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28. 속세를 떠났으니 진정한 유토피아다(3) 암반 위로 흐르는 물 보는 이마다 감탄 |
입력시간 : 2010. 07.05.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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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막딱따구리 울음 온산 진동
입석대 힘 넘치는 포성감 풍성
남한 반도의 중심에서 내려다보이는 것은 모두가 산으로 그래서 우리나라는 산악국가임이 올바른 표현이다. 산의 능선 따라 길게 이어지는 계곡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내렸다. 언뜻 스치는 산시 한 구절이 떠올라 빠른 글씨로 수첩에 적었다.
시루떡 포개둔 만물상처럼
세속을 떠난 아득한 전설처럼
선선이 봉봉봉….
온몸을 뼈 속까지 훑고 지나간 바람이
머물다 떠난 자리 메아리로 울리고
사방이 휑한 공공공….
속(俗)을 떠났으니離 그곳이 진이라
저만치 발아래에 희미한 내 삶의 거처여
송곳처럼 솟은 태산의 문장대 와~와~와.
커다란 암석이 하늘 높이 치솟아 흰 구름과 맞닿아 있어서 손을 뻗어 올리면 손에 잡히는 구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봉의 정상에는 사방으로 둘러친 안전 철책을 둘러서 다행히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문장대 입구의 휴게소 앞 양지바른 곳에 모인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땀 흘린 후의 점심 식사는 김밥덩이 두 개 뿐이지만 된장을 발라먹는 풋고추가 어찌나 매운지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앗~싸”
입 밖으로 불어대는 매운맛이 구름 산을 뒤덮는다. 산행의 고단함이 매운맛에 가려진다. 잠깐의 쉴 틈도 없이 하산을 시작해야만 했다. 타고 왔던 관광버스는 법주사 주차장으로 이동해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천황봉에 기어이 오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철조망으로 막아버린 좁은 틈새 사이의 샛길을 따라 문수봉으로 향했다.
화강암을 기반으로 한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고 깊은 봉우리와 계곡으로 가히 천하제일의 절경을 이루고 서 있는 문수봉(1천031m)이 눈앞에 나타났다.
능선으로 난 등산로는 바위사이의 흙 길로 포근했지만 가끔은 바위 위로 널뛰기하듯 건너 가야하는 구간도 있었다. 시누 대라고도 불리는 산죽은 무성한 곳에서는 대나무의 키가 사람 키와 비슷해서 양팔을 벌린 채로 상체를 가리면서 걸어야만 얼굴을 긁히지 않는다. 앞사람과 조금만 거리가 벌어져도 산죽에 묻혀 보이지 않았지만 천만다행으로 외길이어서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죽은 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두 마리의 까막딱따구리(천연기념물 제242호)가 먹이를 찾느라고 나무 가지를 열심히 쪼는 소리가 온 산을 진동한다.
“따다닥 따다닥….”
지르박 리듬처럼 일정하게 들리는 까막딱따구리의 자연을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지친 몸을 즐겁게 해주었다. 신선들이 모여 놀았다는 신선대의 경이로운 모습에 가야할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지만 지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기묘한 모습의 山이 있을까? 쓰러질 듯 위태롭게 포개진 암석들이 언제 쏟아질지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 동안 어느새 커다란 입석대가 눈 안에 들어왔다.
입석대는 법주사와 동북방으로 5.5㎞ 떨어진 곳으로 관음암에서 1㎞ 지점에 위치한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임경업 장군이 7년 동안 수도 정진한 끝에 주변의 바위들을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무등산의 입석대처럼 곧게 뻗어 내린 바위기둥들이 당장에라도 내게로 넘어질 듯 위태롭게만 보였다.
입석대의 중앙에 우뚝 선 입석은 마치 남성들의 심벌처럼 곧게 솟은 모양에 힘이 넘치고 포만감으로 풍성하게 보였다. 특히 하늘을 향한 끝 부분이 뾰쪽해서 너무나도 흡사한 ‘거시기’와 똑같이 빚어낸 임경업 장군에게 경의를 표한다. 황홀한 저 모습에 반하지 않을 한국 여자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빚어낸 비로봉(1천032m)의 신묘한 암석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돌들의 오묘한 배치가 시선을 고정시킨다. 집채보다 더 큰 두 개의 바위덩어리위로 포개진 입석사이 출입문처럼 사람이 통할 수 있는 천황 석문이 큰 입을 벌린 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도 암석으로 사방이 돌로 쌓인 석문을 통과하자 드디어 속리산의 제일봉인 천황봉이 나타났다.
속리산의 모든 비경이 내려다보이는 정상!
최고봉으로 산세가 웅장 수려하며 세 강의 물 뿌리가 되어준다. 큰 山에는 큰물이 흐르는 법이라지만 하나의 거대한 바위덩어리인 속리산은 계곡 물이 적기만 하다. 山의 덩치가 적어서라기보다 바위 틈새의 절리사이로 파고 든 물길이 지하로 스며들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곧바로 땅 밑으로 스며드는 물이지만 암반 위로 흐르는 물은 어찌나 투명한지 보는 이마다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고 한다.
이마의 땀이 식기도 전에 내려가는 길을 서둘러야 했다. 멀리 보이는 삼가 저수지의 수면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흰색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곳은 복지 중에서도 왕발복지라는 십승지의 한곳이 아니던가! 법주사주차장에 나란히 줄서 있는 승용차들이 작은 성냥갑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내려가는 길의 오른편으로 아담한 곳에 자리한 상고암 입구의 거대한 돌 거북은 자연석을 다듬어 거북처럼 만들어낸 솜씨가 제법이다. 약수를 마시며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식혔더니 한결 몸이 가벼웠다. 암자를 돌아 길을 따라 내려가자 상환 석문이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석문의 설주에는 산행자들이 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깊게 음각한 글씨가 너저분하게 새겨져 있었다. 산은 모든 이의 것으로 바위에 글자를 새기는 낙서 행위는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석문을 벗어나자 상환암이 나무숲에 몸을 숨긴 채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등에서 흐르던 땀이 나무 가지로 가려진 터널 길을 지나는 사이에 식어버려 한기를 느낄 정도로 시원했다.
이정표에는 태실(胎室)가는 길이 0.5㎞라고 쓰여 있었다. 속리산의 모든 이정표에는 현재의 위치 표시가 되어있지 않고, 갈 곳의 방향 표시와 거리만 기록되어 있어서 안타까웠다.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점이다.
광주국립박물관 마당에는 커다란 태실이 원래의 모습대로 전시되어 있는 터라 여러 차례 보아왔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태어난 생명의 태를 소중히 여겨 전국의 명당 터에 태를 묻었다고 한다. 절구통처럼 커다란 돌 속에 태어난 아이의 태반을 곱게 싸서 넣고 묻은 속리산의 순조 대왕 태실은 관상감에서 이곳의 명당 터를 잡아 소중하게 묻고 왕실의 밝은 운세를 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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