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지식

[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⑮ 동북 제2의 도시 하얼빈(哈爾濱)

ngo2002 2012. 7. 30. 11:53

[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⑮ 동북 제2의 도시 하얼빈(哈爾濱)

[중앙일보] 입력 2012.02.22 00:50 / 수정 2012.02.22 00:50

2000년 전 부여의 땅 … 마오쩌둥이 중국 수도로 점찍었던 하얼빈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최신 유행의 도시, 이글거리는 여름에도 청량하고 쾌적한 도시, 청춘의 낭만이 충만한 곳, 동북의 호탕함을 뿜어내는 곳. 유럽의 풍취와 동북의 정서가 넘치고 적막하지 않으며 담장이 없이 얼음의 성으로 불리는 도시. 바로 동북 제2의 도시 하얼빈(哈爾濱)이다. 하얼빈의 역사와 이야기 속으로 떠나보자.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 사랑한 하얼빈 거리

지난 1월 하얼빈 태양도에서 펼쳐진 제13회 국제 빙설축제의 야경. 쑹화강에서 캐낸 18만㎥의 얼음과 16만㎥의 눈을 이용해 만든 대형 조각들이 선보였다. [하얼빈 신화=연합뉴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1907~42)은 1939년 초가을과 40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만주국 하얼빈을 찾았다. 사랑하던 아내와 작은아들을 잃은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귀국 후 단편소설 ‘하얼빈’에 당시의 심경을 담았다.

“호텔이 키타이스카야의 중심지에 있자 방이 행길 편인 까닭에 창기슭에 의자를 가져가면 바로 눈 아래에 거리가 내려다보인다.” ‘하얼빈’의 첫 문장이다. 키타이스카야는 러시아어로 ‘중국인의 거리’다. 하얼빈 도시 건설기 중국인 노동자들이 건설 자재를 운반하던 길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1928년 중앙대가(中央大街)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효석이 묵던 호텔은 1906년 러시아 유대상인이 하얼빈의 미래를 보고 거액을 투자해 완공한 아르누보(신예술) 스타일의 3층 건물 ‘모테른(Modern·馬迭爾)’ 호텔이다. 당시 폭 21.34m, 길이 1450m의 중심거리 키타이스카야에는 르네상스, 바로크, 절충주의 등 유럽의 최신 건축사조를 따른 건물들이 경쟁하듯 들어섰다. 키타이스카야 덕에 하얼빈은 ‘동방의 파리’로 불렸다. 모테른 호텔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지금도 손님을 맞고 있다.

소설 ‘하얼빈’에서 이효석은 낭만주의적으로 이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나’는 키타이스카야 거리의 카바레 ‘판타지아’에서 춤추는 러시아 무희 유라와 함께 하얼빈 시내를 거닐며 허무주의자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렸다.

“나는 키타이스카야 거리를 사랑한다”고 말한 소설 속의 ‘나’는 “왜 이리도 변해가는가 이 거리는, 해마다…”라며 변해가는 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주인공은 쑹화(松花)강변의 요트 구락부에서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음식을 주문한 뒤 강 건너 태양도(太陽島)의 구석구석을 쌍안경으로 살핀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중앙대가와 쑹화강변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깃발’의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도 1940년 하얼빈을 찾았다. 그는 ‘하얼빈 도리공원(道裡公園)’(1942년 작)이란 시를 남겼다. 중앙대가 인근 도리(道裡·철도 부속지)공원은 1906년에 처음 조성됐다. 1946년 항일투사 리자오린(李兆麟) 장군을 이 공원에 안장하면서 자오린(兆麟)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는 하르빈 도리(道裡)공원/ 5월도 섣달같이 흐리고 슬픈 계후(季候)/ 사람의 솜씨로 꾸며진 꽃밭 하나 없이/ 크나큰 느릅나무만 하늘로 어두이 들어서서/ 머리 우에 까마귀떼 종일을 바람에 우짖는/ 슬라브의 혼(魂) 같은 울암(鬱暗)한 수음(樹陰)에는/…(중략) 창량(<8E4C><8E09>)히 공원의 철문을 나서면/ 인거(人車)의 흘러가는 거리의 먼 음천(陰天) 넘어/ 할 수 없이 나누은 광야는 황막(荒漠)히 나의 감정을 부르는데/ 남루한 사람 있어 내게 인색한 소전(小錢)을 욕구하는도다.”

