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66) 사도 바울의 자취를 따라서
이방인도 선교하자던 바울, 갈등 빚은 베드로와 동굴서 화해했다죠
백성호 기자
이성을 중시하던 아테네
사도 바울은 4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다녔다. 터키에서 그리스까진 비행기로 고작 1시간30분 걸렸다. 바울은 이 길을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서 갔다. 무려 7만㎞다. 아테네 시내에선 높다란 언덕이 한눈에 보인다. 그곳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 신전으로 가는 길에 바울의 유적지가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파했다는 법정(法庭) 터다.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하느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는다.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은 금상, 은상,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선 안 된다”고 말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외면했다.
아네테 사람들에겐 ‘메시아(구세주)’란 관념이 없었다. 따라서 ‘부활(아나스타시스)’이란 말도 수용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중시했다. 아고라 광장에서 바울은 아테네의 에피쿠로스(쾌락주의) 학파나 스토아(금욕주의) 학파와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그런 바울을 철저히 외면했다. 아테네에서 바울의 선교는 참패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의 국교는 기독교다. 그리스인의 98%가 그리스 정교를 믿는 기독교인이다. 바울이 뿌렸던 복음의 씨앗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열매를 맺었다. 바울은 당시 그걸 알았을까. 어쨌든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다.
바울의 도시, 고린도
당시 고린도는 부유한 항구 도시였다. 도시의 양쪽 겨드랑이에 커다란 항구를 끼고 있었다. 하나는 이오니아해, 또 하나는 에게해와 통했다. 옛날에도 항구를 낀 도시는 규모가 컸다. 교역이 활발한 만큼 사람과 돈이 많이 몰렸기 때문이다. 도시 중심부에서 항구까지 돌로 포장한 도로가 깔릴 정도였다.
고린도에도 높다란 산이 있었다. 그 꼭대기에 신전이 있었다.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을 모시는 곳이었다. 바울 당시에는 신전에 약 1000명의 여사제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고린도는 그다지 부산하지 않다. 오히려 한적한 시골이다. 들판에는 붉은 개양귀비 꽃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고린도 사람들은 주로 오렌지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는 무역 도시였다.
바울의 서간 중 가장 긴 편지가 ‘고린도 전·후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간 머물렀다. 그리고 교회를 세웠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스 철학은 서양 철학의 모태다. 그러니 바울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서양철학의 뿌리에 맞섰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나의 지혜가 무너진 곳으로 그리스도의 지혜가 밀려온다고 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목선을 타고 에베소로 갔다. 고린도에는 바울이 배를 탔다고 추정되는 해안도 있었다. 바울이 건넜던 에게해가 한눈에 보였다.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 에베소
에베소에는 무너진 돌과 기둥 등 유적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옛 신전과 원형극장, 로마식 공중목욕탕 등이 눈길을 끌었다. 2000년 전에 만든 도로가 항구에서 도시의 중심까지 이어져 있었다. 2세기에 건립됐다는 셀수스 도서관 유적의 위용은 대단했다.
바울의 첫 전도여행 목적지도 실은 에베소였다. 그러나 길이 막혀 터키 서부와 그리스 땅을 거친 뒤에야 뱃길을 통해 에베소로 왔던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에베소서 5장 8절).”
바울 당시의 일화가 떠올랐다. 어떤 사람이 주위의 그리스 신상을 둘러보며 바울에게 물었다. “이 많은 신의 석상 중 당신이 믿는 신은 어느 신이오?” 주위를 둘러보던 바울은 하나의 석상을 발견했다. 그 석상에는 ‘이름 없는 신’이란 명패가 붙어 있었다. 바울은 그걸 가리키며 “내가 말하는 신은 바로 저 ‘이름 없는 신’이오”라고 말했다.
에베소를 떠나 다소로 향했다. 다소는 바울의 고향이다. 유년기의 바울과 청년기의 바울은 어땠을까. 다소에 가면 그런 ‘젊은 바울’의 자취를 볼 수가 있을까.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던 바울은 어떤 사연으로 예수의 제자가 됐을까.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종교가 되는 디딤돌이 됐을까. 그런 의문을 잔뜩 안은 채 다소로 향했다.
바울의 고향, 다소
바울의 집은 부유했다. 유대인 바울은 정통 유대교식 교육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갔다. 한때 정통파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은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생가 터에서 나왔다. 거리를 걸었다. 생가 터 옆에는 공원도 하나 있었다. 공원 입구에는 터키어로 ‘SAINT PAUL PARKI’(성 바울 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예수와 12사도, 그리고 바울은 동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도 목격하지 못했다.
예수가 죽은 지 2년쯤 지나서였다. 바울은 예수의 제자인 스테파노(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다. 스테파노는 유대 법정에서 “예루살렘 성전 예배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며 유대교 율법을 비판하다가 성 밖으로 끌려나가 돌에 맞아 죽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테파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이 죄를 저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 그걸 봤던 바울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커다란 물음표가 생겼을까. 그에겐 스테파노의 용서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바울은 전도 여정에서 수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유대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몰매를 맞았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고,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도 세 번이나 당했다. 밤과 낮,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떠다니며 표류한 적도 있었다.
바울과 베드로의 화해, 안디옥
2000년 전에 안디옥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벽돌도 없고 창문도 없다. 그 교회는 동굴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명칭은 ‘베드로 동굴교회’였다. 지금도 안디옥 외곽에는 그 동굴교회가 있다.
그곳을 찾아갔다. 커다란 바위산이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동굴 중 하나가 교회였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로마 병사의 눈을 피해서 사람들이 모였다. 동굴은 로마병이 들이닥칠 때 피하기도 용이했다. 동굴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비밀통로를 통해 피신로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동굴 속 비밀통로에 들어서면 길을 잃기 십상이라고 한다. 많은 굴이 땅속에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 동굴에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만나서 화해를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예수의 제자들도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는다. 유대교에서 할례는 구원에 대한 징표이기 때문이다. 초기에 예수의 제자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바울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자고 했다. 당시 바울의 주장은 파격적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조차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도 이방인과 식사를 했다가 심하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초기에 바울은 이런 주장으로 인해 예수의 제자들과 충돌했다고 한다. 이 동굴교회에서 바울과 베드로가 만나서 화해를 했다면 거기에 관한 일 때문이 아닐까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당시 바울의 이방인 선교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유대의 종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방인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결국 세계의 종교가 됐다. 유대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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