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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바둑이야기 - 1989년 제1회 응씨배 결승전 ③

ngo2002 2012. 1. 21. 10:51

[뉴스 클립] 바둑이야기 - 1989년 제1회 응씨배 결승전 ③

4강 올라온 63세 슈코, 제자 조훈현에게 “우리 결승서 만날 것”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우승은 ‘기적’이란 두 글자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그 이면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조훈현 특유의 강렬한 기질이 숨어 있다. 더구나 조훈현은 잘 제련된 승부사였다. ‘진흙 밭’이라 불린 한국 바둑에서 그의 성장은 잠시 옆걸음을 치기도 했지만 그의 내면은 무궁한 잠재력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세계 최고수들의 진검 승부인 응씨배에서 드디어 꽃망울이 터지듯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괴물 슈코와 조훈현

서울에서 열린 제1회 응씨배 준결승전에 세계 바둑의 눈이 집중됐다. 특히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사진) 9단의 모습이 이채를 더했다. 세계대회가 좀 더 일찍 시작되었더라면 그는 아마 우승을 휩쓸었을지 모른다. 술독에 빠져 살고 경륜·경마에 미쳐 상금의 태반을 쏟아부으면서도 일본 최대 기전인 기성전 타이틀 매치(7번기)가 시작되면 두 달 동안 술을 딱 끊고 도전자를 꺾어 수억원의 우승 상금을 챙겨가곤 했던 사람. “나는 1년에 네 판만 이기면 된다”고 호언했던 그 ‘괴물 슈코’가 놀랍게도 응씨배 4강까지 치고 올라왔다. 나이는 63세. 위암에 걸려 얼마 전 수술을 받은 그의 얼굴엔 동아줄 같은 주름이 깊게 파였고 바짝 말라 앙상한 팔은 고목과도 같았다. 하지만 판을 노려보는 눈빛만은 더욱 형형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슈코는 좋아하는 제자 조훈현 9단과 만나자 어린애처럼 환하게 웃었다. 어렸을 때 조훈현은 슈코의 복덕방에서 뚝딱뚝딱 바둑을 두었다. 물론 접바둑이다. 이기면 용돈을 벌고 지면 슈코의 어깨를 10분씩 두드려야 했다. 슈코는 커 가는 조훈현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바둑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딱 두 명, 자신과 조훈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준결승 전날 저녁 식사 때 슈코가 조훈현에게 장난스럽게 소곤거렸다. “우리가 결승에서 만나는 건 기정사실이겠지. 한데 그땐 어떻게 하냐. 져야 하나, 이겨야 하나.”

조훈현, 이중 허리를 베다

천부의 재능을 타고났고 최고의 스승들에게 배운 조훈현이란 ‘잠룡’에게 응씨배 세계대회는 하늘의 선물이었다. 잊혀진 변방의 고수 조훈현은 예상을 뒤엎고 당대의 린하이펑 9단을 완파하고 결승에 올라 드디어 중국 최강자 녜웨이핑과 마주 앉게 된다. [한국기원 제공]

1989년 11월 20일 준결승 3번기의 첫판이 시작됐다. 조훈현 9단(한국) 대 린하이펑 9단(대만), 후지사와 슈코 9단(일본) 대 녜웨이핑 9단(중국)의 대결이 동시에 열린 롯데호텔에 한국 바둑 사상 최대 인원이 운집했다. 심판을 맡은 기성 우칭위안 9단 부부와 중국위기협회 주석 천쭈더 9단, 대만 잉창치씨 부부 그리고 조남철 9단, 서봉수 9단 등 숱한 고수 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해설장엔 팬들이 700명 넘게 몰려들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우칭위안과 그의 제자 린하이펑은 중국 본토 출신이지만 중국이 바둑과 멀어진 사이 대만과 가까워졌다. 녜웨이핑은 중국의 고위 공산당원. 이들 사이엔 한국의 남북관계 같은 보이지 않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엔 중국에서도 14세 때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바둑을 석권한 우칭위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만들어지는 등 ‘살아 있는 기성’ 우칭위안을 재조명하고 있다.)

조훈현은 본시 전류같이 빠른 행마, 빠른 감각을 지닌 사람이지만 린하이펑과의 대결에선 좀 더 격렬하고 사나운 전법을 구사했다. 린하이펑은 느리지만 두텁다. ‘이중 허리’라는 별명 그대로 한 번 허리가 잘려도 다시 살아난다. 날카로움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면도날’ 사카타 에이오(坂田榮南) 9단도 린하이펑의 이중 허리에 걸려 자신의 시대를 접어야 했다. 이중 허리는 장기전에서 더 빛을 낸다. 따라서 조훈현은 거듭 타격을 가하며 승부를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조훈현의 전법은 적중했다. 백을 쥔 1국은 대마를 잡고 끝냈고 흑을 쥔 2국은 날카로운 급소 일격으로 5집을 이겼다. 하지만 녜웨이핑과 맞선 슈코는 노구를 이끌고 전력을 다했으나 두 판 연속 반 집 차로 물러났다.

승리한 조훈현이 해설장으로 들어서자 장내를 가득 메운 팬들은 5분이 넘도록 기립박수를 보냈고 조훈현은 기어코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의 8강전은 너무 힘들었다. 지옥 문턱에서 겨우 되살아났다. 하나 그 판을 이기면서 묘하게 자신감이 생겼다. 오랜 세월 주눅이 들었던 일본 바둑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준결승전은 완승이었다. 조훈현도 자신의 잠재력이 서서히 힘을 내는 것을 느꼈다. 전문가들은 다른 것, 즉 조훈현이 1국에서 보여준 두 번의 ‘빈삼각’에 주목했다.