러시아가 만주 지배 위한 거점으로 키워

태양도 동북항일연합군 기념공원에 마련된 유격대 조각상. [사진=신경진]
하얼빈은 만주어로 ‘그물을 말리는 곳’이다. 그 밖에 만주어로 ‘백조’라는 설, 몽골어로 ‘평지’, 여진어로 ‘영예’ ‘납작한 모양의 섬’이라는 주장도 있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에는 상하이(上海)와 하얼빈 두 개의 국제도시가 있었다. 중국 사학자인 포겔(Joshua A. Fogel) 캐나다 요크대 교수는 “상하이는 상이한 민족들이 나란히 살면서도 가능한 한 서로 뒤섞이지 않았던 모자이크 세계였던 반면, 하얼빈은 일종의 용광로였고 중국인조차 신입자(newcomers)로서 뒤섞인 개척자들(pioneers)의 도시였다”고 말한다.

하얼빈은 멀리 한(漢)대에는 부여(夫餘)국의 땅이었다. 고구려를 거쳐 수(隋)대에는 말갈(靺鞨), 당(唐)대에는 발해(渤海) 막힐부에 속했다. 거란족의 요(遼)대에는 여진족 계열인 완언부(完顔部)가 지배했다. 완언부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금(金)나라를 세운 뒤에는 수도인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가 됐다.

근대 도시로서 하얼빈은 러시아인의 진출과 궤를 같이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중 러시아 치타(Chita)에서 갈라져 만저우리(滿洲里)와 하얼빈을 거쳐 무단장(牡丹江)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2400㎞ 길이의 중동철도(中東鐵道·Chinese-Eastern railway) 부속지를 중심으로 도시가 개발됐다. 1896년 ‘중·러밀약’으로 러시아가 중동철도 부설권을 획득할 당시만 해도 하얼빈은 쑹화강변의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 1903년 중동철도가 모두 개통되면서 러시아인, 중국인 인구가 몰려들어 거대도시로 탈바꿈했다.

철도교통과 하천운수의 중심지 하얼빈은 러시아가 만주를 지배하기 위한 거점도시이자 ‘동양의 모스크바’였다. 키타이스카야를 중심으로 한 상업중심지는 20세기 초 러·영·미·일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각축전을 펼친 무대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관동지역과 만철(滿鐵)을 획득해 남만주지역을 확보했다. 하지만 하얼빈을 포함한 북만주까지 영향력을 뻗치진 못했다.

한편 청(淸)조는 1907년 하얼빈에 빈강청(濱江廳)을 설치하면서 행정권 강화를 시도했다. 이에 러시아 주도의 중동철도관리국이 ‘하얼빈 자치공의회장정(自治公議會章程)’을 선포해 시 중심지를 공의회 관할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청조에 대항했다.

일본의 영향력이 하얼빈까지 확대된 계기는 러시아혁명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 시베리아에선 반(反)볼셰비키 백군과의 내전이 벌어졌다. 일본군 7만 병력이 투입된 반혁명 ‘시베리아 출병’이 이뤄졌다. 출병의 전초기지 하얼빈에 일본인들이 쇄도했다. 1916년 하얼빈의 백계 러시아인은 3만4115명이었다. 1920년 13만1073명으로 4배 늘었다. 혁명정권에 반대한 정치적 망명이 급증한 탓이다. 그중 유대인 2만 명이 포함됐다. 내전으로 소비에트 러시아 정권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하얼빈을 무대로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전이 본격화됐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한 일본은 하얼빈을 특별시로 지정해 인구 100만 명을 목표로 하는 대(大)하얼빈 건설에 착수했다. 1928년 28만여 명이던 인구는 만주국 수립 후 40만 명을 돌파한 뒤 1940년 60만 명을 넘어섰다. 한때 봉천(奉天·현재의 선양(瀋陽)을 제치고 만주국 제1의 인구규모를 자랑했다.

