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하성봉의 중국이야기 18] 일본침략중국동북사실 전람관을 찾아서

ngo2002 2012. 5. 18. 14:31

일본, 중국 침략 만행 온 몸에 소름이…
[하성봉의 중국이야기 18] 일본침략중국동북사실 전람관을 찾아서
[0호] 2012년 03월 15일 (목) 하성봉·언론인 sungbongh@gmail.com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시 위만황궁(僞滿皇宮)내에 있는 ‘잊지 말자 9.18-일본침략중국동북사실’전람관은 일본의 만주침략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3천여㎡의 면적에 지하1층, 지상2층에 총 1천여m에 걸쳐 대량의 사진과 문물 및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일본의 끔찍하고도 잔혹한 중국 침략사에 몸서리가 쳐 질 정도다. 일본은 20세기 초중반 만주지역에서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고구려, 발해 등 우리 민족의 화려한 역사가 펼쳐진 영토가 일본에 의해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그 만행을 직접 겪거나 전해들은 중국의 동북지역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사무친한과 적개심이 남다르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일본을 지칭할 때 ‘쪽발이 악마’라는 뜻으로 “르번 샤오구이즈”(日本小鬼子)라고 부른다. 중국 정부가 CCTV에서 수시로 항일전쟁 다큐를 방송하고 항일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제작해 방영하는 것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 인민을 계도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뒤 중국대륙까지 삼킬 야욕을 품게 된다. 일본은 먼저 만주를 손아귀에 넣은 뒤 점차 대륙의 중원으로 총칼을 전진시켜 나아간다.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시 위만황궁(僞滿皇宮)내 ‘9.18-일본침략중국동북사실’전람관의 입구에는 한국어를 포함해 12개 언어로 '9.18을 잊지말라'란 표어가 적혀 있다. ⓒ하성봉
 

중국 대륙 다음에 일본의 궁극 목표는 세계 정복이었다. 탐욕에 눈이 먼 일본 군국주의는 최소한의 양심도 버리고 스스로 ‘사악한 악마’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졌다. 다시 열리는 만주땅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위해 만주국 당시의 역사상황을 중국자료를 참고해 아래에 정리한다.

9.18만주사변은 중국침략의 신호탄…남만주 철도 폭파뒤 치밀한 사건 조작

9.18만주사변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위한 신호탄이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은 치밀한 각본에 따라 진행됐다. 1927년 6월 일본내각은 도쿄에서 ‘동방회의’를 개최했고 ‘대중국정책요강’을 제정해 무력으로 중국내정에 간섭하고 중국 침략을 확대하는 ‘대륙정책’을 확정했다. 일본은 ‘대륙정책’이란 미명아래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강화했다.

   
일본군은 1937년 7월7일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盧溝橋)를 공격하면서 중일전쟁을 도발한다.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일본관동군은 1928년 6월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 부근의 황구툰(皇姑屯)에서 철도에 폭약을 장치해 당시 동북지역 군벌이던 장쭤린(張作霖)을 폭사시킨뒤 1931년 9월 18일 9.18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밤 10시20분 일본 관동군은 선양북쪽 류탸오후(柳條湖)지역의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무고한 백성에게 중국동북군 군복을 강제로 입혀 총살시키는 자작극을 벌였다. 그뒤 인근에 주둔하던 중국군 7여단에 누명을 씌워 공격하는 식으로 사건을 조작해 고의로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했다.

