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의원 취재 길을 떠난 허준 일행이 충청도 진천땅에 이르렀을 때의 일. 한밤중에 주막에 찾아와 부친의 병구완을 위해 애원하는 가난한 농부 부부를, 평생을 별러 떠나는 내의원 취재 길이라며 일행들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다. 그 소란 중에 허준은 무리들의 비아냥을 뒤로 한 채 농부 부부를 따라 나선다. 그 소문을 듣고 몰려든 빈촌의 무지렁이 백성들… 그들이 소용이 되는 산야초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질병으로 신음하는 것을 보고 허준은 의원으로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드라마 허준 의 한 장면이다. 동의보감에는 지금의 민간요법이랄 수 있는 단방(單放)처방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다. 유구한 세월의 강을 뛰어 넘어 현재에까지 전해져 오고 또 새로이 생겨나는 민간요법, 그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어보도록 하자.
감기에는 고춧가루를 푼 소주 한 잔이 그만 이라며 기어이 술자리로 끌고 가던 친구들의 모습, 서툰 다림질을 하다 데이면 주방으로 달려가 감자를 가져오셨던 어머니…이런 것들이 다 민간요법이 아니겠는가. 대체의학이나 자연요법이 주목을 받으면서 민간요법, 산야초, 자연식 등을 다룬 책들이 서점에 넘쳐나고 있다. |
감 이야기 한 가지 더. 과일 안주에 의례 들어가기 마련인 감은 술과 어울리는 궁합일까? 중국에서는 술안주에 감을 내지 않는 관습이 있다는데… 감을 따라 민간요법의 세계를 엿보도록 하자.기분이 좋을 때 마시는 술은 적당히 취할 뿐 뒤탈이 없는 반면, 기분이 나쁠 때 억지로 마시는 술은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탈이 나는 경우가 생긴다. 한의학적으로 보면 감정을 잔뜩 오그리고 있어 신진대사가 오그라드는 현상이다. 술기운이 잘 발산되지 않으니 다음날 숙취로 고생하기도 쉽다.
떫은맛이 있는 감 역시 오그라들게 하는 성질이 많다. 술안주로 감을 지나치게 먹게되면 술기운이 퍼지는 것을 방해해 숙취로 고생하게 된다는 것. 감으로 인해 변비나 소화불량이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장을 오그라들게 해서 잘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변비가 오고, 위장의 소화 활동을 억제하기 때문에 위장이 무력한 사람은 한 두 개의 감 만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감을 조심해야 될 사람이 있는 반면, 감 정도에는 끄덕도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한 잔의 커피에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여러 잔을 마셔도 별 상관없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따라서 감이 떫은맛으로 오그라들게 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을 알면 각자의 체질과 상태에 따라 조절이 가능하고 생활에 적용할 수도 있다. 감 뿐 아니라 쑥이 그렇고 인삼이 그렇고 많은 민간요법이 그러하다. 어떤 병에나 잘 듣는 만병통치약이 없듯이 누구에게나 좋은 약이나 음식은 없는 것이다. 다만 근거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에 따라서 민간요법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민간요법이 뭐꼬? 그럼 본격적으로 민간요법이란 녀석을 파헤쳐 보기로 하자. 민간요법은 말 그대로 의사나 한의사에 의한 처방이 아닌 민간에서 행해지는 간단한 치료나 대응법을 말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약재가 섞인 복방(複方)이 아니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산야초 등의 재료를 활용해 단방(單方)으로 쓴다. 아울러 지압이나 안마, 온천욕, 사혈(瀉血) 등 물리적인 요소가 동원되기도 한다.
인류는 경험적으로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함으로써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리가 아플 때 관자놀이를 누르고, 생강을 먹으면 구역질이 멎고, 매실을 먹으면 설사나 복통이 낫고, 땀띠에 복숭아 나뭇잎을 쓰거나 하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방법이 민간요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나아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것이 체계적인 이론으로 정립되면서 의학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과거에는 현재와 같은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기에,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고 손바닥이나 손끝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활용해 민간요법이 널리 행해져 왔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고도화된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여전히 민간요법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 실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현대의 의학도 그 기초에는 민간요법에 의해 개척된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 아니 그 이전부터 전해져 온 약초에 대한 지식이 의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는 의학적인 검증을 통해서 버려진 것이 있는 반면, 현대의학에 의해 재발견되거나 여전히 활용되는 사례도 많다. 한편 합성된 화학약품을 쓰는 데서 오는 약해(藥害)가 많아진 오늘날, 과거와 같은 생약요법은 물론 기(氣)나 최면술 같은 초과학적인 분야들이 널리 연구·응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민간요법의 또 다른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땅의 의학은 자생적인 의학의 토대와 함께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 한의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 왔다. 그러다가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와 중국 약재의 비교, 분석과 연구가 본격적으로 행해진 것은 고려말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그 무렵에 나온 향약구급방이 대표적인 사례. 이후 세종 때의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를 거쳐 향약 등으로 개별적으로 연구되던 것이 동의보감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향약(鄕藥)은 당약(唐藥), 즉 중국 약재에 대하여 우리 나라에서 나는 약재를 이르는 말이다. 자연 당시의 민간요법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후대에 나온 동의보감에는 한약 처방과 함께 단미재 중심의 단방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들이 향약이나 민간요법 등의 이름으로 민간에 보급되다가 대표적인 것들이 구전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 한편 이들은 몇 가지 약재를 혼합하여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 한약의 처방으로 의서(醫書)에 오르기도 한다.