공산당이 1946년 가장 먼저 해방시킨 곳

1930년대 번화한 하얼빈 중앙대가(中央大街)를 러시아 주부들이 거닐고 있다(왼쪽).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 1940년 하얼빈 여행 당시 묵었던 중앙대가의 모테른 호텔(오른쪽). 현재도 영업중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최초의 신중국 수도 후보지로 베이징이 아닌 하얼빈을 선택했다. 당시 마오는 중국을 한 마리 거대한 새로 보았다. 헤이룽장은 마치 날개를 펼친 백조와 같았다. 하얼빈은 바로 이 백조의 목 아래에 위치했다.

일본이 항복하자 곧 국민당 군대가 만주로 몰려왔다. 공산당은 1946년 동북에서 하얼빈을 가장 먼저 해방시켰다. 마오가 신중국 수도로 하얼빈을 고려한 것은 당시 가장 안전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소련에 가장 가깝고 소련의 지원과 도움을 받기 가장 편리한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당 중앙은 하얼빈을 특별시로 지정하고 이곳에서 신중국 건립을 준비했다.

동북으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하얼빈은 거리가 멀었다. 한번에 당 수뇌부가 옮겨가기 쉽지 않았다.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던 청더(承德)가 기착지로 선정됐다. 중공중앙 부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중앙경비단을 둘로 나눠 이전을 준비했다. 당중앙 보위를 책임진 중앙경비단과 ‘중앙선행경비단’으로 구분했다. 1945년 10월 400명으로 구성된 선발대가 옌안(延安)을 떠났다. 한 달여의 행군을 거쳐 청더에 도착할 무렵 동북의 전황이 급변했다. 국민당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동북에 병력을 증원해 교통 요지를 점령했다. 마오쩌둥은 급히 당중앙을 청더로 옮기지 않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중앙군사위는 중앙선행경비단을 화북군구 소속으로 재편했다.

1948년 랴오선(遼瀋)전투 전날, 동북야전군의 린뱌오(林彪)와 뤄룽환(羅榮桓)이 다시 당중앙을 동북으로 옮기는 일에 답신을 요청했다. 마오는 “당중앙은 반드시 관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므로, 나는 잠시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다. 하얼빈 수도론은 이렇게 좌절됐다.

세계 최대 얼음축제와 항일 투쟁의 도시

안중근 의사의 얼이 서린 하얼빈에는 만주를 무대로 활약했던 동북항일연합군(東北抗日聯軍)을 기념하는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동북항일연합군은 동북항일의용군, 동북반일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이 1936년 통일전선전술에 따라 재편된 다민족 연합군대로 당시 11개 군, 4만 병력의 규모였다.

해마다 1월이면 세계 최대의 겨울 얼음조각축제인 하얼빈국제빙설절 행사가 태양도에서 펼쳐진다. 태양도 한쪽에는 항일 승전 60주년인 2005년 조성된 동북항일연합군 기념공원이 있다. 대형 부조물과 만주벌판을 누비던 말 탄 유격대의 조각상이 있다. 하얼빈역사 인근 구(舊)만주국 하얼빈 경찰청 건물은 동북열사기념관으로 바뀌어 당시의 전사들을 기리고 있다.

독자와 함께 만듭니다  뉴스클립은 시사뉴스를 바탕으로 만드는 지식 창고이자 상식 백과사전입니다. 뉴스와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e-메일로 알려주십시오. 뉴스클립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newscli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