일본군은 궁극적으로 1937년 7월 7일 펑타이(豊臺)에서 군사연습을 하던 일본군 사병 한명이 실종된 것을 빌미로 베이징(北京) 교외 루거우차오(盧溝橋)를 공격하고 중일 전쟁을 도발해 중국 대륙을 삼키기 위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만주국은 일본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만주사변전 만보산(萬寶山)사건을  조작

일본은 만주사변 6개월 뒤인 1932년 3월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톈진(天津)에서 창춘(長春)으로 데려와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게 한다. 이는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통해 만주땅을 떡주무르듯 주무르기 위한 치밀한 음모였다. 그때부터 만주지역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일본은 1931년 7월 창춘셴(長春縣)만보산에서 농지수로문제로 충돌이 생기자 이를 만주침략의 구실로 삼았다.출처=중국포털 바이두
 

만주사변 직전 일본은 만보산(萬寶山)사건을 기획, 연출했다. 만보산 사건은 1931년 7월 2일 창춘셴(長春縣,현재 지린성 더후이셴德惠縣) 서북쪽 30㎞에 있는 만보산(萬寶山) 지역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사이에 농지 수로(水路) 문제로 충돌이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만해도 경제난을 이기지 못해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간 조선인이 100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국내의 중국인은 30만명으로 전해진다.

만보산 사건은 지난달 복거일 작가가 ‘거대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연극무대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무장경찰 60여명 동원해 38발을 발포했는데 중국인중 약간의 부상자외에는 별다른 인명피해가 없었다.

조선인과 중국인 이간질 ‘만보산 사건’…조선일보 오보로 국내 중국인 보복참변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인과 중국인을 교묘하게 이간질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일본측은 조선족 다수가 사상되었다는 허위정보를 제공했고 조선일보는 7월 2일 호외를 발행해 ‘만보산에서 중국 농민과 조선 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는 보도를 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 포털사이트 네이버 등에서는 “조선일보 창춘 지국의 조선인 기자 김이삼(金利三)이 전한 것으로 그는 이 정보의 진위를 가리지 않고 타전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중국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에서는 “일본이 조선일보 기자 김이삼을 돈으로 매수해 뉴스를 날조했다”면서 “처음 피살된 조선인이 200여명이었다가 이후 800여명까지 증가한 것으로 보도됐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일보의 오보로 조선인들이 국내의 중국인 상점을 보복공격해 수많은 중국인 사상자와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사진은 평양에서 파괴된 중국인 건물.
 

이 사건의 파장은 엄청나게 컸다. 조선일보 보도에 자극된 조선반도에서는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며 당시 중국인 142명이 피살됐으며 부상 546명, 실종 91명에 무수한 재산피해가 발생했다고 중국기록에 돼 있다. 조선일보 김이삼 기자는 7월 14일 <지장르바오>(吉長日報)에 성명을 발표해 뉴스를 날조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음모가 폭로되는 등 불리한 처지가 되자 김기자의 입을 털어막기 위해 조선인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7월15일 김기자를 살해했다. 조선일보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마수에 걸려들어 지워질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중국인이 쌀밥 먹으면 ‘경제범’으로 체포…궁핍으로 양식 10근에 딸 팔아 치워

일본은 9.18만주사변뒤 선양(瀋陽), 창춘(長春), 지린(吉林), 치치하얼(齊齊哈爾)과 하얼빈(哈爾賓) 등 동북3성의 주요도시와 요서(遼西)지역까지 순식간에 만주지역을 차지했다. 일본군은 1932년 1월 3개사단 4만병력이 랴오닝성(遼寧省) 진저우(錦州)에 대한 총공격에 나서 동북지역의 최후 요지를 장악했다.

이후 화북지역 공격에 나서는데 먼저 산하이관(山海關)을 점령하고 병력을 세갈레로 나눠 베이징에서 180㎞ 떨어진 러허(熱河, 현 청더承德-조선시대 실학자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무대임)로 들어갔다. 산하이관은 중국 역사에서 왕조가 바뀔 때 베이징으로 진출하기 위한 최후 관문으로 꼽힌다.

일본군은 중국이 무기력하게 대응하자 이후 만주지역에 대해 미친듯이 경제적인 약탈을 했다. 일본은 만주사변전에 수탈의 중추기구로 만주철도주식회사(약칭 만철滿鐵)를 설립해 중국인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빨대로 사용했다. 만주지역은 일본 식민지의 중요한 경제적인 지주가 됐다.