두 번의 빈삼각-한국류의 태동

빈삼각은 미학(美學)을 중시하는 일본 바둑이 오랜 세월 결코 결코 두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온 바둑판 최대의 우형(愚形)이다. 하지만 조훈현은 일생일대의 승부에서 그 빈삼각을 두 번 연속 사용했고 신기하게도 이 두 번의 빈삼각이 린하이펑의 이중 허리를 베는 결정타가 됐다. 조훈현은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바둑을 더 많이 배웠으므로 그의 바둑의 원형은 일본 바둑 쪽일 게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 돌아와 서봉수 9단 같은 토종 고수들과 한국식(?) 거친 전투를 거듭하면서 일본 바둑이 밟아보지 못했거나 경원시했던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한걸음 다가서고 있었다.(※일본 기사들은 그것을 한국식 실전 바둑, 또는 ‘한국류’라 명명했다.) 빈삼각을 둔다는 것은 금기를 깨는 것이다. 일본 바둑이 쳐놓은 통제선 밖으로 나가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훗날 세계 바둑을 완벽하게 제패한 ‘한국류’가 조훈현의 빈삼각에서 살짝 한 자락을 드러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채롭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류의 대성공을 간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슈코, 암투병 중에도 화려한 행마

슈코는 첫판에서 ‘1집’ 차로 역전 당했다. 응씨룰의 1집은 한국룰의 ‘반 집’과 같다. 암 투병 중인 63세의 노기사 슈코의 바둑은 마치 벚꽃이 만개한 듯 화려했다. 슈코는 내면의 불길을 활활 태우며 중국의 최강자 녜웨이핑을 압박해 절대 우세의 국면을 만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종반으로 갈수록 에너지가 바닥났다. 계속 추격 당하더니 결국 1집 차로 역전 당하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2국 역시 똑같은 코스를 밟아 1집 차 역전패로 끝났다. 녜웨이핑은 경악했다. 이기겠다고 작심한 슈코는 술꾼이나 도박꾼이 아닌 전혀 딴 세상 사람이었다. 초·중반까지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녜웨이핑은 고백했다. “슈코 선생이 10년만 젊었어도 내가 졌을 것이다.”

슈코는 자신의 패배를 믿을 수 없었다. 젊은이들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자신에게는 그걸 뛰어넘는 철학이 있다고 확신했던 슈코. 하지만 그는 늙었고 상대는 너무 강했다. 생명의 마지막 1g까지 던진다는 심정으로 싸웠으나 그의 몸은 너무 쇠약해져 있었다. 슈코의 승부 인생도 그렇게 끝났다. 그는 67세 때인 92년 일본 왕좌전에서 한 번 더 우승했고 그 최고령 우승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남아 있지만 ‘당대 최고수 자리’를 놓고 겨루는 승부는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2009년 바둑판을 영영 떠났다.

조훈현과 녜웨이핑의 결승전은 5개월 뒤인 89년 4월,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열렸다.

중국 가는 길은 험난했다


선수는 조훈현 한 명뿐이었지만 선수단은 단장·감독·기자 등 10여 명이나 됐다. 중국과 국교가 없었으므로 일행은 홍콩으로 가 항저우행 비행기를 탑승하기로 했다. 한데 이 무렵 중국은 가난하고 부패했다. 뒷돈을 안 주자 비행기 표도 나오지 않았다. 3일을 버틴 끝에 간신히 표를 구해 항저우로 떠났다. 비 내리는 항저우 공항엔 수풀 곳곳에 전투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잔뜩 긴장해 거리로 들어서니 이곳은 너무 평화로웠다.

비 오는 거리를 비옷 입은 자전거 행렬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남자는 국방색, 여자는 희색이나 주홍색. 미니스커트와 핫팬티 차림도 있다. 밤에는 맨발의 인력거가 거리를 질주했다. 숙소인 샹그릴라 호텔엔 벌써 중국 전역에서 60여 명의 기자가 모여들었다. 숙소 바로 앞에 펼쳐진 서호(西湖)는 안개가 자욱해 더욱 신비로웠다. 그 안갯속에서 차를 파는 젊은 여인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녜웨이핑은 당시 최고 실력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이 보내줬다는 미녀 브리지 선수와 시간을 보냈다. 조치훈에 이어 슈코마저 꺾은 녜웨이핑은 여유만만했다.

조훈현 9단은 서호의 안갯속을 거닐며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과의 일전을 머릿속에 그렸다. 갈색 곰 같은 이미지의 녜웨이핑은 강인한 기풍의 소유자다. 뒤로 갈수록 강해 한번 밀리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 신기하게도 머릿속은 텅 빈 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4월 25일 드디어 결전이 시작됐다. 5번기의 첫판이 시작된 것이다. 조 9단의 부인 정미화씨는 근처의 영은사로 떠났다. 남편의 승리를 기원하고자 108배를 올리기 위해서다. 상금 40만 달러는 당시 US오픈 골프대회 우승 상금(18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 큰돈이었다. 가난한 중국은 세기의 대결보다도 40만 달러가 더욱 화제였다. 녜웨이핑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녜웨이핑이 우승하면 40만 달러는 어디로 가느냐, 그게 더 큰 관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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