 없다고 보아 단일명칭을 쓰기로 했다. 시베리아호랑이의 수컷은 전장(주둥이 끝~꼬리 끝)이 3m를 웃돌아 남방산 중 덩치가 크다는 인도 벵골호랑이(285㎝)보다 크다. 한국의 호랑이는 밝은 황갈색의 푹신한 모피에 적당히 성긴 검은 줄무늬, 흰 이마에 새겨진 뚜렷한 임금 왕(王)자 등 늠름한 기품을 뽐낸다. 야생에서의 수명은 약 15년. 호랑이는 한 골짜기에 한 마리만 산다는 말이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300㎢당 1마리가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루에 80~100㎞를 걸으며 영역을 순찰하고, 보폭은 약 80cm다. 멀리뛰기 4~5m, 높이뛰기 2m. 10m 아래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능력도 있고 사냥감을 덮치는 순발력도 대단하지만 전력질주할 수 있는 거리는 300m 정도로 지구력이 약한 편이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몸을 숨기며 목표물의 10~15m 근처까지 포복해 접근한 뒤 미동도 없이 머무르다 결정적인 순간에 기습한다. 그러나 사냥 성공 확률은 20%. 첫 공격에 실패하면 대개 재시도를 하지 않는다. 초식동물들의 뜀박질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흘쯤 굶는 일도 다반사다. 대신 큰 짐승을 사냥하면 한꺼번에 포식한다.
문= 한반도에 남은 호랑이의 흔적은.
답= 청동기~초기철기 유적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가 가장 오래된 호랑이 표현이다. 줄무늬 호랑이와 점박이 표범 등이 14마리 나온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는 서쪽 방위를 지키는 신수(神獸)로서 백호가 나타난다. 좌 청룡·우 백호·남 주작·북 현무의 사신 중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상상의 동물이다. 신라에선 십이지를 형상화한 토우의 하나로서 호랑이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백제 유물로는 5~6세기께 제작된 남성용 소변 용기 ‘호자(虎子)’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에는 석호(石虎)가 배치돼 있다. 정식 왕릉에는 2쌍, 사후(死後) 왕으로 추존된 경우엔 1쌍이 설치된다. 살찐 몸집에 얼굴이 큰 가분수형에 동그란 눈, 매부리코, 귀밑까지 올라간 입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민화에도 많이 남아 있다.
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랑이 기록은.
답=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다. 곰은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100일간 먹으라는 계율을 지켜 사람이 되고, 호랑이는 동굴을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흔히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천신족이 호랑이 부족이 아닌 곰 부족과 혈맹을 맺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곰은 단군신화 이후 그 흔적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곰 나루’라는 뜻의 백제시대 지명 ‘웅진’ 정도가 남아있긴 하지만 곰과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물도, 설화도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호랑이는 꾸준히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로 검색되는 기록만 635건에 달한다. 단군신화의 호랑이를 “문명화를 거부한 생명과 야성의 상징”이라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이용주 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호랑이는 중국이 퍼뜨린 유교적 문명과 질서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조선의 민중들은 문명에 길들여진 곰보다 길들여지길 거부하고 야생으로 돌아간 호랑이로부터 뿌리를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문= 한국의 호랑이는 다 어디 갔을까.
답= 1세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호랑이가 많기로 유명했다. 지금의 교통사고 사망률보다 호식(虎食)으로 죽을 확률이 더 높았으리라 추정될 정도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 2년 경상도에서 범에 물려 죽은 사람이 수백 명, 영조 30년에 경기도 지방에서 한 달 동안 범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120여 명이다. 영조 28년엔 경복궁 후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 호환(虎患)에 시달리던 조상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호랑이를 아예 신격화의 대상으로 끌어올렸다. 산신의 전령, 혹은 산신으로까지 모셨다. 조선 초에는 왕이 호랑이 머리를 놓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제왕 호랑이를 몰아낸 건 결국 사람이다. 고구려 벽화의 수렵도, 고려 ‘청동 수렵무늬 거울’(숭실대박물관 소장) 등에 호랑이를 사냥하는 그림이 나온다. 호랑이 사냥이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화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다. 호랑이 포획을 전문으로 하는 군사 조직 ‘착호군’을 조직하고 호랑이를 잡으면 포상하는 ‘포호포상제’도 마련했다. 호랑이를 많이 잡아 그 가죽을 진상한 지방 수령은 곧바로 승진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들어선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가 호랑이 사냥을 주도했다. 숙종 22년에는 평안도의 착호아병(호랑이 사냥 전문병사)만 1만1000명이었다. 호랑이가 절멸하게 된 것은 일제 때문이다. 호환을 없애준다는 핑계로 토벌대를 만들어 신식 고성능 총으로 사냥에 나섰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중 기록이 남아 있는 것만 합하면 18년간 호랑이 97마리, 표범 624마리가 포획됐다. 기록이 없는 기간까지 감안하면 호랑이만 300두 이상 포획되었으리라 추정된다. 1940년 한 마리가 포획되었다는 기록이 한국 호랑이의 마지막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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