일본군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다음날 선양(瀋陽)에 있는 동삼성(東三省) 대금고(大金庫)를 점령해 금고내 황금 16만근(80㎏, 1근=500g)을 약탈했다. 또 만주중앙은행을 만들어 화폐를 발행했으며 만주국과 체결한 조약을 통해 만철경영의 철도 및 동북의 모든 철도교통을 마음대로 지배했다. 잇따라 만주항공주식회사, 만주전신전화주식회사, 다롄(大連)해관, 만주탄광주식회사, 만주중공업주식회사 등을 설립했다. 일본은 이 회사들을 이용해서 동북경제를 완전히 지배해 수탈구조를 더욱 확대해나갔다.

이 모든 것은 허수아비로 세운 푸이의 만주국과 맺은 협정에 의한 것이었으며 일본은 마음대로 물자를 약탈해갔다. 일본은 중국동북에서 임의로 석탄, 광석, 황금을 채굴했으며 목재와 양식도 수탈해갔다. 일본이 동북을 지배한 14년동안 약탈한 자원중 석탄 2억4천만t, 무쇠 1천200만t, 황금 22t, 식량 2억2800만t, 목재 1억㎥에 달했다.

일본은 ‘양곡관리법’을 만들어서 농민들에게 싼 가격으로 양곡을 출하하도록 강압하는 방식으로 약탈했다. 1944년 동북의 양곡생산량은 1928만7316t으로 출하량은 생산량의 절반에 가까운 45.5%인 879만 1700t에 달했다.

농민들은 쌀농사를 짓고도 쌀밥을 먹을 수 없었다. 만약 중국인들이 먹으면 경제범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은 농민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했을 뿐 아니라 무기와 탄약을 제조하기 위한 금속제품을 헌납하도록 했다. 관제묘(關帝廟)의 대종(大鐘), 불상이 약탈당했고 일반백성들의 밥솥과 밥그릇, 세숫대야 등도 마찬가지였다. 양식이 부족하자 백성들은 구걸에 나서고 심지어 아이를 파는 일도 빈번했다. 농민 쑨윈야오(孫允瑶)는 양식 10근에 딸을 팔아치웠다. 기아에 굶주린 농민들은 겨우 목숨만 이어갔다.

만주를 일본땅으로 만들려는 일본인 이민…시신에서 기름 짜내 사용하기도

일제는 영구적으로 만주땅을 점령할 목적으로 일본인 이민정책을 썼다. 일본은 이민정책을 7대국책중 하나로 책정해 1936년에는 20년내 100만호를 동북으로 이민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1937년부터 대규모 이민 정책을 실시해 일본인 이민자수는 1945년까지 10만호 30만명에 달했다. 일본은 청년여성들을 교육뒤 결혼시켜 동북지역으로 이민을 가도록했다. 일본은 밭, 논, 과수원, 어장 등을 빼앗아 점령한 토지에 담뱃잎 개척촌, 임업이민촌, 철도자경촌(鐵道自警村) 등을 세웠다. 1945년 일본 이민들이 강제점령한 토지는 265만경(1경=1만㎡)에 달했으며 중국 농민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일본군은 만주사변뒤 1932년 베이징의 길목인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해 중국을 코밑까지 위협한다.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일본은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광고를 통해 중국인 노동자들을 충당했는데 매년 200~300만명에 달했다. 처음 일본 본토에 압송된 중국인 수는 4만여명으로 1만여명이 일본에서 죽었다. 대부분 광산, 군사공정에 동원됐고 일본군의 총칼아래 위협을 받으며 각종 중노동에 시달렸다. 일본 관동군은 만주북부 싱안링(興安嶺) 공사에 중국인 1만5천명을 동원했는데 그중 6천여명이 사망했다.