따라서 민간요법은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의 치료법이라는 사전적 의미 외에도 향약이라는 뿌리가 있고, 중국의 의학과 구별되는 의학적인 정체성이 있는, 경험의학의 의미 또한 담고 있다. 향약의 연구에서 비롯되어 체계적인 한의학으로 정립되기까지 의학의 발달과정에서 나타난 또 다른 접근법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현대의학에 반하여 대두되고 있는 대체요법이나 자연의학의 흐름도 그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치료냐 예방이냐 한의학의 치료단계를 살펴보면 민간요법의 위치는 보다 선명해진다. 한의학에서 처방은 차를 응용한 한방차, 약재를 처방해 달인 탕약, 약재를 발효시켜서 치료하는 료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민간요법은 한방차 수준의 가벼운 방법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통해 증상에 대처하고 치료보다는 예방에 중점을 둔 간단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눈이 시원치 않아 시력에 좋다고 알려진 결명자 차를 마신다고 하자. 한동안 결명자 차를 복용해도 한약재로 처방된 탕약을 며칠 복용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그만큼 딱 부러지는 치료효과를 거두기도 쉽지 않지만 반면 부작용도 적다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효과도 확실하지 않은 민간요법이라면 굳이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예전처럼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세상도 아니고, 큰 병이 아니라면 비용 때문에 병원이나 한의원에 못 갈 이유도 없다. 하지만 치료를 위한 것이냐 예방을 위한 것이냐 라는 질문에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 질 수 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냐에 따라 민간요법은 여전히 현대적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민간요법은 전통의학이 그렇듯이 제도적으로 소외됐을 뿐 예방 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부작용이 적고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며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가정에서 어렵지 않게 활용할 수도 있다. 또 감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병원에 간다고 뾰족한 치료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 약이나 항생제의 남용이나 부작용으로 인한 염려도 없다.
첨단과학과 생명공학의 결합으로 많은 질병들이 파헤쳐지고 있지만 쉽게 원인을 찾을 수 없어 심인성이라는 애매한 진단이 내려지는 경우 또한 숱하게 많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예방의학의 한 형태로 민간요법의 가능성을 일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향약에서 출발한 민간요법의 또 다른 뿌리와 의학적 정체성을 살펴본다면, 그리고 차고 따뜻한 고유의 성질에 따라 음양이론으로 정리되고 정립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또 유구한 세월 속에 경험이라는 또 다른 임상의 형태를 거쳐 살아남았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민간요법은 여전히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쌀밥과 보리밥을 예로 들어보자. 한의학에서는 음양의 조화를 우선으로 여긴다. 쌀은 양의 기운이 충만한 무더운 여름을 견디고 가을에 결실을 맺는다. 반면 보리는 음의 기운이 강한 추운 겨울을 지나 이듬해에 수확을 한다. 따라서 겨울에는 따스한 쌀밥을 먹고, 여름에는 시원한 보리밥을 먹으면서 음양의 조화를 꾀했던 것이다. 동지나 보름에 먹는 팥죽이나 오곡밥이 그렇고, 삼복더위를 이겨내는 삼계탕이 그러하다. 음양의 조화를 찾는 섭생을 통해 건강한 삶을 지켜가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민간요법에 고스란히 베어 있는 것이다.
다만 민간요법의 무분별한 맹신과 남용은 경계가 필요하다. 만병통치 의 허망함과 마찬가지로 민간요법은 누구에게나 소용이 될 수 없다. 체질에 따라, 그 재료의 약성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현명함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의학적인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많은 방법들이 지닌 문제를 주의하고 신중하게 전문의의 자문을 구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농부들은 작물을 재배할 때 그루갈이나 휴경을 한다. 한 작물만을 같은 땅에서 계속 재배하면 지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토양의 질을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에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면 수확에서부터 그 차이는 분명해 진다. 민간요법이나 한방차도 마찬가지다. 좋다고 다른 것들은 무시한 채 한 가지만 고집하게 되면 부작용이 적은 민간요법이라 할 지라도 탈이 날 수 있다. 음식을 고루 잘 섭취하는 것이 열 보약보다 낫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남미의 빌가반바, 히말라야의 훈자, 그리고 코카서스 지방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소문난 장수촌이 그러하듯 현대의학의 첨단 과학도 자연(自然)이 베풀고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진 못한다. 그것이 장수이든 건강이든 간에 과학적인 검증과 함께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속에 미래로 가는 길 또한 있을테니. |
출처.............도움말 / 박종운 다호라한의원 원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