특히 탄광에서 열악한 환경때문에 매몰되거나, 혹사당해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죽으면 야산에 버리거나 심지어 시신에서 기름을 짜내 사용하기도 했다. 일본은 1905~1945년 40년간 푸순(撫順)광산을 장악했으며 이곳에서만 30여만명이 죽어나갔다. 1937-1941년 4년동안 랴오위안탄광(遼源煤鑛)에서 죽은 자만도 7만4천명에 달해 매일 평균 50명이 죽어나간 셈이다.<출처=위만황궁 안내<僞滿皇宮 導游>위만황궁박물원 출판>

이와함께 일본문화가 만주땅에 하나씩 이식됐다. 1937년 신학제가 실시된 이후 일본어를 국어로 채택했다. 학생들이 학교시험을 칠 때와 취업할 때 일본어자격시험을 치렀으며 일본어 성적이 좋지않으면 냉대를 받았다. 청춘남녀가 결혼할 때 일장기 아래서 ‘화합 결혼’을 다짐해야했다. 학생들은 밥을 먹기전에 “황군(皇軍)이 배부르게 먹여줘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해야했다. 매일 아침 치르는 조회에서도 일본 국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일본어로 ‘국민훈’(國民訓)을 외워야했다. 다롄(大連), 옌지(延吉) 등에서 강제로 일본성명으로 바꾸도록 했으며 황민화정책을 실시했다.

만주국 황제로 임명된 푸이는 1940년 7월 직접 일본에서 ‘천조대신’(天照大神, 일본의 태양신)을 신봉하는 신사에 참배한뒤 신묘의 신령(神庥)을 받아온다. 그리고 일본이 1944년까지 만주땅에 건립한 신사만도 295개에 달한다. 푸이는 매월초 목욕재계한뒤 건국신묘(建國神廟)에 들러 청왕조 조상이 아닌 ‘새로운 조상들’에게 참배했다. 일본제국주의는 동북인민들에게 푸이와 마찬가지로 조상까지 바꾸도록 만들었다.

일본이 1940년말까지 각 현에 세운 경찰서 관할하의 파출소가 1108개에 달했다. 파출소 분소가 3450개에 이르렀으며 각 현의 40㎞범위마다 경찰서를 두었다.

항일운동가에게 저지른 만행 치떨려…전기고문,작두질에 인육을 술안주로

일본의 만행은 천인공노할 치를 떨게 하는 수준이었다. 항일운동가들에게 독이 든 주사를 놓아 죽이거나, 개를 시켜 물게 하거나, 전기고문을 가하거나, 찔러 죽이거나, 작두질 하거나 머리를 잘라 높은 장대에 걸어놓거나, 집위에 올려놓거나, 땅위에 던져놓거나 심지어 항일인사의 심장을 가르거나, 간을 삶아서 술안주로 삼는 등 인면수심의 잔혹한 짓을 했다. <출처=위만황궁 안내(僞滿皇宮 導游)>

3천여명 핑딩산(平頂山)아래서 대학살…우는 어린 아이를 칼로 찔러 죽여

일본 수비대와 헌병대는 1932년 9월 16일 ‘내통’을 죄명으로 푸순(撫順)시 핑딩산(平頂山)촌의 400여호, 3천여명의 군중을 산아래에 집합시킨뒤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해 죄없는 군중들의 피와 살이 튀고 시체가 겹겹이 쌓이는 대학살을 자행했다. 대학살은 한시간 가량 계속됐으며 신음하고 있거나 어린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칼로 하나씩 찔러죽였다. 이때 전 마을 700여 가옥을 불질러 태웠다. 일본은 대학살도 모자라 부근의 쑤자거우(粟家溝)에서 130여명을 추가학살하고 첸진자이(千金寨)에서도 수십명이 학살당했다. 당시에 쌓인 백골과 유물들이 역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남아 있다.

일본은 항일무장활동 지역에 대해 ‘불태우고 죽이고 빼앗는’(燒光, 殺光, 搶光) ‘삼광 정책’(三光政策)을 실시하고 강제로 이주시키거나 집단수용소 성격의 집단부락을 만들었다. 1939년말까지 집단부락은 1만3451개에 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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